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불안과 고통, 현대인이 느끼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
 
  내 연애소설의 시작은 재미있게도 만화였다. 제목은 이현세의 만화 '까치의 오계절'. 중학교 1학년의 따뜻한 봄이었는데, 시간적 부담이 없는 토요일 오후에 직사각의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만화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군것질꺼리를 할 돈을 남겨둬야 하는데, 한 권 한 권 읽다보니 주머니를 털었던 기억,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을 감추려 검정색 교복모자를 푸욱 눌러쓰고 훌쩍거렸던 기억들이 생생하다. '까치의 오계절'은 나를 울린 첫 만화였고, 첫 연애소설이었다. 그 책은 오혜성과 마동탁 그리고 엄지와의 갈등을 이야기한 만화였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때에 '만화가게 대여 1순위의 초고속 베스트셀러'였고,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후문이 있던 책이다. 이 작품으로 이현세는 만화애호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이관용씨의 작품인 '열아홉살의 가을(이청과 조용원이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을 비롯해 박범신씨의 소설과 장총찬이 등장하는 김홍신씨의 '인간시장' 등 시간과 경제력이 허용하는 한 모두 읽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때마침 '사춘기'도 찾아와 알 수 없는 우울한 감정을 털어내려 책에 꾀나 탐닉했던터라 서재에 늘어나는 책의 수량만큼 시험성적은 떨어졌고, 급기야는 추호秋虎 같은 아부지한테 '독서금지령' 처분을 당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통해 '가출'을 고려했던 것도 그때였던 것 같다.
 
  비슷한 스토리에 주인공과 시공간만 바뀌는 '연애소설'은 독자의 나이에 따라 감회는 다른 것 같다. 어릴 땐 '연애란 무엇일까?' 너무나 궁금해 '훔쳐보는 마음'으로 그것을 집어들었고,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주인공의 대사 하나 하나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내가 네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동조하게 된다. 나중에 그것을 집어 들면 '그래 나도 그런 때가 있어봐서 아는데, 그러는게 아니야'라며 충고하게 될까 모르겠다. 무튼 아직도 이야기중에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인 것을 보면 그런 글을 써도 시원찮을 나이가 된 내 스스로가 아직도 부족한 어설프니 같기도 하고, 팔푼이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 하루도 팔푼이가 되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동경만경東京灣景]을 읽었다. 
 
 



 
  소설 [동경만경]은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도 심각하지도 않다. 누구든 보낼 수 잇는 잔잔한 하루의 일상을 평범한 필체로 그려낼 뿐이다. 오히려 나의 하루와도 같은 일상 때문에 편안한 일일 연속극을 한편 본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슴 뭉클하고 애뜻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던 일반적 연애소설과는 다소 밋밋한 연애소설이라 짐짓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것은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동경만경]은 삶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 중에서 가장 행복하기도 하지만 때론 가장 큰 아픔의 기억을 가슴에 남기기도 하는 ‘남녀관계’, 그들의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때론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 자체가 무의미 할 수 있지만 작가는 그곳에 독자들을 초대함으로써 각자 해답을 찾을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입은 사랑의 상처로 사랑에 대한 회의적인 감정을 가진 료스케와 '그가 단지 몸뿐이기를 바란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단지 몸뿐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이질감을 가진 미오. 연애관만 비슷할 뿐 그들이 가진 직업과 삶에선 어떠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그들을 서로 끌리게 만든 것 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너무도 가벼워진 요즘의 남녀관계를 상징하는 한 미팅사이트를 통해 만나게 된다. 료스케는 현재 교재를 하고 있는 애인이 있음에도 빠르게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빠지다' 라는 말과 '탐닉하다' 라는 말은 전혀 다르다.
‘탐닉하다'는 감각적인 문제지만 '빠지다'라는 건 영혼의‘ 문제다. (P 120)
 
  료스케와 미오는 사랑의 감정을 알아가고 싶어 하지만 단지 서로를 탐닉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에게 사랑이란 고통과 외로움, 사랑에 대한 모호함이 주는 혼란스러움을 제공하는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부정할지 모를 그 사랑의 감정에 빠져 들어간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자기 뜻대로 꿈을 이뤄내는 것처럼 정말 대단한 일인 것 같아. 누군가가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ON이 되지 않고 거꾸로 누군가가 그 스위치를 끄지 않으면 OFF가 되지 않는 거지. 좋아하기로 마음먹는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기로 작정한다고 싫어지는 것도 아니고... " (P 153)
 
  도쿄만을 배경으로 잔잔하게 펼쳐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네 삶의 단편적인 삶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인인 그들에게 만남의 계기가 됐던 미팅사이트가 우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 가보지 못한 일본의 알 수 없는 지명들이 주는 답답함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오늘날 온라인에서의 만남이 '우연을 빙자한 필연'이 되었던, '인스턴트 러브'가 되었던 무엇인가 '대화상대가 필요한 두 사람'의 존재가 있음은 어제와 오늘이 매한가지다. 서로가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둘이 만든 세상에는 둘만 존재하니까. 우울한 그들의 잔잔한 이야기 속에 사랑은 무엇일까 라는 인류 최대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살포시 겹쳐있을 뿐이다. 어제의 날씨와 기분에 딱 어울렸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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