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함께 하는 첫경험같은 여행

 

저는 한 권의 책이며 그것도 살아 있는 책입니다.

제 이름은 <여행의 책>입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가장 가뿐하고 은근하고 간편한 여행으로

당신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뭐랄까요....

어떤 강렬한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책이 노골적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꽤 오랜 동안 책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내 눈에 시선을 맞추고 내게 말을 거는 책은 처음 봤다.

난 활자를 보고, <여행의 책>은 수많은 활자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제 스스로 살아있다고 말하는 책이 내게 말을 건다니...

묘하고 난감한 기분이다.

 

  진짜일까 싶어 책을 쥔 두 손에 힘을 줘 본다.  

내가 의심하고 의식하고 있는 순간 책은 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책>이라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 책은 이름을 얻고, 꽃이 된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행의 책>은 이제 숨을 쉬고 있다.

 

 



 

 

독자여,

그대는 나를 보고 있고

나 역시 그대를 보고 있다.

그대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고 그대의 얼굴은 반드럽다.

내 얼굴은 작은 굴자들이 촘촘히 찍힌 이 책장들이다.

얼굴이 백짓장 같다는 비유가 생길 만큼

내 얼굴은 해쓱하다



 

  더더욱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이젠 <여행의 책>이 나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의 책>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는 셈이다.

 

책을 쥔 두 손은 <여행의 책>의 어느 부분을 잡고 있는 것일까?

귀 일까? 몸통일까? 그것참... 내가 책을 느끼고 있다니 사알짝 미친 기분이다.

 

 

  이 책은 참 묘한 책이다. 지금껏 책 속의 활자를 새겨넣은 저자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겼던 나에게 혼란함을 주었다. 무생명, 즉 죽은 나무의 또 다른 시체에 불과한 종이 덩어리가 첫장을 넘기는 순간, “독자여!”하고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의도된 최면에 걸린 셈이다. 맛을 안 아기가 사탕을 처음 입에 물은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눈을 똥그레지고 입도 같은 모양이 된다. ‘헉, 이게 뭐지?’ 그 무엇이든 처음은 황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저 뜨악하고 놀랄 뿐이다. 마치 첫경험처럼. 이 책이 내게 그 기분을 던지고 있다. 당돌하고 어의가 없다. 하지만 페이지를 멈출 수가 없다.

 

  이 책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없다. 단지 그는 <여행의 책>을 만든 창조주일 뿐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녀석을 만들고, 독자와 대화하는 것을 감지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까. 내가 책과 이야기한다고? 말도 안돼! 작가는 날 농락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고 있는다면 난 농락을 즐기는 것이다. 바보같다. 그래서 고쳐 생각하기로 했다. 인지된 최면. 그래, 난 의도되고 인지된 최면에 걸리고 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계속 읽기를 청했다.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겐 계약이 하나 필요하다.

나의 의무는 그대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것이고,

그대가 할 일은 나날의 근심 걱정을 잠시 잊어버리고

되어 가는 대로 완전히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당장 갈라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이 계약에 도장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합의의 신호로 한 가지 동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잘것없는 작은 손짓이지만,

그것을 나는 약속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 그럼 갈까? 라는 문장을 읽거든, 책장을 넘기라.

 

  <여행의 책>은 내게 함께 여행할 것을 제시한다. 독자라는 삼인칭대신 이젠 ‘그대여’라고 말한다. 이제 <여행의 책>과 그대, 즉 나 이렇게 단 둘 뿐이다. 그리고 <여행의 책>의 써진 대로 아니 말하는 대로 둘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부웅 뜨더니 벽과 천정을 뚫고 하늘을 오른다(실제로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으윽~). 대기권과 성층권 위를 오르더니 공기의 세계와 흙의 세계, 불의 세계와 물의 세계를 함께 체험한다. 정말로 난 이 책과 여행을 했다. 믿기지 않는다고? 자신은 속이지 말자. 당신은 벌써 이 책을 읽고 싶다고 느꼈지 않은가? 당신도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은 걸게다.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주의할 것이 있다. 대중교통 안에서, 그리고 전화가 울려대는 사무실에서 읽는 것은 곤란하다. 조용히 자신의 방에서 깊은 밤 잠들기 전 한 두 시간 전에 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면 <여행의 책>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난감한 기분에 두어 번 책을 덮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하련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펴서 읽는 것도 당연하다. 당신은 최면에 걸렸으니까.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나를 그렇게 했듯이 <여행의 책>이 당신을 제 자리로 귀환시켜줄테니까. <여행의 책>은 당신에게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나는 작은 글자들로 덮인 네모난 종이장이다.

이제 이런 식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은

그만하는 게 좋겠다.

그대의 눈길이 나를 쑥스럽게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그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한 권의 책인 내가 그대로 하여금

경이로운 일을 하게 했다고

그러나 진정 경이로운 것은

그것을 수행한 그대,

오직 그대 뿐이다.

 

안녕

 

  혹자들이 책에 빠졌다고, 책과 함께 시공간을 거슬러 여행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시니컬하게 비웃어 넘겼다. 천 수백 권을 읽어도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렇게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웠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내겐 이번이 책과 여행하는 첫경험이니까. 분명한 건 난 책과 여행을 확실히 했다는 것이다. 책이 보여주는 세상을 보았고, 피터팬처럼 책을 쥐고 하늘 위로 올랐으며,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아픔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나도 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책을 쓰고, 내가 이 책을 쥐는 순간 연결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눈을 통해 내 뇌에 주문을 걸었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스스로 변화된 것을 느꼈다. 누워있고, 엎어진 책. 그리고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병렬로 서 있는 책들의 무리들도 내게 말을 걸었고, 대화했었다는 것을. 이젠 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난감해졌다. 아니 당장, 살지도 죽지도 않은 <여행의 책>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조차 모르겠다. 기가 막힌다. 지금의 내가 기막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주문이 기막히다. 난 지금도 그의 주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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