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우리시대의 논리 12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계란되어 바위를 친 <석궁사건> 김 교수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말한다. 또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한다. 응당 그래야 할 것인데, 실제는 나처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사실 여부를 알기는 쉽지 않다. 법으로써 사람 사는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과 일반인 사이에는 소통이 불가능한(최소한 그렇다고 생각하는) 너무나 큰 벽(편견일 수 있지만)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벽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외치면면서도 막상 앞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행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겁이 나서다. 법원의 존재이유는 당연하고 꼭 필요하지만 직접 만날(원고이든 피고이든)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속내다. 어쩔 수 없는 겁 많은 쥐새끼인 셈이다“

 

  얼마 전 읽은 책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난 이렇게 리뷰를 시작한 적이 있다. 2호선 지하철을 타도 교대와 서초에서 내리기가 꺼려진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마자 넓은 터에 작위적이고 고압적인 사각 꼴의 법원보기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곳 주위에 머물러 있는 억울한 사람들, 그들을 변호(?)하며 먹고 사는 사무실 등 당장 나 와는 상관없는데도 은근히 속시끄러운 풍경과 공기가 싫어서다. 그렇다, 난 솔직히 싫고 무섭다. 그 모습들을 쳐다보는 것도 싫어 웬만하면 시선을 멀리 두고 지나칠 정도다.

 

  그곳을 지나다 보면 항상 만나는 ‘겂 없는 사람들(내가 판단하기에)’을 만난다. 살벌한 법원에 대고 문구를 담아 억울함과 절박함이 뭍어난 피켓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1인 시위대. 난 그들을 보면서 ‘저러다 미운 털이 박혀 오히려 불리하지 않을까? 혹시 잡혀가는 건 아닐까?’ 우려를 하면서 한편 그들의 강단에 놀랐다. 굳이 알 필요도 없거니와 알고자 한들 이야기해 줄까 싶어 사연이 궁금해도 지나치곤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책 <부러진 화살>은 법원 앞 1인 시위자 중 대표적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뉴스를 잘 지켜봤던 사람은 들어봤음직한 '석궁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 교수의 사건에 대한 책이다. 성균관대학의 대입 시험 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 교수는 교수지위 확인소송을 하게 되는데, 많은 불합리 속에 패소를 했다. 항소심마저 패소하게 된 김 교수는 석궁을 들고 판사의 아파트를 찾아가 퇴근해 돌아오는 판사를 만나 항의하다가 ‘석궁을 발사’하게 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처음 뉴스를 들었을 때 ‘간肝이 배밖으로 나온 사람’이 저지른 ‘해외토픽에나 나올 법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치부했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죄이고, 있어서도 안될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디다 감히..’가 아니던가(말했잖은가? 난 겁쟁이다) ? 그렇게 생각해서 넘겼던 사건이라 책을 폈을 때는 우선 어떻게 판결되었나, 그리고 김 교수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무모한 짓(?)을 했던가 궁금해서였다. 전모를 알고는 ‘차라리 알지 말걸 알았다’는게 솔직한 느낌이다. 혹시나 하는 바람이 역시나 하는 체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게 원래 불완전하기에 시시비비是是非非에 대한 결정을 해줘야 할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만든 게 법원이요,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법관이다. 아이러니는 중의衆意가 모여 만든 법률에 의존하지만 그곳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는 것, 그 아이러니가 결국은 이같은 불행한 사건을 만들고 말았다. 인간을 심판하는 인간 역시 불완전하거늘 ‘완전한 듯 착각’하고 있음이 이 사건을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심판이라는 일에 대해 나름의 프라이드와 보람은 있을 지언정 스스로 권위자가 되어 ‘그들만의 리그’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아래’로 본 결과가 빚어낸 사건이다.

 

  판사를 일러 영어로는 Judge 혹은 Your Honor라 부른다. 후자의 Your Honor는 서양의 평등정신으로 비롯된 말로 ‘사람으로서 당신과 난 큰 차이는 없지만, 난 당신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법관의 권위는 모든 사람의 약속인 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만든 법이 세운 권위에 의해 법관이 앉아 있으니 그를 존중하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늘이 내려준 듯 군림하고자하는 ‘불완전한 인간적 본성’ 이 나오면 억울한 국민은 더 억울해진다. 법관의 권위와 존중은 스스로 받고자 받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는 것이다.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가며 그들은 왜 법관이 되려 했을까 궁금해진다. 약자를 보호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한 몸 던지기로 했지 않았냐 묻는다면 초등학생 같은 순진한 생각이라 비웃음을 살까?

 

  불의에 타협하지 못하고 일터에 쫓겨나면서까지 대항하다가 결국 법원에 호소하게 된 김 교수의 정의감과 용기는 부러울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상해의 의도가 있건 없건 간에 ‘석궁’을 들고 갔다는 것이다. 그 죄는 두 말할 것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기에 단죄해야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죄를 놓고 벌인 경악할만한 법관들의 태도였다. 과연 김 교수가 그만큼의 형량을 받았어야 했을까? 원고가 동료교수였다면, 일반 시민이었다면 그랬을까? 조직의 내부인이 연류된 사건인 만큼 오히려 더 ‘법적‘으로 중대하게 여기고 심사숙고해서 해결해야 되지 않았을까?

 

  ’석궁 사건‘은 사건에 연류된 판검사들 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권의 씻을 수 없는 오명이다. 앞으로의 결과를 떠나 법원과 법관에 대해 무너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정한 법 집행자로 남을 것인지, 또 다른 치외법권적 권력자로 남을 것인지 선택의 공은 넘어갔다. 앞으로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구를 믿고 찾아가야 할지 갑갑해졌다. 그런 일을 당하면 김 교수처럼 피켓을 들고 법원 앞에 설 수 있을까? 판검사에게 ’법대로 하라‘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칠 수 있을까? 법원을 지날 때처럼 꺼림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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