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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껏 잘못 알아 온 CIA의 '불편한 진실들'을 담은 책 !
내 할아버지에게 미국은 '아버지의 나라'였다. 1950년 6월 25일,(날짜를 모르는 젊은이가 허다하다니 굳이 적는다) 한국전쟁을 참전하셨던터라, 게다가 총 한 번 쏴보지 못한 채(나중에 할머니가 할아버지 몰래 말하셨다) 총상을 입고 가까스로 살아나셨던 당신에게는 '나라를 구해준 훌륭한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4-5 살 때 늘 저녁때만 되면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빅 머로우가 출연했던 미국드라마 컴뱃Combat 을 꼭 봤다. 그리고 내게 늘 말씀하셨다. "미국은 좋은 놈, 독일군은 나쁜 놈이란다." 그것은 국민학교 3-4 학년때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했던 반공영화 '똘이장군'에서 북괴의 수괴로 나온 김일성은 '붉은 돼지'였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렇게 믿었다. 영화속 주인공은 항상 '좋은 놈'이니까.
그래서 일꺼다. 대학 새내기 때 붉은 깃발을 두르고 '양키 고 홈'을 외쳐대는 80년대 학번의 선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들과 어쩔 수 없이 함께 한 '학습'은 간첩교육과 다름없었다. 지금껏 듣고 믿으며 자라왔던 사실과 너무나도 달라서 제대로 영글지도 못한 정체성은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언론'이 말하는 '좌익 용공세력'들과 함께 한 학기를 보내며 전경에게 잡혀가고 매맞기를 되풀이 하면서 나 또한 그들이 말하는 '빨갱이'가 되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인지도 모른다. 뒤늦게 알게 된 게 화가 났고, 그동안 속아왔던 것이 더 화가 났고, 앞으로도 속아야 한다는 것에 치를 떨게 되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속고만 있는데, 이 세상을 움켜쥔 우두머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나라'로 받들고 있었으니, 그 시절은 정말 '웃는다고 웃는 게 아니었고, 살아간다고 사는 게 아니'었다.
비밀秘密 을 만들고 또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의 쾌감은 인생에 있어 색다른 맛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제는 알지 못하는 자도 그 비밀에 관심이 지대함에 있다. 비밀의 유효기간은 그것을 몰랐던 자들이 알게 되는 그 때까지만 일테지만, 밝혀진 후엔 비밀을 가졌던 이유에 대한 막대한 책임과 알리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도 비난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그 결과의 무서움을 견디는 것은 현재는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비밀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그 위험도도 커지지만, 알고있는 자들에게는 들키지 않는 한 인간만이 가지는 즐거운 '스릴'도 된다.
'비밀'을 지켜야 하고, 또 다른 '비밀'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자, 그것을 '업業'으로 하는 자들은 아직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비밀을 모르는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미명아래 물론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우스운 것은 그것을 만들어낸 자들은 '비밀'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을 할테지만, 나중에 안 이들은 '속았다'고 분개할꺼란 사실이다. 다시 말해 '비밀'이 노출되어 대중화되면 '사기'가 되는 것이다. 비밀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들이 끝까지 지켜져야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비밀에는 무섭고 사악한 마성魔性이 있다. 네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내가 앎으로써 갖는 작은 우월감, 바로 그것이다.그래서 어떤 병적인 이들은 '습관적'으로 비밀을 만들어내고, 즐거워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마성때문에 비밀이 만들어지고, 지켜지는지도 모른다. 이 매력적인 '비밀'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혼자되기를 자처하기'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비밀때문에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없고, 스스로가 배척하기 때문에 혼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왕따'가 아닌 '자발적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결국 남과 공유할 수 없는 '비밀'은 '공상'이 되어버리는 결론에 치닫는다. 비밀은 비밀을 낳고, 그것이 반복될수록 현실과는 멀어지고, 그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밝혀지는 숨겨진 비밀. 어쩌면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할 비밀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지금껏 미국을 세계 제일의 자리에 있게 해 온 조직, CIA를 낱낱이 파헤친 책이 나온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수년간 CIA 전·현직 국장 10명과 요원 300여 명을 수천 시간에 걸쳐 인터뷰했으며, 참고한 문서만 5만 건이 넘고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분쟁 국가들을 여러 차례 직접 여행하기도 했다. 책이 나온 후 그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이 책은 이미 미국 출간과 동시에 아마존,뉴욕 타임스에 베스트셀러로 오르며 미국의 정치계, 학계, 언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아울러 ‘미국 대통령 후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선정되고, 비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온 CIA의 공식 논평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화제의 책, 팀 와이너Tim Weiner 의 [잿더미의 유산 LEGACY of ASHES]이다.
저자 팀 와이너Tim Weiner 는 '뉴욕 타임스'의 기자이자 국가 안보와 비밀 공작에 관한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 정보기관에 대해서 글을 써 왔으며, 1988년 미 국방부의 비자금을 파헤친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는 명실공히 베테랑 기자다. 그런 그가 이번엔 미국의 최고 정보기관이었던 CIA를 목표로 파고 들었다. 현재 CIA는 미국 정보 분야에서 2류 조직으로 밀려난 상태다. 60년 만에 사형선고를 받은 셈인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9.11 사태에 있었다. 그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 우리 조차도 "세계 최고의 정보력과 장비를 갖춘 미국이 왜 몰랐는가?"하는 의문을 이구동성으로 쏟아부었을 정도이니, 미국인의 토로는 얼마나 대단했을테고 그것에 미국정부도 할 말을 잃었다. 결국 CIA는 지난 2005년 CIA 국장 체제를 없애고 국가정보국장DNI 이 총지위하는 체제로 만들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정확하지 않는 '실제 정보'로 정권자의 의도에 맞도록 왜곡되고 가공된 채 정책을 펼치고 있다. 미 행정부가 세계에 슬로건을 내건 '테러와의 전쟁'의 관건은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고 정확해야 하는 것이 '정보'일텐데, 그런 정보를 핵심업무로 하고 있는 CIA가 실제를 왜곡하거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북핵 현실을 놓고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은 우리의 그것까지도 건드리고 있다.
정보기관의 정보 업무는 해외에서 진행되는 사실들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혹은 그런 사실들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말을 빌리자면 '역겨운,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일', 즉 넓은 세계를 바라보면서 어던 일이 다가오는지 파악하고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악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인데, '세계의 보안관'을 자처한 미국의 CIA가 지난 60년 역사동안 이런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 책은 하나하나 파헤쳐서 소개한다. CIA는 공산주의와 대결하기 위해 전 세계 독재정권에 돈과 무기를 제공했고 심지어 폭력을 동원해 다른 국가를 전복시키는 ‘미국을 위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나 소설에서 미화된 CIA의 성공 스토리와 달리 CIA는 잘못된 정보수집과 정세 판단으로 한국전쟁에서부터 이라크전쟁까지 끊임없는 실패와 실수를 저질렀고 이는 지금의 세계적인 테러 현상의 원인을 제공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 자민당과 CIA의 반세기에 걸친 밀월관계,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에 무기를 제공한 CIA의 비밀 공작, 미국의 도움으로 전 세계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재정권의 폭력 행위, 부시 대통령의 이데올로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정보를 왜곡한 이라크전쟁의 진실 등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현대사의 진실을 뒤집는 충격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CIA가 창설된 이후 처음 일어난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에 대한 그들의 한반도 정책은 모두 실패로 거듭된 것들이었고, 저자는 현재의 한반도 위기의 한 원인으로 CIA의 북한에 대한 무지와 잘못된 정보 분석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지만 정작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의 수준은 극히 미미한 형편이고, CIA 내부에 있는 북한 전문가 중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북한 내부사정에 어두우며 특히 북한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서는 접근통로조차 제대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우리는 현재까지도 북한의 징후에 대해 우리 정부가 기대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공식발표이고, 그들의 발표는 우리의 그것보다 더 정확하고, 훌륭하다는 판단 아래 정부는 물론 언론과 학계가 한 목소리로 입을 모은다는게 정말 어의가 없었다. '에이 설마, 정말 그럴까?' 추측이나 억측없이 1차 보고서 및 문서들을 바탕으로 작성했기에 '진실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이 차라리 '거짓이라면 좋겠다'고 바랄 만큼, 알고 있던 사실과 너무 다른 것들이었다.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아직도 그 사실들이 현재진행형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경고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역사상 그 어떤 공화국도 300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미국 역시 만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다면, 즉 원래 CIA가 수행했어야 할 임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강대국이라는 지위에서 언젠가는 밀려날 것이다." (서문중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CIA는 사라지지만 다른 이름의 또 다른 정보기관은 'CIA'의 역사를 통해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만약 CIA가 온전히 미국을 위해 제대로 활동했더라면, 즉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면서 원했던 모습으로 있었더라면, 이 책은 나오지 않았을테고(저자가 쓸 이유가 없다), CIA의 강력한 반대로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젠 종이호랑이가 되어버린 CIA와 정권 교체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에 시의적절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저자의 숨은 의도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결코 석고대죄하며 "우리 미국은 바보였습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상대로 괴롭히고 이용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고해성사하지 않았다. '제대로 잘 했으면 좋았을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이후에 정보기관을 만들거나 속할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권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정보기관도 되지 말 것이며, 개인의 사익을 위하지도 말 것이며, 오로지 미국이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내용과 다름이 아니다. 다시말해' 9.11이 아니었으면 CIA는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까지 세상을 주무르면서 벌인 '불편한 진실'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땅에 테러가 벌어질 만큼 무능력하고 썩은 CIA 였기에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난 해석하고 싶다.
과연 저자는 이 책을 내면서 알게 된 모든 진실을 알렸을까? 그리고 그들은 늘 '진실'만을 추구하는 나라 사람들이기에 언론은 그에게 '수상의 영광'을 줬을까? 과연 그럴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책을 알고, 읽게 된 이상 우리나라가 지금껏 미국의 정보통을 통해 얻어왔던 진실의 경로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 밖에 없다고 한다면, 최소한 전해준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추악한 CIA의 역사'를 생각하며 또 다른 분석의 여지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결코 세계의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미국인들을 겨냥해서 쓴 책이다. 이 책이 나온 이유에는 CIA 보다 더 강력한 정보기관이 출현되어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을 지켜나가는데 일조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것을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실패를 뒤집어 보는 것은 더 나은 미래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역사탐구의 올바른 자세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패'에 대하여 "세계가 알면 우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걱정하며 숨기기에 급급하는데 익숙한 우리가 볼 때는 '미국의 관대함' 또는 '저자의 용감성'에 칭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보다 강한 미국을 만들기 위한 자성의 목소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지껏 당해온 CIA 보다 더욱 강력해진 조직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우리이고, 세계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미국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국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많은 정보의 루트를 새로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이제 정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재확인 되었다. 아니 '제대로 믿어야 할 놈을 믿어도 끝내는 시원찮더라'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역사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믿고서 펼치는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누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 책을 읽고 배우고 느껴야 할 점은 많다. 특히 위정자와 언론, 그리고 학계와 젊은이들이 '역사'란 세상에 들어난 것을 재해석한 것 뿐, 진실은 그림자 속에서 항상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다. 옛말을 따르면 '믿지 못할 놈은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치이거늘, 상종할 수 밖에 없는 우리가 한스러울 따름이다. 앞으로는 '내 네놈에게 또 당할쏘냐?'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상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한숨과 분노와 각오를 안겨준 '불편한 진실'을 담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