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도가니 -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거세된 숫소가 되고 싶었다!

 

  소설은 필연의 예술이다. 그래서 중간을 읽으면 답을 알 것 같아서 종국엔 독자가 납득이 가능한 결말로 끝나야 소설답다고 느껴진다. 책 속에서 거짓이 용인되고, 해학과 미래가 용인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어차피 현실에는 없을 허구일 테니까. 하지만 때로 현실이 너무나 소설 같을 때가 있다. 소설이 아니고서는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무슨 일이야 없겠냐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일, 소설에서나 볼 것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화자話者가 제 아무리 현실이라고 항변을 해도 ‘에이~ 지어낸 말이야. 현실에 그럴 리가 있어?’라며 다시 반문할 것이다. 이야기라도 다 들어주고, 위로라도 해 주면 좋겠건만 그들은 애써 외면한다. 이런 답답해서 미치고 펄쩍 뛸 일들이 오늘이라는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다. 청자聽者의 입장에서 보면 화자話者의 이야기로 현실과 소설을 구분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외면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해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기억하면서 현실을 살아가기가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돌아서서 귀를 씻으련지 모른다. 그리고 ‘휴우, 끔찍해라. 내가 쟤였다면 어떨 뻔 했어?’ 생각할지도 모른다. 결국 ‘나만 아니면 돼.’라는 에고, 지독한 자기애自己愛로 덮어버릴 것이다. 왜? 잘은 모르지만 난 지금 그러니까.

  소설가 공지영은 어느 날 ‘한 줄의 기사’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 자기를 괴롭히는 일을 또 저지르고 말았다. 있어서는 안 될, 차라리 거짓말이면 좋을 현실의 안개 속으로 스스로 발을 담근 것이다. 소설<도가니>는 그런 안개 속을 헤집은 책이다.



 

   이 소설은 '안개 나루터' 로 풀이될 무진霧津이라는 지방 도시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소재로 했다. 기간제 교사로 내려간 강인호는 '자애'학원이라는 장애인 학교에서 교장과 교장의 동생인 행정실장, 기숙사 사감 교사 등이 장애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사실을 알게 되고, 학교 선배인 서유진 간사와 함께 이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하지만 불행한 이 사건이 지역사회나 공권력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지역 인권단체에서 자애학원 교장과 교직원들의 파렴치한 장애 학생 성폭행 사실을 고발하지만 무진경찰서 형사, 시교육청 장학사, 시청 담당 공무원, 판`검사, 심지어 영광제일교회 교인들, 지역 시민단체까지 담합해서 이 사건을 은폐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지역사회의 기득권자들의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가해자인 이강석 교장 등은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도가니>는 수년 동안 장애학생들을 성폭행한 학교 교직원들, 그리고 이를 교묘하고 치밀하게 은폐하는 방식, 무능하고 무책임한 행정,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암묵적 합의를 그리며 우리 사회 속에 만연한 사회적 약자의 약탈현장으로 고발했다.

  사실 이 소설을 펴기 전에 온전한 소설이 아니라 고발성 짙은 르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설의 출간 후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던 2007년의 광주의 인화학교 사건이 또 다시 인구에 회자된 것을 몰랐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좋은 것만 다 못보고 사는 세상, 억지로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읽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려는 자의식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에고, 지나친 자기애였다. 

  소설을 읽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그리듯 보았다. 그리고 온몸으로 느꼈다. 긴장한 어깨는 움츠려져 펼 줄을 몰랐고, 책장에 지문이 묻을 만큼 땀이 맺혔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에 접어들어서는 차라리 내가 영원히 거세한 수소牛이기를 바랐다. 밖을 나가면 어떻게 눈을 들어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싶었다. 

  ‘이 모든 풍경에서 다른 것은 모두 남기고 오직 사람들만 지워버린다면 여기가 천국일 것이다.’는 강인호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었다. 정의正義는 사전 속 죽은 단어가 되어버린 세상, 엄한 대상에 용서를 내리는 사람들, 인맥과 관계로 얼룩진 인간세상은 안개 속 세상이 아니다. 안개가 내린 백내장을 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공지영이 그린 무진의 안개와 풍경은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온전히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묘사하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채 피지 못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은 말이 없다. 지면 가득히 악을 쓰고, 거짓뿌렁을 외치는 이들만 가득했다. 서유진은 자유로울까. 강인호는 온전히 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현실 속의 무진 사람들은 오늘 어떤 밤을 보냈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악다구리로 돈을 벌고, 먹고, 싸며 내일을 희망했을 것이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 버리고 싶었다. 

  애써 무시했던 진실을 접한 현실은 어제보다 안개가 짙다. 알게 모르게 나 역시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얼마나 더 살아야 나도 백내장의 그들이 될까 두렵기만 했다. 서유진은 ’나도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걸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 내가 불쌍하고 불행했다고 말했다. 난 어제도 오늘도 불쌍하고 불행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녀의 용기를 얻고 싶다. 세상사에 묻혀 버린 소설 같은 진실은 공지영이 지은 글로 현실이 되어 세상으로 돌아왔다. 오래도록 기억될 소설, 하지만 너무 두려워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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