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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목민이 된 소설가 김영하의 좌충우돌 시칠리아 생활기!
죽음을 예감한 어느 노인이 그동안 자신의 소원을 찾아 모험을 감행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같은 병실에 있었던 또 다른 노인은 함께 대화한 죄(?)로 그 모험에 매료되어 둘은 함께 병원 문을 나선다. 지난 해 진한 감동을 남겨준 영화 <버킷 리스트>의 대강 내용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겨지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은 녹아드는 얼음 같은 보물이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할까나 적어놓은 리스트, 버킷 리스트는 마지막 소원의 목록들이다. 노인의 소원은 ‘여행’이었다. 이 나라에서 이걸 하고 싶고, 저 나라에서 저걸 하고 싶었다. ‘놀이같은 돈벌이’를 하던 노인과 ‘지겨운 밥벌이’를 하던 노인의 소원은 같았다. 비록 늙어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갔지만 그곳에선 청년이 되고 소년이 된다. 여행은 그런거다. 지금까지의 나를 확실하게 잊으려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설렘과 두려움, 경탄과 피로가 함께 하는 그곳에선 누구나 같은 조건의 사람이 된다. 내가 있는 이곳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알지 못하는 저곳이 궁금해서다. 여행은 어쩌면 ‘각성’을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인간 사는 세상을 깨닫고, 내 정체성을 깨닫고, 인생을 깨닫는다. 책을 살 때, 부모님께 용돈드릴 때, 내 사람을 즐겁게 해줄 때 등 돈 쓰임이 참으로 유용할 때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또 하나는 여행이 아닐까?
젊어서는 다리는 튼튼한데 돈과 시간이 없어 여행을 못떠나고, 나이 들어서는 돈과 시간은 충분한데 다리가 부실해서 여행을 못떠난단다. 어중간한 시간과 돈을 가진 지금, 나는 왜 떠나지 못할까? 아직 필요를 모르는 걸까? 막연히 두려운 걸까? 큰 맘 먹고 떠나면 좋을 것을 가지 못하고 엄하게 ‘남의 다녀온 이야기’에만 침을 흘리고 듣는다. 그리고 그들을 부러워한다. 다른 것 아닌 그들의 여유와 용기를 부러워한다. 바보처럼...
오늘도 부러운 한사람의 여행이야기를 주워 들었다. 어느 날 어느 소설가가 ‘진정한 유목민’이 되기 위해 떠난다는 내용의 신문에서 읽었는데, 그가 바로 ‘김영하’다. 제 버릇 남 못준다 했던가? 그가 떠난 곳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 하늘로 날려 책을 지었다. 제목도 멋지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이다. 부러운 사람의 더 부러운 이야기, 그 책을 읽고 만거다. 읽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손이 가 어쩔 수 없었다. 빌어먹을...
미치도록 글이 좋아 소설을 쓰던 남자가 학생들에게 글쓰는 법을 가르치고, 남의 작품을 소개하고 인터뷰하는 라디오 디제이를 하고 있으니 왜 안답답했을까? 어느날 보장된 모든 생활을 접었다. 하던 일들도 때려치우고, 집도 팔아버린 후 그는 아내와 길을 떠난다. 이 책은 그가 이태리의 시칠리아에서 보낸 생활을 이야기한 책이다. 일종의 생활기. 이는 여행기와 엄연히 다르다. 여행기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둘러본 이야기 일테지만, 생활기는 긴 시간동안 짧은 무엇들과 함께 겪어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떠나려면 그처럼 생활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생활을 쓰고 싶다. 김영하는 내가 하고픈 모든 것을 이룬 셈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얄밉도록 그가 부러웠다.
타고 난 글쟁이의 솜씨는 예서도 돋보인다. 그가 그려내는 모든 풍경은 눈에 보이는 듯하고, 시칠리아의 바다냄새가 풍겼다. 시장을 이야기하면 왁짜지껄 소리가 났고, 와인을 이야기할 땐 시큼한 향도 났다. ‘안절부절’ 읽는 내내 떠나고픈 충동을 나타낸 한 단어다. 꼭 떠나보리라 마음속 깊이 다짐하게 했다. 내눈으로 보고 말리라.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서울을 떠날 때까지의 과정과 EBS 방송팀과 함께 촬영한 이야기, 그리고 아내와 단 둘이 처음으로 정착한 리파리에서의 이야기였다. 소설가인 그가 집을 팔면서 책을 정리한다. 작가의 방에 쌓인 책이야 쌀뒤주의 쌀알만큼 많지 않았을까? 책을 정리하면서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대목은 외우고 싶을 만큼 소중했다.
“나를 감동시켰거나 즐겁게 해주었거나 아니면 필요한 정보를 갖고 있는 책들을 살아남았다. 그 세 가지 중에 단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책들은 다른 운명을 찾아 내 집을 떠났다(책을 헌책방으로 보낸 것은 그래야 책이 가장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어느 정도는 시장의 효율성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에서 듣기로, 도서관에 기증한 책은 어딘가에서 분류조차 되지 않은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헌책방으로 간 책은 대부분 적당한 가치로 평가되 주인을 찾아간다고 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버리기는 정말 싫은 일이고, 헌책방에 팔아버림은 죽을 만큼 싫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사고의 전환’을 시켜준 대목이다. 지금껏 내게 필요없는 책은 적당한 이를 찾아 ‘거져’ 주었지만, 이 또한 그에게 혹 원하지 않던 것들이 넘겨져 부담을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했다. 헌책방은 진짜로 책을 원하고 책이 읽고픈 사람들이 찾아가는 공간이 아니던가?
얼마전 세계를 금융공포에 빠지게 한 모기지를 예를 들면 새책을 사는 책방이 프라임Prime 책방이라면, 헌책방은 서브프라임Sub-prime 책방인 셈이다. 난 책들을 헌책방에 보내며 찰진 모래에 손을 넣어 집을 지으면서 부르는 노래처럼 ‘헌책 줄게 새책 다오’하면 될 것이다. 내게 필요없는 열 권의 책 대신 잔돈이 모여 한 권의 책값을 받는다면 열 한 권의 책에 생명을 넣어주는 일이 되는 셈이다. 언젠가 시간이 날 때 더 이상 내 손을 타지 않는 책을 추려보리라 마음먹었다.
좌충우돌의 EBS 시칠리아 기행 촬영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일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 여흥을 마저 즐기려고 일부러 홈페이지를 들어가 프로그램을 찾아서 볼 정도였다. 그 후에 읽는 시칠리아는 10미터는 더 가까이 내 눈앞에 다가왔다(이 책을 읽는다면 <세계테마기행.080225.김영하가 만난 시칠리아 - 1,2,3부>를 꼭 찾아서 보기를 권한다). 이 책의 백미는 리파리에서의 생활이야기. 내가 꿈에 그리는 외국생활이 아니던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집밖을 나오면 여행지요, 눈을 두는 모든 것들이 낯선 풍경들이다. 말 그대로 외국에서 ‘놈팽이’가 되는 것. 이 생을 다하기 전 꼭 하고 싶은 일이다.
책 속에 들어 있는 몇 장의 멋들어진 사진들은 그가 찍었을 것이다. 소설가의 눈에 비친 그림은 이야기들이 곁들여져 한층 보는 맛을 더했다. <깜삐돌리오의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의 저자 오기사는 펜과 도화지를 가지고 세계를 돌며 건축물을 그려 자신의 세계여행을 이야기했고, 이야기꾼 김영하는 온전히 펜대로(아닌가? 키보든가?) 시칠리아를 써내려갔다. 나는 뭘로 세상을 볼까? 세상을 나가면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느껴질까? 그리고 내게 뭘 남겨올까? 까만 밤이 하얗게 새도록 온갖 상념을 남겨준 책이다.
내게 떠날 이유와 동기를 그득 안겨주었다. 작정하고 떠날 구실을 안겨주었다. 그가 본 시칠리아를 나도 핥아보리라. 소설가 김영하도 좋아졌다. 그를 만나야 겠다. 우선 소설들로 만나고, 다음은 직접 사람으로 만나야겠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방송을 보면 나레이션을 직접했다. 목소리? 한석규를 찜쪄먹는다)로 그가 본 세상을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