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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섬뜩하지만 매혹적인 글맛이 있는 판타지 소설
지난 월요일 집안에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소동의 발단은 동생녀석이 아끼는 아이팟을 잃어버린 일. 두 달여를 사귀었던 여자친구와 결별을 선언한 후 아픈 마음을 달래서 '소주'를 마신 게 화근이 되었다. 한 잔이 두 잔되고, 한 병이 두 병 되면서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마셨단다. 취할 정도로 마셨으면 배도 부르련만 '허기'를 느낀 녀석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었단다. 바늘에 실 가듯 라면엔 김치가 필요하다며 일 이분 자리 비워 볶음김치를 사러 간 사이 녀석의 가방이 털린 것이다. 신분증과 몇 만원의 돈이 든 지갑과 함께 녀석의 애장품이 도난당한 것이다.
취해서 집에 왔을 때는 몰랐단다(알았다면 취했겠는가?). 콩나물 국에 해장하고, 외출을 준비하던 중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없어지자 '어딨냐?'며 소란을 피웠고, 날짜 지나 찢어진 신문같은 어제의 기억을 더듬고는 심증을 굳힌 것이다. 그 후엔 소란은 잠잠해 졌다. 대신 한 숨 섞인 녀석의 푸념만 있을 뿐. "술만 안마셨어도...라면만 안먹었어도, 김치만 안샀어도...가방만 들고 있었어도..."
후회는 선택한 것에 대한 미련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개울의 물이 흐르듯 시간의 선상에 놓인 인생에 후회는 참 부질없다. 후회했던 과거의 시간마저 후회할지도 모르기에 '그 단어'를 잊으려 애쓴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의 선택의 상황이 있는 만큼 잦아드는 후회심은 어쩔 수가 없다. 난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후회하고, 그럴 수 밖에 없다면 시간을 줄이고, 얼른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상책일 터,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고민이다. 특히 뜻하지 않은 상황을 만난 후 드는 그것은 내가 싫어질 만큼 날 괴롭힌다. 이럴 땐 후회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머리를 콩콩 쥐어 박으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딱 오분 전으로만 돌아간다면, 고칠 수 있을텐데..."
흘러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면, 그때부터 '시간'이란 이미 무의미한 단어가 될른지 모른다. 후회의 연민에 빠져 있는 인간을 한심스럽다 하는 것은 지금 보내고 있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도 과거의 그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기에 '당장'에 충실하는 법이 최고일진대 '과거의 늪'에 빠져버린 그것을 끄집어 내려 애쓰니 그보다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소설 < 위저드 베이커리>는 후회로 얼룩진 인간의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그리고 되돌리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한 걸음 다가서서 '만약 되돌렸다면? 그 다음은 어쩔건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해리포터>의 판타지를 닮은 묘한 느낌의 소설, 시큰퉁해 몇 장을 넘기다가 마지막을 읽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신선하고 독특한 소설이다.
제가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인간은 없다. 그리고 부모를 닮고, 부모의 환경에서 태어난 '작은 인간'에게는 일정기간 선택권이란 많지 않고, 또 있다고 해도 별로 중요한 것도 없다. 주인공 소년 또한 무형의 의지라는 것이 자신의 삶의 자리를 결정할 수 있다면, 많은 선택을 했을 법한 환경에 있다. 하지만 어리고 학생이다. 그리고 애써 고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아버지와 죽은 엄마를 대신하는 새 엄마 '배선생', 그리고 배선생의 딸과 가족입네 하고 살아가는데 큰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다만 소년이 원했던 바는 '각자가 들이마실 공기의 부피를 침범하지 않기' 어짜피 독립할 수 있는 그 때는 떠나려고 했으니까.
소년은 '단지 거기에 있었을 뿐'이었다. 여섯 살에 엄마가 소년을 버렸을 때도, 새 엄마 '배선생'이 엄마이기를 자처하며 들어왔을 때도, 배선생의 딸 '무희'가 몸씁 일을 당해 '배선생'의 입에 게거품이 일어날 때도 단지 '그곳에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억울함을 당하고, 피해를 입는다. 진실이 아니기에 대답할 필요도, '항변'할 이유도 찾지 않았을 뿐인데, 그것을 알아줘야 할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졸지에 쫓기는 신세의 소년은 단골 빵집 'Wizard Bakery'에 머물게 되고, 마법사 제빵사와 파랑새, 그리고 마법에 걸린 빵과 그 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소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고 해리포터가 되어 현신을 잠시 잊는다.
시선이 주목되는 인물은 '마법사 제빵사'였다. 마치 신인듯 슈퍼맨과 같은 '시대의 영웅'들처럼 그의 정체성은 '나약한 인간'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그는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다. 한심하고 답답한 인간들, 저 혼자 처리하지 못해 마법의 빵으로 해결지으려 하는 그들이 영 마득찮다(주의사항도 읽지 못한 인간들인데도...). 하지만 그는 부작용을 호소하는 인간을 꾸짖고 투덜대면서도 꾸준히 돕고 있다. 그를 보노라면 여엿쁜 인간들을 위해 '하지 않아도 될'일을 자처하는 영화 <와치맨>의 영웅들이 엿보였다. 또한 실수투성이의 인간을 부러워하는 듯한 모습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을 부러워하는 영화 <벰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톰 크루즈를 닮은 것도 같다.
이 소설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한 생각'에 태클을 건다. 그리고 표현하지 않는 의지는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 무의미한 생각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준다. 살아오면서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야 왜 많지 않겠는가? 하지만 되돌릴 수 없고, 되돌린다 하더라도 또 다시 반복할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 인간이다. 후회와 탄식으로 첨철된 것이 인간이라면 이 또한 인간의 운명이 아닐까? 하지만 차라리 행동한 후에 후회하기는 아무것도 하지 안고 '그냥 거기에 있어서' 후회하기 보다는 낫겠다 싶다. 기기묘묘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온타 리쿠'를 생각나게 하지만, 스토리와 메시지는 여느 판타지 소설보다 낫다. 기대하지 안았던 소설, 하지만 소설가 구병모의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위저드 베이커리... 집 부근에 있다면 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