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을 앞두고 후회되는 한 가지가 뭔 줄 아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다 전해주지 못한 거라네!" 

  봄이 채움이라면 가을은 덜어냄이다. 비우고 또 비워 더 이상 비울 것이 없게 되는 날, 소리 없이 첫눈이 내린다. 마음이 비워지니 추워지는 것 같다. 비워지는 마음만큼 겉옷의 두께가 두꺼워진다. 겨울은 죽음이다. 모든 것이 생장을 멈추고 마지막을 고한다. 혹은 죽은 듯 웅크리고 이듬해를 기약한다. 그래서 눈 내린 신새벽처럼 고요하다. 죽음의 겨울보다 가을이 더 추운 것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덜고, 비우고, 시들어감을 체감하며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낮길이가 짧아지는 만큼 추위를 체감한다. 다가올 시듦과 죽음을 예감한다. 가을이 우울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밤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뜬금없이 책장으로 섰다. 몇 해 전 읽은 책 한 권이 ‘잘 있는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유가 왜인지는 알 수 없다. 성큼 다가온 가을이 내게 수작을 건 탓 일게다. 반갑게도 아래쪽 한 켠에 잘 있었다. ‘있구나’ 안심하며 책을 꺼냈다. 이 책을 읽던 몇 해 전 가을 꽤 많은 눈물을 훔치던 기억, 눈물을 닦으며 흣하고 웃었던 기억이 났다. 책을 읽던 그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엔 없다. 괴로움인지,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지만 드넓은 광야에 혼자 있던 느낌은 아직 남아 있다. 아마도 그 해 가을도 올 가을 처럼 비움을 체감했던가 보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비움의 덧없음을 탄식하던 그 때, 이 책은 ‘그 비움은 버림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장을 펼쳤다. 제목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 with Morrie>이다. 가을 빗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에 젖어들었다. 



 

    꽤 유명한 스포츠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던 사내 미치 앨봄은 어느 날 한 TV 프로그램에서 낯익은 모습의 노인의 인터뷰를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코치(그는 교수를 그렇게 불렀다)인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s 였다. 모리 코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 루게릭병으로 잘 알려진 병에 걸려있었다. TV를 통해 본 코치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본 지 16년 만이었다. 대학시절 많은 남다른 가르침과 사랑을 전해줬던 코치와 16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것이다. 미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리 교수님, 저 미치 앨봄입니다. 1970년대에 선생님 제자였습니다. 아마 기억 못하시겠지만요...”

그런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왜 코치라고 부르지 않아, 인석아?” 

  한 통의  전화로 미치Mitch Albom교수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 후 매 주 화요일마다 투병중인 모리교수를 찾게 되었다. 모두 열네 번에 걸친 ‘화요일의 만남’은 모리 교수의 ‘마지막 강의’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교수는 화요일마다 늙은 제자에게 사랑, 일, 공동체사회, 가족이 나이든다는 것, 용서나 후회의 감정, 결혼과 같은 인생에 대한 사려 깊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편 미치는 녹음기에 그의 강의를 담으며 모리교수의 괴로운 투병을 함께 했다. 

 난 세 걸음쯤 물러나 그들이 함께한 이야기를 지켜봤다. 스산한 가을비 창가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이 책을 펴면서 세 명이 되었다. 세 명의 온기는 따뜻했다. 잦은 기침과 불편한 듯 답답한 목소리을 듣는 대목에 절로 내가 헛기침을 하는 것을 빼고는 평온한 순간이었다.

  루게릭 병이란게 참으로 고약한 병이다. 아래에서 위로 차츰 굳어져서 석화石化가 되는 병이다. 얄궃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신체임에도 고통은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 고통을 잠시 생각해 본다.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신체를 묶은 채로 드럼통에 넣어 잘 개어진 콘크리트를 붇는 어느 깡패영화처럼 온 몸이 돌덩이가 되어간다면, 게다가 덜어낼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된다면 어떨까. 어느 날 하반신이 마비되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고, 점차 위로 올라와 손가락까지 움직이지 못하더니 목도 움직이지 못한다면...턱을 움직이지 못해 저작詛嚼을 못하고, 혀도 움직일 수 없다고 그랬던가. 마지막엔 눈과 머리만 깨어난 산송장이 된다고 했던가. 얼마 전 본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젊은 배우의 연기를 생각하니 나이 76세의 모리 교수의 병상은 차마 상상하기 힘들다.

  온 몸이 돌덩이가 될 것을 알고, 결국 죽을 것을 아는 그가 제자 미치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사람다운 인생의 의미’이다. 대공황기에 잠깐 경험한 공장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으로 가르침의 길을 택한 그이기도 하지만, “땅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걸로 끝이야.”라는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죽음 앞에서 무슨 사념邪念이 있겠는가. 경청해야 할 이유는 곧 흙으로 되돌아갈 가장 순수한 순간의 인간의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리 코치는 우리 인생의 덧없는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미 없는 생활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반은 자고 있는 것 같다구. 그것은 그들이 엉뚱한 것을 쫓고 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77 쪽

또한 사람이라면 ‘오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봄직 하지만 그렇지 못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미치, 우리의 문화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놔두지 않네. 우리는 이기적인 것들에 휩싸여 살고 있어. 경력이라든가 가족, 주택 융자금을 넣을 돈은 충분한다, 새 차를 살 수 있는가, 고장난 난방 장치를 수리할 돈은 있는가 등등. 우린 그냥 생활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만 가지 사소한 일들에 휩싸여 살아. 그래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삶을 관조하며, ‘이게 다인가?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뭔가 빠진 건 없나?’ 하고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지.”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네. 혼자선 그런 생각을 하며 살기는 힘든 법이거든.” 103 쪽

  바로 우리 모두 평생의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마치 곧 이 세상에 없을 그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다 앞선 삶을 산 이들의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노인老人. 그들은 우리 생의 스승이요, ‘살아있는 도서관’인 셈이다. 그는 죽는 법을 배우면 사는 법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이의 죽음을 확인하면서도 자신이 당장 죽을 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모두 잠든 채 걸어다니는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살다는 것은 반쯤 졸면서 사는 것이다. 모리 코치는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운다고 했다. 자기가 언제쯤인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인다면서.

 그에게 가족관은 곧 ‘사랑’이다. 병들어 죽음을 체험하는 그에겐 그 무엇보다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한 어떤 주제보다도 ‘가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 사실, 가족이 없다면 사람들이 딛고 설 바탕이, 안전한 버팀대가 없겠지. 병이 난 이후 그 점이 더 분명해졌네. 가족의 뒷받침과 사랑과 애정과 염려가 없으면, 많은 걸 가졌다고 할 수 없겠지. 사랑이 가장 중요하네. 위대한 시인 오든이 말했듯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네. (중략)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네.

  누군가 ‘애인은 내가 보낸 하루를 증언해주는 사람을 갖는 것이고, 배우자는 내가 마지막 죽는 순간의 증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나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본다 함은 따뜻함이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음이다. 가족은 배우자가 목격하지 못한 그 전 시간까지도 증인이 되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내가 없고 난 다음에도 그 시간을 증언해 줄 사람인 것이다. 그들이 날 부르면 난 살아나는 셈이고, 그들이 있는 한 난 죽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자식을 갖는 것 역시 ’다음 생에서도 갖고 싶은 다시 없을 소중한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나이 먹는 것’, 즉 늙어감에 대한 생각 또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그는 ‘젊음은 차라리 싫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젊음을 강조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잘 들어보게. 젊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지 난 잘 알아. 그러니 젊다는 게 대단히 멋지다고는 말하지 말게. 젊은이들은 갈등과 고민과 부족한 느낌에 늘 시달리고, 인생이 비참하다며 나를 찾아오곤 한다네.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고 싶다면서...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런 비참함을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둔하기까지 하지. 인생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데 누가 매일 살아가고 싶겠나? 이 향수를 사면 아름다워진다거나 이 청바지를 사면 섹시해진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조작해대는데 바보같이 그걸 믿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어디 있어.”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으셨어요?”

“미치, 난 나이 드는 것을 껴안는다네.” (중략)

“선생님이 어떻게 더 젊고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요.”

그는 눈을 감았다.

  “아니, 부러워한다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거나 수영을 하러 갈 수 있는 게 부럽지. 혹은 춤을 추러 가거나 하는 것이. 그래, 춤추러 갈 수 있는 것이 가장 부러워. 하지만 부러운 마음이 솟아오르면, 난 그것을 그대로 느낀 다음 놔버린다네. 내가 벗어나기에 대해 말했던 걸 기억하지? 놔버리는 거야.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그건 부러운 마음이야. 이젠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런 다음 거기서 걸어 나오는 거지.”

(중략)

  “살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 발견해야 하네.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한데 나이는 경쟁할 만한 문제가 아니거든.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 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잇다는 것을 생각해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이런데 자네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떻게 부러울 수 있겠나.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인데?” 166-171 쪽 요약

  그렇다. 젊은이를 부러워함은 부질없다. 젊은 시절을 거쳐온 지금이 있기 때문이다. 초로의 중년이 탱탱하고 싱그러운 외모를 쫓는다면 세월을 잊고 싶은 것일 뿐, 추할 뿐이다. 부러워해야 할 건 내가 헛되이 보낸 젊은 시절의 시간이다. 하지만 모리 코치의 말대로 그 젊음은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이 아니던가. 후회가 되거든 지금 하면 되는 일이다. 젊은 시절 공부를 못해 그들이 부럽다면 이제라도 공부를 하면 될 것이다. 여행이 꿈이었다면 그 시절의 마음으로 지금 여행을 떠나고, 뜨거운 사랑이 부럽다면 지금의 동반자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된다. 심지어 나이트클럽을 이제 한 번 가본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의 이런 변화를 두고 주위가 추하다 말하면 그들이 아직 모른 것이고, 젊은이들이 추태라 흉보면 ‘너희들이 아직 나이듦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보낸 시절을 마냥 부러워하는 것이야 말로 추한 것이고 추태가 아닐까. 사그러짐을 체감하는 이 가을을 무색하게 하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 아포리즘은 간디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하루’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모리 교수와 함께 하면서 이 말을 하루를 ‘삶과 죽음의 가까운 거리’로 생각하고 싶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마음껏 사랑하는 법, 그리고 용서하는 법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기꺼이 나누는 모리를 보면서 인간에게 사람으로 사는 가장 숭고한 마음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은 다름 아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해 췌장암에 걸린 중년의 교수가 가족과 학생들을 앉혀두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감동적인 책 <마지막 강의>를 생각나게 한다. ‘다가오는 매일의 ’오늘‘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보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시들어가는 모리 코치의 목소리와 오버랩되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 던진 ‘타인에게 나누는 삶’이라는 화두는 이것이다.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았나?'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있나?'

'마음은 평화로운가?'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이유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가을에 모리 코치는 큰 위안이 되었고, 가르침이 되었다. 내년 가을에도 그런 기분이 든다면 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펼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있어 ‘가을에 만나야 할 스승의 강연집’이다. 내가 느끼는 가을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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