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책
박민영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좀처럼 만나기 힘든 토종 책벌레의 보기 드문 책읽는 방법론

 

  처음 책읽기를 시작해서 일 년 즈음 지나 누구나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적잖은 나이를 먹고 하루가 짧다고, 세상이 좁다고 휘돌아다녀도 모자를 때인데 홀로 떨어져 앉아 ‘책이나 붙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때 ‘내, 이 뭐하는 짓인가..?’ 싶어 마지 못해 책을 덮던 때가 있었다. 누가 알아달라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온전히 그것을 소화하고는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과연 읽고 난 다음 어딘가에 써 먹을 소용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간이 아깝더라’는 판단에서 였다. 그리고 잠시 책을 부러 멀리 했었다. 냉담기. 종교와 잠깐 이별하듯 난 책과 냉담기를 가졌었다.

 

  그리고는 남들과 같이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한창의 나이인지라 매일 밤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며 인연꾸리기를 즐겼다. 그 정도가 심해 낮보다는 밤이 편하다는 기분을 느낄 정도였다. 친구녀석이 “넌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어깨죽지에서 날개가 펴지는 것처럼 활기있어 보인다”고 말할 정도 였으니...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아버지와 충돌을 일으켜 급기야 집을 쫓겨나 의도하지 않은 독립을 맞았다. 옷가지 몇 개 달랑 들고 집을 나와 살고 있었는데, 졸업한 대학의 학과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네 아버지가 네 짐을 학교로 보냈더라.” 화가 나시면 배고픈 가을 호랭이 같아 어머니와 함께 추호秋虎라 부르긴 했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하셨다. 부끄러운 낯으로 짐을 찾으러 작은 트럭을 몰고 가니 내 방에 있던 책과 책장을 모조리 부치셨다. “그 놈한테 짐은 그것 뿐이다”는 한 말씀과 함께...당신이 보기에 내게 필요한 것 책 밖에 없었나보다. 짐을 챙겨 돌아와 책을 챙기고 생각해 보니 “그 놈한테 짐은 그것 뿐이다”란 말씀은 한편 “다른 건 몰라도 책은 있어야 안되겠냐?”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런가? 그런가보다 싶어 다시 책을 들었다. 그리고 읽었다, 아주 열심히. 아버지가 돌아신 지 7년이 지난 지금까지. 태어나서 지금껏 수많은 결정을 내렸지만, 책을 새로 잡기로 내린 결정은 아마 세 번째로 잘 내린 결정 같다.

 

 



 

 

  내가 온라인에서 리뷰를 쓰면서 얻은 기쁨 중 하나는 많은 다독가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라인에 서평(감히 책을 평할 주제가 되지 않는다 싶어 난 리뷰라는 말을 즐겨 쓴다)지난 해 가수 호란이 책을 읽은 리뷰를 모아 책을 내는 소감에 “세상에 존재하는 강호의 고수들에게 부끄러워 뒤통수가 뜨겁다”고 말한 것처럼 강호의 고수들이 얼마나 많고, 그들의 내공이 대단한 줄을 알게 되었다. 이른바 온라인 서평쟁이들의 리뷰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도대체 얼마나 읽었더나? 도대체 어떤 책을 읽은게냐? 묻고 싶고 그들의 서재를 훔쳐보고 싶을 정도다. 한편 그들의 리뷰를 읽으면 힘이 솟는다. 책읽기라는 것이 몸은 가만있어도 눈과 머리는 바쁜 정중동靜中動의 일이거늘, 그래서 그저 멍청하게 눈으로 쫓기만 하는 ‘신선놀음’이 아니거늘, 외로이 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더라 싶고,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을 만나니, 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싶어 치기어린 힘이 불끈 솟는다. 오랜 만에 이런 분기탱천憤氣撐天의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다독가 박민영의 <책읽는 책>을 읽고 나서다. 저자는 <행복한 중용>, <즐거움의 가치사전>, <논어는 진보다>,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 <이즘>을 쓴 바 있고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월간 '인물과 사상'에 문화 비평을 쓰고 있다. 책을 읽고 느낀 소감이라면 그는 고수가 아니었다. 고고수高高手였다. 

 


“책은 독자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와 여백을 제공한다. 책을 읽다가 의문 나는 것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나오면, 독자는 잠시 책을 덮어 둔 채 생각에 빠질 수 있다. 책은 인간의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매체보다 우월하다.” (23 쪽)

 

  이 책은 크게 책 읽는 즐거움과 책 읽는 생활, 그리고 책 고르는 지혜와 책 읽는 지혜로 나누어 책읽기에 대한 총 51개의 단편의 글로 묶여졌다. 책읽기를 20여 년 동안 저자는 한 달에 10권 이상의 책을 읽고, 2천여 권에 달하는 책을 가진 책벌레다. 게다가 시중에 존재하는 <도덕경>을 여러 권 읽었지만, 번역이 잘못되어 서로 다른 내용으로 서술되자 직접 한문으로 된 원문을 해석해 읽어내기까지 한 열혈 책벌레다. 어디 그 뿐인가? 그가 쓴 책들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하고, 세간에는 한 해동안 주목할 책으로 인정받는 TV 책을 말하다에도 선정도서가 되기도 하였으니 훌륭한 저술가기도 하다. 이 정도의 책읽기 고수가 ‘책 읽는 책’을 썼으니 반가운 일이다. 또한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도 여간 반가운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책을 이제야 읽었단 말인가 싶어 애석할 따름이다. 머릿속에 담고, 가슴속에 새겨야 할 좋은 글들이 그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어야 할 독자를 따로 염두해 두었다. 

 


● 책을 읽어도 좀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이 발전하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사람

●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

● 독서를 통해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폭넓은 교양과 깊이 있는 지적 역량을 갖추고 싶은 사람

● 지성인으로서 사회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싶은 사람

 

  약장수가 약을 팔면서 그 효능에 앞서 환자들을 콕콕 짚어내듯 일반적인 ‘책환자’들이 겪고 있는 증상들을 짚어냈고, 그 용도에 맞게 처방 또한 잘 했다. 저자가 말한 이 책을 쓴 의도 세가지중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두 번째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독서 방법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는 부분이다. 일반적인 책읽기 책들이 주로 번역서들이 많고, 실용서에 편중되어 있다면 이 책은 문학과 함께 주로 인문서를 위주로 한 효과적인 책읽기를 말하고 있다. 특히 번역서를 잘 고르는 방법과 인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양서를 고르는 법을 알려주는 제 3장 책 고르는 지혜 편은 내게 참으로 유용했다. 다독多讀과 다상량多商量을 거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대목들이었다.  

 


“책을 쓴 저자나 책을 읽는 독자나 영원한 진리 앞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출발선상에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앞서 탐구했고 우리는 이후에 탐구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 275 쪽)

 

  간혹 블로그(http://blog.daum.net/tobfreeman)에 들러 ‘책을 많이 읽는다’며 부러워하는 방문객들의 댓글을 발견하곤 한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 무척이나 부끄럽다. 늙어감을 감지하면 남겨진 시간이 소중함을 더욱 깨닫는다.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좀 더 일찍 글을 썼더라면...’하는 아쉬움에 그를 보상이라도 하는 듯 씨름하는 내 모습이 보이는 듯 해 부끄럽다. 또한 리뷰를 쓰는 것은 읽었노라 자랑하려는 듯 쓰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내가 무엇을 읽었더라’ 정리하여 되새김질 하고픈 욕심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 ‘이 책은 읽어보니 이렇더라, 저렇더라’하고 나중에 읽을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다. 저자는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십분 공감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은 책은 초라해 보이고, 읽어야 할 책이 커보이니 이는 ‘책 보는 눈이 트이는’ 때문인가 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고개를 드니 좋은 책이 열 권이 보여 서두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럽다 말하는 방문객에게 ‘부러워말고 좋은 책 찾아 지금 당장 읽어라’ 권하고 싶다.

 

  버트런트 러셀은 양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좀 더 빨리 양서를 고르는 법을 알았더라면, 지금까지 숱한 세월을 시행착오하며 책읽지 않았을 것이다.” 시행착오와 경험이 자신에게는 뼈와 살이 되는 소중한 자산이 되는 법이지만, 책읽기만은 그런 수고를 덜 했으면 한다. 죽음을 앞둔 괴테가 말한 것처럼 세월은 짧은 반면 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설프니나 책상물림들(책읽는 이들도 모습은 그럴테지만)이 세상에 없는 방법을 새로 만든 듯 자랑하는 ‘독서법’을 적은 책이 아니라, 제대롭고 멋진 다독가들이 전하는 ‘나는 책을 이렇게 읽는다’, 혹은 ‘이런 저런 책이 좋더라’ 말하는 책을 좀 더 만나고 싶다. 다독가들에게는 이런 책을 쓰는 것은 배움과 익힘을 행동으로 전할 수 있는 의로운 행동이요, 후학에게는 시간을 줄이면서 좋은 책을 만나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후배는 항상 선배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A 오말리는 “서평을 쓰는 사람들, 그들은 출판사가 개최한 서커스 공연에서 일하는 호객꾼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우호적인 리뷰를 써서 출판사 관계자라고, 책장수라고 욕을 먹든, 호객꾼이라 불리든 상관없다. 좋은 책은 좋아서 널리 알려야겠고, 나쁜 책은 나빠서 널리 알려야겠다. 그것이 책읽으며 리뷰쓰는 내 숙제라 생각한다. 또한 기왕 판을 벌린 참이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게끔 그림넣고, 설레발쳐서 큰 판을 벌이고 싶다. 세계 10대 출판 대국이지만 국민 평균 한 권의 책 밖에 읽지 않는 이땅의 서평쟁이니 더욱 더 그럴 수 밖에. 이런 책을 만나면 반가운 임을 만난 듯 흥이 나고,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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