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정원
이시다 이라 지음, 나가노 준코 그림, 정상민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우정의 숙적, 첫사랑'을 이야기한 얇은 어른 동화책!
 
  기억을 되돌려 내가 좋아한 처음의 여자를 더듬어본다. 네 살 때인가보다. 오 원인지 십 원인지 동전 한 개를 아저씨에게 주면 조그마한 국자에 설탕과 나무젓가락을 주셨다. 뽑기. 연탄불에 녹은 뜨거운 설탕에 소다를 약간 더하면 검붉게 녹은 설탕액이 핫쵸코의 커품색으로 연해지면서 부풀어 오른다. 넘치기 전에 아저씨에게 냉큼 되돌려주면 그것을 받아서는 '5초의 마술'을 부렸다. 5초 후엔 평평하고 뜨끈한, 게다가 모양이 박힌 설탕과자로 둔갑해서 나오는것이다. 늘 엄마에게 먹을 것을 얻어만 먹다가 독립적으로 처음해보는 요리는 '참여의 즐거움'과 '완성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했다. 먹지는 않고 계속 만들기만 해서 너덧 개를 집으로 가져온 기억도 나는 걸 보면 만드는 즐거움을 꽤나 즐겼던 것 같다. 서서히 녹아들어가는 설탕을 지켜보며 젓가락을 서서히 휘젓는 과정에 느닷없이 끼어든 나무 젓가락. 그 젓가락의 주인공 여자아이, 그 여자애를 처음보고 좋아했다. 무릎을 끌어앉고 앉아 '내 뽑기'에 나무 젓가락을 담궈서는 찍어 먹는 것이다.
 
  다른 아이였으면 먹이를 앞에 둔 강아지마냥 '그르릉'거리며 밀쳐냈거나 화를 냈을 것이다. 그건 고사하고 '이건 그렇게 먹는 게 아닌데...' 차마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못한건 너무 예쁜 아이였기 때문이다. 요술공주 세리 만큼 예쁜 그 아이는 '콕' 찍어 입에 넣고는, 나를 보고 말없이 웃었다. 설탕이 타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그 애의 웃음을 쳐다보던 기억. 꽃보다 이쁘다고 생각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도 함께.우리 옆동네로 이사온 그애를 오랫동안 혼자서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어렸으면서도 미추美醜 를 구분지었고, 그 기억이 지금껏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난 상당히 '되발라까진 사내놈'인가보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에 시간을 던진 이유는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80여 쪽 남짓되는 얇고 작은 양장본에 예쁜 동판그림들이 들어 있는 어른동화책, [시간의 정원]이 나를 잠시 과거로 되돌렸다.
 
 

 
 
  이 책의 저자 '이시다 이라'는 유명한 일본드라마 [이케부쿠로 웨스트게이트 파크]를 통해 알게 된 작가다. 소설이 아니라 재미있게 본 일본 드라마의 원작자가 그 라고 해서 원작은 읽지 않고(소설과 드라마의 원작을 만났을 때의 딜레마는 이미 아는 내용에 첨가되거나 빠진 것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 것 같아서 읽기도 뭐하고, 안읽기도 뭐한 닭갈비'계륵鷄肋'를 닮았다) 몇 권의 다른 책에서 만난 적이 있다. 청춘의 연애를 바탕으로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주인공을 만들어 낸 그가 이번엔 여섯 살의 꼬마아이들을 등장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것참, 안될 말이다 생각하면서 책을 펼쳤다.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고 있는 외톨이 미즈키에게 유일한 친구는 아사히다. 둘은 좋은 친구사이, 미즈키에게는 단 한 명의 친구다. 갈등은 전입생 여자아이 히카리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둘다 히카리에 반해 버리고, 셋은 친구가 된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조는 우정 속에 끼어든 사랑이다. 이것과 그대로 닮지는 않았지만, 엇비슷하게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다.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녀석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그녀를 만나는 시간만큼 녀석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때 부끄럽게도 '빼앗겼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녀석의 여자친구가 주는 것 없이 미웠고, 그녀의 결점만 보려 했고, 때로는 친구에게 투정비슷한 짓을 원인으로 다툼도 했다. "야 이 자식아, 여자가 생겼다고 친구는 안보이냐?" 
 
우정은 영원하다고 하고, 사랑도 그렇다 한다. 좋은 여자를 만나 친구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녀석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기는 원치 않는다. 사랑과 우정, 의리와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교시절의 그때가 떠올랐다. 남녀 모두에게 생기는 우정사이에 끼어든 이성의 출현은 묘한 갈등을 낳는다. 당연히 영원할 줄 알았던 우정은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되는 이성에게 무릎을 꿇고, 우리는 처음으로 '배신'을 경험했다. 그리고 말한다. "치사한 자식, 넌 친구도 사내도 아니다." 하지만 곧 나도 경험하게 된다.
 
  다소 극단적인 방법(아니 상당히 극단적인 방법, 그래서 자꾸만 거슬린다)으로 그 갈등을 이야기하지만(그렇지 않으면 이 평온하면서 은밀한 갈등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번도 따로 두고 생각해 보지 못했던 그 시절의 갈등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아이들에게' 들려준 동화를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처음 겪은 사랑의 시련일테니까. 난 그 때 그 갈등을 어떻게 풀었던가? 그 때가 자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지난 해 동창회에서 밤을 세워 술잔을 기울였던 녀석이 그 주인공이란 건 기억난다. 나도 잘 넘어갔나보다. 나에게는 우정이 사랑보다 강했나보다. 녀석은 남아있지만, 그 시절의 그녀는 기억조차 없으니까. 아사히와 히카리는 영원했을까? 궁금해진다. 동판화가 나가노 준코의 그림도 한 몫을 차지했던 소설, 이시다 이라의 [시간의 정원]을 읽고 떠올린 상념이다. 원제목은  ぼくとひかりと園庭で ;나와 히카리와 정원에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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