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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실버보이 김 열규 선생의 푸르른 노년예찬!
“할머닌 언제 죽어?“ 초등학교 2 학년이었던 내가 무슨 생각 끝에서인지 이런 망발을 했더랬다. 그날 내내 할머니는 당신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사연을 들은 갓 서른 넘은 아버지한테 야무지게 맞았다. 지금까지 그 질문을 기억한 것 아버지의 매 탓이리라. 맞벌이 부모 밑에 태어난 나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의 젖무덤에 코를 박아야 잠이 들었고, 할머니가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줘야 밥을 입에 넣었다. 어디라도 움직이면 꼬리가 되어 항상 졸졸 쫓아다니는 통에 할머니 고쟁이 왼쪽 쪽 끝은 늘 튿어져 있었고, 툭하면 비녀를 뽑아 장난을 쳐서 할머니 머리는 항상 엉망이었다.
혼자서 정육점에 가서 ‘돼지비계 백 원 어치요’하며 김치찌개에 넣을 고기를 주문할 정도가 되었을 때, 난 할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한동안은 토요일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할머니 품이 있는 집으로 뛰어가더니, 이 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나중엔 방학 때 일주일 정도 할머니를 찾았다. 나이를 먹어가며 조그마한 ‘내 세계’가 생긴 때문이었다. 내가 점점 클수록 그만큼 할머니와는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갔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할머니가 계신 큰 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가서 이젠 안계신다는 말씀을 전화로 들었다. 이젠 정말 없을 할머니를 뵈러 내려가던 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아주 많이. 손에는 최인호의 ‘천국의 계단’이 쥐어져 있었고, 귀에는 유재하와 박학기의 노래가 카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귓등 너머 흰머리가 하나 삐죽 나왔다.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하날 뽑아냈더니 그 다음 주에는 둘이 보였고, 점차 개체수를 늘려나갔다. 외탁을 한 터라 새치가 많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던 터라, 군인이셨던 작은 외할아버지 별명이 ‘백대가리 장군’이었단 소리도 들었지만 어느 새 더 이상 뽑다가는 ‘골이 훤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염색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부터 난 ‘늙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듦, 늙음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뭘 하고 살았나 싶고, 뭘 이뤘나 싶다. 잘 살았나 싶고, 행복했었나 싶다. 추억이란 필름은 세피아 색이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컬러는 보이질 않는다. 고개를 바로 하니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 ‘괜한 생각했다’ 싶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본다. 그러던 차에 오늘 읽은 김 열규 선생의 [노년의 즐거움] 덕에 나이듦도, 늙음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아니 오히려 기대된다 싶어졌다.
지난 해 였던가? 김 열규 선생의 책[독서]는 내게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남다른 책 사랑, 독서 사랑에 놀랐고, 우러러 볼 대상이 한 명 늚에 반가웠다. 이 책을 듦에 내 나이에 무슨 ‘노년타령’이냐 싶어 읽기를 관둘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읽은 이유는 온전히 김 열규 선생의 생각을 엿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역시 기대 이상 이었다. 글을 읽어보라. 이 글이 어찌 78세 노인의 글이더냐. 보이는 색은 푸른 색 이요, 맛은 떫은 풋내가 난다. 노숙, 노련, 노장의 삼로三老는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이고, 初老의 50, 耳順의 60에게 기운을 북돋는다. 푸른 노년 공화국! 인생은 백세! 라 하시더라. 읽고 나서 느낀 바는 ‘배워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배움으로 채웠던 터라 노년에 보이는 세상은 멋들어져 있었다. 탑골공원, 종묘공원에서 삼삼오오 앉은 젊거나 또래인 그들과는 천지 딴판이다. 배움이 있으니 느낌이 있고, 깨달음이 있으니 노년이 즐겁다. 도나텔로의 흉측한 막달라 마리아에서 노성老聖과 성로聖老를 발견하고, 아이들도 내뱉는 웰빙well-being이란 트렌드는 ‘인품을 가꾸고 교양을 닦고 정신적으로도 완숙하기를 기도하면서 건전하게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라며 이 말은 노년의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읽자니 자꾸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Walden’이 생각났다. 나는 소로우의 문명의 주류를 떠나 홀로 먹고, 자고, 입을 것을 해결해 가며 살았던 은둔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되니 자신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가 보다 싶은 생각이다. 하늘의 푸름과 신록의 녹음을 감사할 줄 알더라. 빗소리의 운율도 느끼고, 자연의 숨 쉼을 만끽하더란 거다. 알고 보니 미국 유학시절, 월든 호숫가를 거닐며, 소로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더라. 내가 이 삶을 쫓는다면 소로우를 쫓는 게냐, 김 열규 선생을 쫓는 게냐 궁금해진다.
본격적인 노령화 사회로 접어든 이 땅에 이들을 이야기하는 책은 진즉 나왔어야 했다. 바다 넘어 일본엔 ‘황혼유성군’이라는 실버세대를 위한 만화가 절찬리에 읽혀지며 34편 째 시리즈로 나오고 있지 않더냐. 늙음은 추함이 아니다. 함구할 것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니다. 사회가 두려워해야 할 ‘어두움’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고려장’을 하고 있는 셈이고, 청장년은 제가 들려져야 할 지게를 준비해야 한다. 남 탓할 바도 아니다. 노인 스스로 활개를 쳐야할 것이다. 김 열규 선생처럼 ‘늙으니 좋기만 하구만’ 허허 해야 할테다. 하지만, 평생 일하고, 밥 굶지 않음을 미덕으로 살은 터라 ‘즐길 줄 아는 이’ 또한 몇 있을까 싶다. 이 책을 읽어 배우고 격려 삼아 제대로 즐기시라 권하고 싶다.
이 책에 크게 건진 것 하나 있다면 선생의 ‘퇴직관退職觀’이다. 그는 퇴직이 아니라 전직轉職이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퇴직후에야말로 오롯이 ‘나만의 나만을 위한 나의 일’을 하게 되었다 말했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누리게 된 것을 크나큰 천행이요 천운이라 여기기까지 했다. 아래는 선생의 말씀을 다소 길지만 그대로 적어야겠다. 하나도 뺄 말이 없고, 고칠 말도 없어서다. 머릿속, 가슴속에 새기고 박아야 할 금언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렇게 풍요롭고 넉넉하다는 것을 퇴직 후에야 겨우 깨달았다. 그년 노년이 베풀어준 엄청난 특전이었다. 비로소 내가 된 것 같다. ‘자수성가自手成家’란 말이 비로소 실감났다. 내 손으로 내 영역을 일구어낸 것이라 생각하니 노년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업을 성취해내는 것이라는 실감이 났다.
일흔이 넘고서야 찾은 나만의 나라니! 그 전의 시간과 세월은 오직 이를 위한 준비이고 예비의 시기에 불과했던 것만 같다. 이전의 내 생애는 과도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만의 나만을 위한 나의 일! 이건 노녀의 내가 비로소 향유하게 된 새 삶의 징표였다. 보통일이라고 하면 작업이나 노동 같은 걸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물론 작업이니 노동도 내게 일은 일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책 읽기, 걷기, 군것질하기, 차 끓이기, 차 마시기, 멍하니 바다 보기, 눈 감고 명상하기, 고개 숙이고 상상하기 등등이 모두 나의 일이다. 뿐만 아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원두를 갈아서 내 손으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맛을 보는 것도 일이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에 진력나면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도 요긴한 일이다. 덕분에 노년에 접어든 나의 일상은 ‘만다라’고 만물전이다.“ (213 쪽)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살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서 보이는 것이다. 느끼니 일상이 만다라고 만물전임을 배운다. 느끼니 세상이 다시 보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느끼자. 많이 느끼자. 그러자니 더 많이 지금의 삶 속에서 배우고, 익히자. 한 권의 책을 통해 시간을 얻었다. 아니, 노년이라는 삶도 훌륭함을 새로 배웠다. 늙음이 두렵지 않으니, 오늘이 덤 같고 내일이 보너스 같다. 선생께 오래 사시라, 삶을 만끽하시라 전하고 싶다. 그리고 느끼시거든 또 글로 남겨 흘려 달라 부탁하고 싶다. 주워서 붙여 읽어도 글맛은 여전할 테니까. 세대를 넘어 읽어보시라. 그럼 당신은 시간을 공짜로 얻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