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국민의 온도는 99℃다 ! 
 

  최규석 작가의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를 만나는데 주저함은 필요 없다. 오히려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가? 호기심만 증폭되었다. 만화가 최규석을 알게 된 것은 사실 오래되지 않는다. 지난 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http://blog.daum.net/tobfreeman/6657352)를 접했는데, 귀여운 아기공룡둘 리가 성인이 되어 대한민국 사회에서 서민층으로 살아간다는 설정에 심한 문화적 충격과 함께 최규석이라는 놀라운 인물을 확인하면서 한국만화의 진일보를 예감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원주민(http://blog.daum.net/tobfreeman/6971645)을 보면서 그의 따뜻한 시선은 소외받고 억압받는 ‘우리’에 머물고, 날카로운 펜촉은 우리 사회 속 깊숙한 곳에 메스를 들이대서 현실을 확인할 수 있게 펼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우리 시대의 영원한 화두이자 기본적이고 소중한 가치인 ‘민주주의’를 이야기 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작품을 제안받아 지난 해 1월 인터넷과 전국의 학교에 보급되었던 것을 시민교육쎈터의 이한 선생이 꾸민 ‘그래서 어쩌라고’[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교안]을 덧붙여 책으로 만들어졌다. 반가운 그림, 진중한 내용 <100℃-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이다.    


   출간을 거듭할수록 최규석은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과감해진 선과 거친 붓터치,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표정들은 굳이 대사 없이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함축적인 주인공들의 대사는 소설의 그것을 능가한다. 그림만 그릴 줄 아는 것이 아니라 長考끝의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6. 10 항쟁을 겪지 못한 세대라는 것. 작가는 독자들에게 알리기에 앞서 책을 통해 6. 10의 의미를 새로 안 것이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하는 이유이고, 가르치면서 또 배운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래서 공부는 평생하나보다. 책을 보면서(읽으면서?) 내내 내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영호의 형 권영진이었다. 그가 내 모습을 닮아서였다. ‘책상을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치사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발표를 보면서 망자亡者를 위해 술 한 잔 올리는 비즈니스맨들에게 어느 대학생이 자본의 단물이나 빨고 있다가 가끔 눈물 흘린다며 위선자 보듯 하자 그는 말했다. 

“학생들 보기에 우리가 위선자나 변절자로 보이겠죠. 그래서, 변절자는 같이 울면 안돼요?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만 슬퍼하고 분노할 자격이 있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얻는 게 도덕적 우월감 말고 뭐가 있어요?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까지 밀쳐내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주제넘은 소리 미안합니다. 뭐, 그래도 내가 번 돈으로 학교 다니던 동생이 지금 빵살이 하고 있으니...너무 고깝게 듣진 마세요.” (90 쪽)



 



 


 

  새내기 시절 나 또한 영호와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 상경을 위해 밤새워 공부하며 꿈꾸던 대학의 낭만은 없었다. 붉은 글씨의 플랜카드와 대자보가 하늘과 벽을 메우고, 곳곳에서 시위를 준비하고 댓거리(학습)를 모집했다. 위악.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캠퍼스의 광경이 두려웠고, 동료들의 투쟁을 위한 가열찬 노력들이 정말 무서웠다. 전경에 학원에 침입하는 것도, 사복경찰이 도서관에서 수배중인 학생을 연행해 가는 것도 모두가 붉은 띠를 두르고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미팅도 하고, 짧은 연애도 했지만, 그것은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자고 외치는 동료들의 무리에서 벗어난 일탈이었고, 미팅에 참석한 모두는 뒷통수가 뜨뜻함을 견디며 애써 웃음지은 일탈자들이었다. 내가 데모에 동참했다면 동기들이 나를 끌고 갔기 때문이고, 댓거리에 함께 했다면 강의가 휴강이 되어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2학기가 한창인 가을, 시위중인 동기녀석들의 동부서 연행은 내게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다시 보는 전환점이 되었다. 암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둔 촌뜨기 영수가, 형사의 아들인 뺀질이 맹구가 구치소에 갇혔다. 이 일로 어머니는 졸도를 하시고 악화되셨고, 아버지는 형사직을 그만 두셨다.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들은 왜 그 바보같은 짓(?)을 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영치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일호프를 준비하고 석방을 위한 집회를 만들고 참여하면서 그들이 그토록 노력하는 이유와 얻어내려는 가치는 만인이 사람답게 살 권리,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권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의 참여는 커터칼의 흠집이 될망정 독재라는 거목에 몸으로 부딪혀서 쓰러뜨리려 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리뷰쓰기를 한참을 망설였다. 책을 접하기 전까지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정점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면서도 여전히 6. 10 항쟁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이 책 주인공 영호의 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영호 아버지처럼 빨갱이를 끔찍이 싫어하는 호랑이 아부지였다. 다시 말해 호랭이 보수 아버지의 장남이다.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민족’구호를 단 변변찮은 대학을 다니는 아들을 아버지는 영 마득찮아 하셨다. 그래서인지 조금이라도 늦게 귀가하면 ‘데모질 했냐?’고 추궁을 당했고, 그런 짓(?)하다 걸려서 경찰서라도 잡혀가면 법원에 가기에 앞서 아버지한테 ‘즉결심판’을 당할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야 했다. 6.10 항쟁을 모르는 호랑이 보수주의 아버지의 장남 아들이었기에, 그래서 애써 그들을 외면하고 살았기에, 이 책의 리뷰쓰기를 고민했다. 가타부타 말할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였다. 21 년 전의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광장을 나가 있어야 할 내가 사무실의 한 자리를 차고 앉아 이렇게 글로써 주저리 함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컴퓨터 앞에 앉은 이유는 공교롭게도 6. 10 항쟁 21돌을 맞는 오늘을 기념하고 싶었고, 또한 ‘학원 민주화’란 단어가 생각나서다. 6. 10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룬 후 386의 대학생들은 시선을 돌려 학원 민주화에 뛰어들었다 대학교는 또 하나의 작은 사회. 독재 군사 정부로부터 ‘민주화’를 얻어냈다면, 대학으로부터는 ‘학원민주화’를 위해 다시 뭉친 것이다. 학생들의 불합리한 대학등록금 인상에 반대하고, 저급한 학생복지 정책을 개선하는데 앞장섰다. 대학의 주인은 총장이나 이사장이 아닌 ‘학생’이라며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힘을 합해 하나 둘씩 개선해 나갔다. 오늘날의 대학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금쪽같은 학비 내고도 수업을 거부하면서 얻어낸 선배들의 투쟁 때문이다.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대학의 주인인 학생들의 고민과 참여가 있어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일어나는 ‘촛불집회’는 ‘학원민주화’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지금 독재로부터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국민된 자유와 권리를 보다 더 향유할 수 있도록 다듬고자 국민들이 다시 뭉치고 있다. 오늘의 뭉침은 과거‘독재로부터의 민주주의 탈환’이 아니라 ‘국민 민주주의로의 회복’으로 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면 너무나 잘 알기에 그것을 두려워 하는지도 모른다. 국민과 함께 해야 할 정부가 진실을 알기에 앞서 국민이 모여 있는 사실을 두려워해 그것을 차단하느라 전전긍긍 하고 있다. 듣고자 하는 열린 귀가 없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들으려 하지 않고, 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데 노력하는데 애쓰느라 국민들의 목소리에는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을 두고 ‘소통의 부재’라 하는 것이다. 듣지를 못하니 말하지 못하고, 모여 있는 사실이 두려워 집회를 차단하고, 강제해산하는데 연연해 하고 있다. 이는 현 정부가 그만큼 국민을 알지 못하는 반증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정당성을 무시한 위임 민주주의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100℃가 되면 물이 끓는다. 지금 국민의 온도는 99℃다. 흰 색 백지 같은 순수한 가치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끓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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