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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무엇이든 글을 쓰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읽어봐야 할 걸작 !
내 오른쪽 손의 중지는 기형이다. 손톱 옆살이 누구에게 얻어맞아 혹이 난 듯 두툼하게 살이 솟아나 있고, 돋아난 살 가운데는 점이 들어있다. 그리 보기 좋은 손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또 사내의 손가락이 딱히 보기 좋아야 할 이유 역시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 손가락을 유심히 지켜볼 때가 생기면 사이즈가 20이라서 반지 값이 꽤 들었던 유난히 굵은 약지의 굵기보다 항상 오른쪽 손의 중지에 신경이 쓰인다. 어린 시절엔 왼쪽 중지와 엇비슷하게 평범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 중지 손가락은 거의 3 년 동안 항상 벌겋게 달아올라 손만 대도 아팠고, 모양도 차츰 흉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결국 가운데 손가락은 심하게 기형이 되어버렸고, 난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흉한 가운데 손가락은 비단 나만의 소유물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손가락을 살펴보라(왼손잡이는 왼손 중지를 보시길). 거의 대부분 반대쪽에 비해 살이 돋아있거나, 약간 비틀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은 대부분 육각의 모서리를 가진 한 자루에 70원 짜리 모나미153 볼펜 덕분이며, ‘죽도록 외워는 자가 이길 수 있도록’만든 제도권 교육 정책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되돌아 보면 하루 종일 펜을 쥐고 뭔가를 적는 모습이다. 영어단어든, 수학공식이든, 하다 못해 교과서 모서리에 낙서를 하든 뭔가를 끼적댔다. 그리고 나처럼 머리가 많이 둔해서 쓰는 만큼 외워진다고 생각한 학생은 유난히 많이 그 짓(?)을 했을 것이고, 머리가 아주 좋은 학생이거나, 아예 머리 굴리기를 포기한 학생이라면 비교적 덜 끼적댔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뭔가를 하루 종일 썼다. 하지만 그 글 속에는 내가 없었다. 만약 그 시절 노트에 나의 이야기와 내 생활을 적으라 했다면, 그래서 그것을 누가 봤더라면 담임은 심각한 부모님을 불렀을지 모른다. ‘공부 없는 세상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이라고 썼을 테니까.
열 두 해 동안 손에 펜을 쥐고 항상 뭔가를 긁적거렸으면서도 난 ‘글쓰기’를 못한다. 방학숙제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숙제가 ‘일기’였고, 반성문을 쓰기 싫어서 한 번쯤 할 법한 일탈도 꿈꾸지 않았다. 그랬던 요즘 들어 내가 느즈막히 글쓰기에 관한 책을 구해 읽는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남아나는 빈대가 없다’고 했던가? 뭔가를 끄적이고 끼적거리는 짓에 재미가 들었기 때문이다. 재미야 둘도 없이 친한 친구와 질펀하게 술마시며 밤을 지새우는 재미만 하겠는가? 하지만 글쓰기에는 그도 따를 수 없는 묘한 재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나와 노는 재미’가 있다는거다. 그 재미를 더하고자 또 한 권을 집어들었다. 어제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한문화)를 읽었다.
글쓰기는 이태백의 술잔이다. 그가 사랑한 술 속에 꿈에라도 가고 싶은 달 그림이 담겨 있듯, 내가 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글이란 것이 묘해서 쓸 때는 내가 되더니 쓰고 난 뒤에는 남이 되어 나를 보게 한다. 원래 글의 목적이란 ‘남기기’ 위함일진대 쓰다가 보면 그 목적보다는 ‘나를 살피게’ 되더란거다. 그래서 글쓰기는 맹랑한 궁싯거리기가 아니라 ‘나와 내 속의 나의 대화’란 것을 알았다. 기왕에 대화를 나눌 바에는 보다 잘 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명저’로 소문난 책이다. 1986년에 작가이자 글쓰기 강사인 나탈리 골드버그에 쓰여진 이 책은 출간되고 백만 부가 넘게 팔리고,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면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책이다. 그녀의 글에 주목해야 할 것은 글쓰기와 저자가 체험한 선禪이 접목되었다는 사실이다. ‘덜어내고 덜어내고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을 때 완벽한 글이 나온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이 있듯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최고의 글이 되는 것과 간결하고 고요한, 그리고 심플하고 따뜻함을 추구하는 젠(Zen, 禪)은 묘하게 닮았다.
그렇다면 다소 음산한 제목이 말하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의미는 뭘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이 책의 한 부분, 가령 모든 사물에 개별적인 정체성을 주어 접근하라는 글을 읽었다고 치자. 이 말은 추상적이거나 아주 일반적인 문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이번에는 자신을 누르지 말고 감정의 파도에 실린 그 상태로 글을 몰고 가야 한다고 써 있다. ‘진실을 글로 나타내려면 쓰는 이가 자신의 내면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본문 17 쪽)
글쓰기에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검열’이다. 글을 써서 한 문장이 채 완성도 되기 전에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소름이 돋는다’고 스스로 평한다던지, 도대체 맞춤법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사전을 찾고 싶어진다면 내가 쓴 두 번째 문장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사람들이 저마다 울음소리가 다른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사연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실컷 울고 나면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울면서 ‘모두’ 토하듯 말을 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주제가 무엇이든, 소재야 어떻든 우선 머릿속 생각을 비우듯 아무 제약 없이 남김없이 글로써 쏟아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경험과 선체험을 더해 이야기해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깊숙한 내면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로 나타낼 수 있도록, 그리고 글을 쓸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손을 계속 움직이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본문 26 쪽)
저자는 목표에 닿기 위해서는 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목표란 ‘진짜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을 쓰는 것‘이고, 이럴 때 바로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글쓰기 훈련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글쓰는 연습‘이다. 연습의 결과는 ’습관화‘다. 이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지 않으면 하루를 개운하게 시작할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치 흡연가가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점심을 먹는 자리를 가서도 식사 후엔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과 같다. 하루에 단 한 단락이라도 글을 쓰지 못하면 허전해져서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될 때 글쓰기 훈련은 완성된다. 저자는 글쓰기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 훈련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가게 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옳았을 때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글쓰기 훈련은 진정으로 쓰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쓰기에 앞서 몸을 데우는 워밍업 단계다. 훈련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전에 거쳐야 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본질적인 바탕 그림에 해당한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법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이 사업상의 서류이든 장편 소설이든 박사 논문이든 또는 여행기이든, 그 글에는 힘이 실리게 된다.“ (본문 30 쪽)
세상에 천재는 없고 1만 시간의 열정과 노력을 다한 아웃라이어만 있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처럼, 타고난 글쓰기 천재는 없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필자가 각고의 고통을 감수하며 어렵게 쓴 글이다. 기상해서 양치질을 하듯, 흡연가가 식후에 담배 생각이 나듯 내 생활 속에 ‘글쓰기’가 배어 있다면 좋은 글을 쓸 준비는 마친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저자 만의 글쓰기 훈련법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 달에 노트 하나를 채우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 한다(나는 작품을 쓸 때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 안내서를 항상 새롭게 만든다). 그저 이 노트를 채우면 그만이다. 그것이 내가 정한 나의 글쓰기 훈련법이다. 이것이 나한테만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지 못할 때도 스스로를 심판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튼 자신의 이상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지 않는가.” (본문 32쪽)
저자가 제시한 문장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조언은 바로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라는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우선 내가 바라봐야 할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니고, 신경숙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속에 담기 내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글로 옮길 수 있다면, 그것은 나를 비우는 작업이 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민과 열정을 토해낼 때 나는 ‘후련함’을 경험할 수 있다. 글쓰기는 머릿속을 비우는 작업이요, 다시 채울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 글쓰기는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가 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작가’를 꿈꾸는 이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쩌면 우리는 이미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댓글을 달며, 이메일을 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 미니 홈피와 블로그라는 나만의 공간에서 맛집과 영화, 그리고 상품에 대해 평을 하고,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자 글쓰기 선배의 선험적인 고백이다. 그래서 자못 딱딱한 이론 수업이 될 법한 글쓰기론이 한 편의 수필이고 자전적 소설처럼 읽힌다.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금방이라고 책을 덮고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게 하는 충동을 일으키게도 한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글쓰기의 바이블’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는 저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저자는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라고 했다. 두 달 전에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기에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 없는 여행일지라도 절대로 부러질 리 없는 지팡이와 튼튼하고 편한 신발, 그리고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모자가 있다면 다소 막연한 여행이라도 떠나봄직 하지 않을까? 글쓰기의 여행을 떠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지팡이가 되고, 신발이 되며, 모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