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호평받는 이야기꾼, 김연수의 펜끝으로 돌아본 여섯 나라, 열 두 이야기.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지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 일찌기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하신 말씀이다. 수많은 편견중에 외국과 외국인에 대한 편견은 유독 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나라에 들어온 외국 사람의 모습으로, 외국을 다녀왔다는 지인의 말에 그 나라를 평가하기가 막연히 상상하기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나라 속 외국인이나, 외국 다녀온 내나라 사람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라 나라를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외국을 알려면 내가 '직접' 다녀오는 수 밖에 없다.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낀 것 만이 '외국'을 체험하는 것이고, '나만의 그 나라'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서점에 깔린 각종의 여행기는 여행하지 못한 사람보다 '그 나라'를 다녀온 사람이 즐기기에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나라를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상에 상상이 더해지지만, 다녀온 사람에게는 자신의 '외국'와의 같고 다른 점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라면 우리 모두에게 '세계'라는 한 권의 책이 있을 것이다. 내 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달랑 한 페이지로 남아 있을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백 여 페이지의 책이 있을테다. 세계가 책이라면 페이지의 숫자도 중요하겠지만 그 내용도 중요할 터, 한 페이지에 초등학교 신입생의 일기가 적혀 있을 수도,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같이 귀한 생각이 있을 수도 있다. 나의 세계는 몇 페이지 일까? 그리고 그 속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책으로 낼 때마다 상을 휩쓰는 타고난 이야기꾼,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기를 읽었다. 페이지는 여섯 페이지(설마...다섯 나라라는 뜻이다)인데 열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러시아, 중국, 일본, 독일,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 한 페이지마다 한 편의 재미있는 단편소설이고, 김연수의 감상문이다. 책읽기를 술마시기로 비하자면 읽으면서 거나하게 취하고, 상상하면서 술독에 빠져버린 책,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를 읽었다.  

 



 "공항을 찾아가는 까닭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공항대합실에 서서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를 볼 때마다 그토록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망각, 망실, 혹은 망명을 향한 무의식적인 매혹."

  김연수에게 공항은 망각, 망식 혹은 망명을 향한 무의식적 매혹, 즉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피사체요, 그 본질은 여행이다. 자신을 잊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시작은 여권 제시. 자신을 재확인하면서 시작한다. 어쩌면 망각을 위한 마지막 확인일지도...하지만 낯선 곳에 도착한 '무례한 여행객'(참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외국인은 무례할 수 밖에 없다)은 철저하게 자신을 확인한다. 동공은 평소보다 약간 더 커지고, 온 몸에서 자란 털은 약간 일어설테다. 조금 더 잘 보이고, 조금 더 크게 들린다. 혀를 감싸고 있는 미뢰 또한 낯선 음식에 놀란다. 잔뜩 긴장한 무례한 사람, 여행객의 풀이말이다.  

  밥벌이인 제 직업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다. 소설가 김연수는 사람에 초점을 맞췄다. 사람의 생김과 말뽄새, 행동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김연수)와 얽혔던 이야기와 사건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여행했던 곳을 독자와 함께 되돌아가 더듬어 걸어가며 말하듯 편하게 읽힌다. 얕은 농담과 평이한 문체는 처음 만난 김연수가 초등학교 동창 쯤으로 느끼게 살갑게 다가왔다. 그의 진짜 목소리와 톤이 궁금해진다.   

  가장 재미있는 페이지는 중국 페이지요, 이 책의 처음 부분인 [깐두부만 먹는 훈츈 사람 이춘대씨] 한편의 재미있는 코믹단편영화다. 영화 '놈놈놈'에서 황야를 달리는 '이상한 놈 윤태구(송강호)'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이야기였다. '일 없어요'란 말의 뜻이 그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고, "사랑을 해봐요. 후회없는 사랑을 해봐요"로 시작하는 현숙의 노래를 부른 무명가수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국경을 넘나든 그들의 발끝에 걸린 황야의 먼지와 석양의 노을을 보고 싶었다(여행기를 읽기 싫은 가장 큰 이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다. 옌삔이 가보고 싶다고 생각할 줄이야. 그의 여행바이러스에 지독하게 감염되었나 보다).   

  한편 가장 진지한 눈으로 활자 끝을 좇은 페이지는 일본 토오꾜오(책에 등장하는 지명마다 나오는 발음 그대로 적으려 했던 그의 의도가 인상적이다)에서 생을 마감한 이상의 마지막을 추적한 글 [당신들은 천당과 지옥의 접경으로 여행을 하고]였다. 한 권의 책에 기록된 이상의 마지막 생 이야기는 그로 하여금 휴가철 성수기라 두 배의 비행기삯을 기꺼이 치뤄 가며 토오꾜오로 떠나게 만들었다. '병든 몸으로 '성공'을 외치며 토오꾜오로 떠난 이상, 이상이 생각한 '성공'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런 그에게 토오꾜오란 또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답을 얻기 위해 이상이 숨을 거둘 즈음 동시대 문학인들의 글 속에 들어있는 '이상의 흔적'을 바탕삼아 그가 숨을 거둔 토오꾜오시 칸다구 진보쬬오 3초메 101의 4, 김기림에 따르면 "구단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이층 골방", 이상의 임종을 지켜본 김소운의 말에 따르면 "진보초 뒷골목, 햇살이 들지 않는 좁은 이층 방" 를 찾아나선다.  

파라다이스 토오꾜오에 도착한 이상은 그곳이 마냥 그렇지 않음을 알고, 다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다. 뜻하지 않은 체포에 몸은 더욱 상하고 결국 그가 그렸던, 실은 그렇지 않은 파라다이스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생을 마감한 그 어두운 방은 문학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 천당과 지옥의 접경이라고 김연수는 말했다. 그가 꿈꾸는 국경이란다. CSI 요원의 그것 마냥 현실의 토오꾜오에서 이상이 살던 그곳이 오버랩되었으리라. 팩션인 듯, 기행문인 듯, 약간의 스릴과 우울함이 뭍어있는 글이었다. 한 개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한 가지 주제로 떠나는 여행은 멋져 보였다. 난 어떤 질문이 생길까? 굳이 묻는다면 '화가 고갱이 끝내 떠나지 않고 살게 한 피지 타히티의 매력이 뭘까?'고 말하고 싶다. '노년에는 고갱처럼 살고 싶다'고 농담삼아 말했다가 습관이 되어 이젠 정말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페이지(나라)마다 독특한 맛이 있고, 매력을 품었다. 다른 땅, 다른 사람들 속에 김연수는 변함없이 사람을 좇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사건에 주목한다. 오감을 잔뜩 세운 채로. 건축가 오기사는 펜과 스케치 북으로 세상을 돌고, 어느 사진작가는 말없이 렌즈로 세상을 그렸다. 김연수는 그의 유려한 문체로 세상속 사람들 그리고 이야기를 그려 나갔다. 매력적인 일, 여행을 추억함이다. 한 편 놀라운 것은 그들의 기억력이다. 여행 중에 기록을 했을까? 모든 여정을 마치고 추억했을까? 마이크를 써서 녹취를 했을까? 아니면 전공을 살려 체험이라는 뼈대에 '허가받은 거짓말'로 살을 붙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알 필요도 없다. 여행의 추억이란 늘 과장되고 포장되는 법. 그것을 들으면 더욱 부피는 커지는 법.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여행의 기술]에서 '여행기는 실제 여행보다 더 현명한 여행법일 것이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읽는 독자야 무슨 상관이랴? 어짜피 제가 떠나면 또 다른 페이지가 생겨날 것을...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이 둘 있다.하나는 사랑이요, 또 하나는 여행이다. 

젊어지기를 원하느냐? 될수록 여행을 많이 하여라."

  이 글 속의 김연수는 오늘의 그보다 필경 젊었으리라. 여행의 순간은 그것을 준비하면서부터 경험하고, 추억하는 것까지 젊어있었다. 여행을 하면 흰머리가 검게 되고, 주름이 사라지진 않을테지만, 오늘의 내가 과거의 한 때를 기억하면 젊어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 동창을 만나면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행의 모든 시간은 젊음의 기록이다. 그런 젊은 시절이 많았음은 그렇지 않은 이보다는 젊은 듯 보이지 않을까. 또래의 김연수가 나보다 젊어보이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의 여행기가 나를 무작정 떠나고 싶은 치기어린 청년의 욕망에 빠지게 한 걸 보면 그 말은 맞지 싶다. 책을 덮으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젊어졌는지, 젊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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