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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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소설, 늙은 나를 만나게 하는 무서운 소설이다! 

  노인老人은 나무다.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행인行人들이 교차하는 길거리에 서 있는 나무는 행인들에게는 존재감만 있을 뿐 주목이 대상이 되지 못한다. 토악질을 하거나, 한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거나, 신발 밑창에 뭍은 개똥을 털거나, 홧김에 발길질을 할라치면 그제서야 인도와 차도 사이에 간격을 두고 서 있는 물체의 존재가 뭔지를 감지할 뿐. 늦가을 누런 열매를 맺고 구린내를 피우는 은행나무라면 모를까, 울긋불긋 단풍을 떨굴 줄 아는 단풍나무라면 모를까, 누구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않는다. 명절날 잠시 쉬었다가 가는 깊은 산속 별장같은 곳이 고향집이라면, 한여름 그늘을 잠시 피할 곳은 나무 아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늙어가는 노인은 늙어가는 나무와 닮았다.

  노인은 외로움과 함께 숨을 들이키고, 서글픔과 함께 한숨을 내뱉는다. 노인의 아침은 아픔이고 노인의 밤은 꺼져듦이다. 수명을 다한 장기臟器가 고장을 일으킬 때마다 저승에 이르는 버스는 한 정거장을 성큼 내지른다. 아파서 고생할 바에는 어서 가자, 빨리 가자 말할 법도 하지만 제가 들고 태어난 질긴 명命줄이란게 어디 제 맘대로 끊을 법 하더냐. 고목장승으로 살더라도 살 수만 있다면 끈질기게 살고픈 마음이 또 사람마음이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은 나역시 곧 그렇게 될 생애에 절박하고 간절한 노인이 지은 말일 것이다. 이렁저렁 말해야 뭐할까. 영화제목 말마따나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



 

    소설 <에브리맨EVERYMAN>(문학동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노인 ‘그’의 죽음을 이야기한 책이다. 소설 속엔 그의 이름도 없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아니고, 모두기도 하다. 소설은 늙은 작가(하지만 작가는 매년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고,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손꼽히는 필립 로스Philip Roth다)가 마치 자신의 자서전을 쓰듯 자연스럽고 평이하게, 그리고 다소 지루하게 일상을 그렸다. 소설 초반 자신의 장례식을 지키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은 새가 되어 딸과 아들의 슬픔을 지켜보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닮은 점을 빼고는 딱히 특별할 게 없다. 눈이 가는대로 그린 듯, 생각나는 대로 뱉어낸 듯하다. 마지막 생의 순간을 그린 이 소설은 우울하고 어둡다. 그래서 몇 장을 넘기지 못해 ‘짜증날 만큼 지겨운 몇 시간이 되겠다’ 싶어 미리 우려한 것도 사실이다. 기우였다. 읽는 내내 애가 끊어질 만큼 속이 상하고, 가슴이 아팠다. 소설 속의 ‘그’가 이삼십 년 후의 내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노인이 되어 살아갈 내 모습이 책 속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멋진 제목이다. ‘에브리맨EVERYMAN’.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시계수리를 겸한 보석상의 이름과 같다. 그는 에브리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대신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이 곧 ‘그’가 될 수 있음도 이야기한다. 늙음은 모두에게 찾아오는 종착지가 아니던가. 독자라고 예외일 순 없다. 그가 지켜본 자신의 장례식은 더없이 허망한 죽음과의 조우다. 나와 우리의 장례식일지 모를 모습이다. 

“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것이었다.” 본문 22~23 쪽

  차가워져 굳어버린 나를 털치고 나와 어디선가 지켜보는 나의 장례식이다. 나는 그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엇을 가지려 살았던가,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를 기를 쓰고 생을 살고 있던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엔 우리네와 같이 남겨진 사람들의 처량한 곡哭소리도 없이 무미건조하다. 하긴 까무러치는 곡소리는 떠나보낸 이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남겨진 이의 절망감 때문이라는 어느 얘기가 맞다면 그들은 그를 속시끄럽지 않게 하고 온전히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라면 곡소리를 듣고 싶겠다. 아니면 내가 곡을 할 것 같으니까.

“몇 분이 안 되어 모두 가버렸다. 지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리 종種이 가장 좋아하지 않는 활동으로부터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는 뒤에 남았다. 물론 다른 누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해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또는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진정으로 기뻐하기도 했다.” 본문 23 쪽

  그가 일생에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면 사려깊고 관대한 두 번째 부인 피비와 살면서 결국은 마지막 아내가 되어버린 훌륭한 껍데기일 뿐, 뇌가 없는 것 같은 여인 메레테와 불륜이다. 그가 메레테와 결혼하게 된 건 이혼 직후의 상황에서 자신의 범죄를 덮어버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엔 병이 무서워 병원조차 오지 않으려고 하는 메레테 덕에 혼자서 마지막까지 병실을 지키는 뜻하지 않은 천벌을 받는다. 한때는 ‘완전한 인간’이었던 그. 비행과 실수로 결국 세 번의 이혼을 겪은 그는 이제 혼자다.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는 죽어가는 병든 노인이다. 과연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이 소설은 절대 상상으로는 그려낼 수 없는 소설이다. 장소의 묘사를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아 머물면서 주변의 상황을 묘사했던 <하얀전쟁>의 안정효처럼 직간접적으로 자신이 당한 일(거의 직접적이겠지만)을 기록하고 있어서다. 차가운 철제침대에 이끌려 수술실로 들어설 때 한 숨마다 양파 한꺼풀 두께로 심장은 줄어드는 듯한 상황을 그린 것이나, 벌거벗긴 채 수술을 기다리며 수술도구에 그려진 제약회사의 이름을 찾아서 읽어보는 심정이나, 병마다 다른 고통에 대한 세세한 통증은 괄약근마저 움찔거리게 만든다. 하루하루 통증과 싸우며 그가 되뇌인 것은 바로 떠남이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끊어주고 싶었다.

“떠남. 그가 고통에 질려 숨을 헐떡이며 깨어나게 했던 바로 그 말, 주검의 포옹에서 살아 돌아오도록 구해준 말.” 본문, 171 쪽

  아이러니는 ‘그’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면 볼수록 나는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구차하지만 폐세포 몇 개씩 가로막을 담배를 끊을 마음도 생기고, 신새벽 공기마시며 달리고자하는 욕구도 생겼다. 그 무엇보다 하루를, 오늘 하루를 온전히 느끼고 살고 싶어졌다. 죽기 직전 그 역시 먼저 간 그의 부모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어머니는 여든에 죽었고, 아버지는 아흔에 죽었다.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저는 일흔하나에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하나라고요.“ ”좋구나. 네가 살아있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봐라.“ 본문 177 쪽

  태양을 마주선 내 정면의 모습이 삶이라면, 그 뒤에 내 키보다 길게 늘어선 모습은 그림자다. 삶의 영원한 동무는 죽음이다. 오늘은 슬프지만 내일이라는 희망이 있어 하루를 견디는 것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역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선남선녀의 신들이, 그리고 영화 <벰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브래드 피트가 분한 벰파이어가 나약한 인간을 부러워한 것도 바로 ‘인간의 유한한 삶’이다. 제 명을 다해 영원히 쉴 수 있음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은 내가 태어날 때 내 엄마가 겪은 고통의 유전이다. 정작 죽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내 생에 지은 죄들에 대한 고통이 아닐까. 마지막까지 ‘그’에게서 시선을 놓치 못했던 건 어제를 보내며 또 하나의 죄를 짓고 사는 나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잊게 만든 짧고 굵은 소설은 그를 미래의 나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대단한 소설, 늙은 나를 만나게 하는 무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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