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조용하지만 열렬한 책 이야기
장영희.정호승.성석제 외 지음, 전미숙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토종 책벌레들의 29 가지 책예찬론 !

  어른스러워질수록 호불호好不好는 줄어든다. 대신 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굳어진다(이 말은 극단적으로 변한다는 말도 되겠다). 지극히 어른스러운 스물 아홉 사람이 한 가지 물건에 대해 자신의 사랑을 예찬했다. 물건은 바로 ‘책’이다. 극단적인 그들의 책 사랑이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으로 표현되어 또 다시 책을 이뤘다. 책벌레들의 책사랑, <책, 세상을 탐하다>를 읽었다. 

“책은 내마음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다.” 

-프란츠 카프카



 

   오랜만에 만나는 전유성의 글(책에 관하여 중구난방 스스로 묻고 답하기)은 반가운 친구를 본 듯 반갑다. 그는 안심심하려고 책을 읽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항상 변화를 추구해서 베스트셀러 중 9번, 10번 째 책만 구입한다. 개그를 하듯 얼렁뚱땅 쉽게 받아넘기는 대꾸이었지만 그에게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걸작이다.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처음 책에서 무엇을 얻은 건 중학교 2학년 때 작은고모가 읽던 일본 소설<빙점>이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초등학교 여자애가 집에 갈 차비를 잃어버렸는데, 주위 친구들이 차비 잃어버린 걸 걱정해주니까 정작 본인은 ”내가 잃어버린 돈을 주운 사람은 얼마나 기쁠까?“라고 말하던 대목!

  그래 세상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구나! 세상 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다. 소설 제목이 ‘빙점’인지 아닌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아기가 한 말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본문 30 쪽

  책을 읽을수록 귀가 얇아진다. 나중엔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귀 얇은 공자님이 된다. 고집을 피우기 전에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되고, 내 입장이 중요한 만큼 네 입장도 중요한 줄도 알게 된다. 주관을 객관화시키기, 전유성이 책으로부터 얻는 소중한 소득이다. 한편 재담꾼 ‘성석제’는 소싯적 책도둑이었음을 책에다 고백했다. 그에 대한 변辯은 의뭉스럽기까지하다.

  “재능 있는 책 도둑은 아무 책이나 훔치는게 아니라 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훔친다. 다른 것이 아닌 책을 훔침으로써 문명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며 지식과 감성의 이종교배로 유전자를 개량할 수 있다. 훔친 책은 가슴을 뛰게 하는 긴장이 부작용처럼 곁들여지고 잘 읽히고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나보다 수준 높은 책 도둑의 서고에서 동굴 속의 알라바바처럼 넋이 나가 서 있던 적도 두어 번 있다. 그 정선된 보물을 다시 훔침으로써 우리 책 도둑들은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본문 46 쪽

  무슨 책을 얼마나 훔쳤는지 궁금하다. 그 책들이 덕분에 의뭉스러운 지금의 성석제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셈이다. 하지만 추억꺼리일망정 할 짓은 못된다. 가뜩이나 위축된 출판시장에 낭만을 빙자한 책도둑마저 횡횡한다면 책 짓고 파는 이들 시름은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요즘 책 훔치다 붙잡히면 대체 벌(형량)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이들의 책예찬에 겸손은 보이지 않는다. 허생전의 허생처럼 딱 10 년 동안 책만 읽고 살라한다면 ‘옳다구나’할 사람들이다. 듣도 보도 못한 ‘책벌레’로 불려도 ‘허허’ 웃고 말 사람들이다. 시인 조병준은 아예 ‘책벌레라서 행복해요!’ 하며 어느 여배우를 흉내낼 지경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책벌레로 인생을 살게 된 건 저주다. 끝없는 배고프모다 지독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끝없는 저주는 동시에 축복이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양식으로, 비록 곧 사라질망정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처럼 놀라운 축복이 또 어디 있는가. 끝없는 포만감과 끝없는 배고픔이 꽉 부둥켜안고 추는 왈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문 149쪽

  이 책은 내게는 위로다. 촌각을 다투며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이 세상에 묵묵히 한 곳에 자리를 지키고 종이에 새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책 읽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위로한다. 많은 문인과 출판인, 평론가, 음악가, 심지어 개그맨 전유성까지...이 책을 집어든 나를 격려한다. 몇 장마다 숨겨진 붉은 칠된 글자들은 내가 갖던 책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러게, 내말이...’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싶은 말들 고개가 함께 주억거렸다.

  가장 인상적인 글귀는 시인 이문재의 ‘척추로 읽읍시다’였다. 일주일 날을 잡아 십 수권의 책을 들고 호텔방에 쳐박히는 소설가 김훈, 매주 일요일 아침 마다 정좌를 하고 책을 읽는 황종연 교수, 일 년 중 한달을 ‘안식월’을 두는 빌 게이츠까지 아예 작정하고 자리를 틀고 책을 읽는 이들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자세 만큼은 척추를 곧추세운 정좌의 독서라는 것이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읽은 책이, 또는 그런 자세로 읽고 싶은 책이 과연 몇 권이 있는지가 책 읽기의 핵심입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입니다.” 본문 85 쪽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을 쫓다 보니 마지막 장이다. 아껴서 읽느라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읽어서 즐겁고 만나서 기쁜 책, 이 책을 두고 하고 싶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