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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땅에 살다 간 '맏이'들을 위한 훌륭한 진혼곡
죽음을 대함은 하루만에 다섯 살의 나이를 먹는 것과 같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부질없고, 희로애락이 거짓같다. 태어나면 죽을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을, 익히 알아 왔건만 이를 목격함은 이미 알던 것과 생판 다름이다. 죽음을 대하면 누구나 훌쩍 늙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슬프게도 무척이나 어른스러워진다. 단순한 죽음이 이정도인데 피를 나누고, 정을 나눈 가족과 지인의 죽음을 대할 때라면 어떨까? 하늘이 무너짐이 이보다 더 할까? 하늘이 무너진다면야 함께 세상을 마감하니 차라리 다행이다. 이승에 남겨져 이미 없고 난 사람을 기억함은 '천벌'만큼 힘들다. 그런 죽음을 대한 이들이 그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쩌면 아픈 자들의 세상인지 모른다. 없고 난 이를 내가 애절하게 추억하는 만큼 내가 없는 세상에 날 추억할 사람들과 부대낌이 무엇보다 소중한 줄 알았음이리라. 그래서 이 세상을 사는 아픈 자들은 불쌍한 자들이다. 그리고 독하디 독한 자들이다.
소설가 김정현은 참 독한 사람이다. 둘도 없이 친한 친구의 죽음을 대하고 난 후 한없이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을 풀을 길이 없어 글로써 그를 살려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죽였다. 그 과정은 그리 쉬웠을까? "술 먹고 컴퓨터에 써놓은 원고를 지워버린 게 7번. 친구의 영혼도 방해한 책을 꼬박 1년이 걸려서 완성했다. 너무 힘들어서 이제 다시는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라며 쓴웃음을 졌다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를 보면 그의 괴로움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한낱 인세를 생각하고 이 괴로움을 담당했을 리 만무하다. 단지 김정현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도 아니다. 고향 영주에서 '고향 사진관'을 운영했던 친구 서용준은 사랑많은 아들이었다. 가슴 가득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김정현은 아들의 사랑, 대한민국 자식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장편소설 <고향 사진관>을 읽었다.
소설가 김정현은 얄미운 사람이다. 10년을 거슬러 IMF 때에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해 이 땅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그 시절의 아버지를 대변했었는데, 이번엔 50대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뇌졸증을 앓아 수족도 못 쓰고, 정신을 놓은 아버지를 17년간 병간호한 이 땅의 '아들'을 그렸다. 전도유망한 청년이 제대와 동시에 병을 앓는 아버지를 돌보며 시절 지난 사진관과 가족을 떠 맡다가 아버지를 보낸 후 그 역시 간암으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의 삶을 추적하는 내내 아리고 먹먹해 지는 가슴을 쓸을 새가 없도록 만들었다. 소설가 김정현은 얄밉고 독한 사내였다. 동시에 책을 읽는 독자가 이럴진대 글을 그린 저 사내는 오죽했을까 싶어 손이라도 잡고 쳐진 어깨를 토닥이고 싶어졌다.
한편으로 얄궃게도 이 책을 왜 썼을까, 어떻게 써나갔을까 작가를 추론해 본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강력계 형사였던 그인지라 말없고,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성격인 친구 서용준을 그리기 위해 용의자를 보듯 추억했을 테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과 만나 탐문하듯 그와의 일들을 더듬었을 것이다.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이제는 없고 난 친구를 불러 눈에 보듯, 이야기듯 하듯 그렸을 테니 이게 어디 소설인가 싶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이 글을 마칠 때까지 작가에게 이승은 저승만 못한 나날이었으리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 역시 그리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직도 자신은 아버지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고 모든 것은 아버지가 일군 것들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오직 지켜가야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작가 김정현이 보는 친구 서용준의 모습은 '아버지의 대리인'이었다. 동안인 탓도 있지만 좀처럼 나이들지 않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좀처럼 대답하지 않다가 뱉어내는 비결이란게 '아버지가 깨어났을 때 늙으면 못알아볼까봐 스스로 늙음을 멈추었다'고 말한다. 동생의 문제로 서울에 가서도 '혹시'라도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 늦은 밤기차를 타고 내려오고, 친구와 술한잔 마실라치면 단란주점의 아가씨와 앉아 있을 때 조차도 아내에게 자신의 거처를 밝히는 친구 서용준, 그는 천상 아버지를 위한 '대리인'이었다.
문득 어디 '병환중인 아버지를 둔 그'만 그럴까 싶어졌다. 제 뜻을 펼치기 전에 부모를 먼저 생각하고, 가족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이 땅에 숱하게 존재하는 '맏이'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싶다. 경중輕重의 차이야 있겠지만, 제 뜻을 펼치느라 앞만 보기에 앞서 나도 모르게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고 먼저 생각하는 이 땅의 '맏이'들 역시 서용준을 닮았다. 작가 김정현은 오롯이 아버지의 아들이자 또 자식들의 아버지였던 친구 서용준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 땅의 '맏이'의 전형이었다. 맏이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변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사람의 일생을 다시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글 쓰는 동안 추억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힘들지도 모를 것 같아서다. 서용준에게 늦게 나마 수고했다 전하고 싶다. 그리고 작가에게도 애썼다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이 땅에 살다 간 '맏이'들을 위한 훌륭한 진혼곡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