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현대 산수화의 대가 이가염
장정란 지음 / 미술문화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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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동적인 힘'을 노래한 산수화가 이가염의 작품세계 ! 
 
  "너, 수업 끝나고 미술실로 오너라." 중학교 2 학년 따뜻한 봄의 어느 날, 미술 수업시간에 넌지시 건낸 미술 선생님의 이 한 마디의  말씀 때문에 난 '한국화'를 알게 되었다. 새로 생긴 중학교에 선배가 있을 턱이 없는데, 석 달 후에 있을 '도내 학생 미술대회'를 위한 '시군구 학생 미술대회'를 위해 우리 학교는 부랴부랴 빈 교실 하나에 미술부를 만들었고, 나를 비롯한 대여섯명을 미술부원으로 뽑힌 것이다. 그 중 내가 맡은 부문은 '한국화'. 말 그대로 동양화라고는 '화투장' 밖에는 모르는 완전 '초급'이 급조되어 졸지에 붓을 잡게 된 것이다. "한국화의 기본은 동양화요, 동양화의 생명은 여백이다."는 말씀과 함께 건내신 것은 중국 현대 산수화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이가염 선생님의 그림 몇 장이었다. 그리고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대로 보고 베껴라." 달력 그림 몇 장, 이것이 나와 이가염 선생의 첫 조우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미술선생님의 전공분야는 '유화'셨다. 여백이 생기면 절대로 안되는 미술분야를 전공하신 선생님이 내게 한국화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력도 되지 않는 먹물 값도 못하는 그림이지만, 하루에 다섯 장씩 베껴서 검사를 받아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붓을 잡고 선을 그리는 것도 쉽지 않던 내가 두 달여를 그렇게 하자, 화선지에 얼핏 산도 보이는 것 같고, 초라하지만 나무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출전한 '시 대회'의 성적은 2위. 세 명 출전해 두 번째가 된 것이다. 그 해 도대회에서는 거의 모두가 받는 '입선'도 받았고, 그 다음해에는 꽤 많은 학생들 가운데 운 좋게도 '금상'을 받게 되었다. 동양화를 전공하신 선생님이 계신 1시간 거리의 여고를 매주 '과외수업'을 받게 해주신 유화전공의 미술선생님 덕분이었다. 그림 실력은 여전히 베끼는 수준이었지만, 먹향을 좋아하게 되었고, 붓의 날림과 먹빛 가득한 그림 속 여백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이 인연이 되고 그것들이 좋아서 지금도 '한국화'를 보러 다닌다. 흐린 주말이면 어김없이 인사동을 찾아 점포 한 곳 한 곳 뒤지듯 그림쳐다보는 맛을 즐긴다. 딱히 흐린 날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리창 넘어 멀찌기서 봐야하기 때문에, 맑고 푸른 날은 선과 색이 진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흐리거나 비오는 날은 인사동에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더 이상 '지겨운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 때가 오면 또 다시 붓을 잡으리라 마음을 먹고 있는데, 그 때까지는 '보는 맛'으로나마 위안을 삼으려 노력 중이다. 오늘 소개하는 책, 장정란의 [중국 현대 산수화 대가, 이가염]은 그런 나를 위로한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가염의 이강산수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정란씨가 십년 전 북경의 서비홍 기념관에 있는 이가염의 인물화와 소 그림을 보고 마치 중국화된 마티스를 보는 기분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서 그에 대해 연구를 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책이다. 그녀의 이가염에 대한 의문은 하나였다. "왜 이렇게 검게 그러야 했을까? 묵에 대한 찬미인가, 절망인가?" 서구문물의 많은 유입으로 용도폐기 되었던 '산수화'가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그려내어 인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이가염의 산수화가 있다. 전국의 명산대천을 어행하고 사생하면서 그려낸 그의 산수느 인민들이 살고 있는, 인민을 키워내는 생활 속의 산수화이다. 그가 그려내는 산과 기세 넘치는 폭포들, 기이하고 환상적인 구름과 안개는 그가 바라보는 조국의 웅장한 기상이었다. 어릴 적 동양화를 처음 만났을 때, 베끼던 그의 달력 그림 산수화는 사람사는 집과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었던 생활산수 몇 점이었다. 이 책 속에서 만나는 그의 산수들은 내가 보고 상상했던 그 이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장관들을 보여주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중국 근대산수화의 동향, 이가염의 회화관, 대단한 정신과 화법의 이가염, 수묵으로 연주한 산수의 세계(이강산수)로 구분된다. 중국 근대산수화의 동향에서는 서비홍, 고검부, 임풍면, 유해속 등의 개혁파와 황빈홍, 반천수, 부포석 의 전통파 들을 작품을 소개하며 작품속에서 말한 두 파벌의 갈등을 이야기해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 놀랍고 기함하는 작품들을 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그림은 정감이고, 생활의 반영이다."고 말한 이가염의 화론을 이야기한 이가염의 회화관 역시 그의 작품이 있게 한 이가염의 역사와 생각을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산수화들은 검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그의 묵접은 적묵(묵을 쌓는 것)이 주류인데, 이것은 근대화단의 황빈홍이 연구한 전통적인 묵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원으로 본 웅장한 산들의 모습이나 대소로 운용되는 경물들의 배치, 특히 산수를 치밀하게 탐구하는 자세는 곽희의 작화태도를 본받았다고 말한다. 이가염에 있어서 산수화는 조국을 그리는 것이고, 검고 검은 묵색은 쌓고 또 쌓아가는 혁명정신과 같은데, 혹자는 그런 그의 작품들이 사회주의적 산물이라고 하지만 전통산수화가 지닌 완벽한 필묵의 아름다움과 이 시대의 현장성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화면을 창출해 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이가염의 회화사적 공로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자신의 이름보다는 의미있는 단어나 글귀들을 즐겨 사용한 이가염의 수집 종에 달하는 인장들을 보고, 읽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소牛를 즐겨 그렸던 그가 '사우당師牛堂' 즉, '소에게 배우는 집'이라 하여 소의 희생정신을 높이 샀는가 하면, '일일학지사日日學之始' 라 하여 '날마다 처음 배운다는 자세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식결재識缺齋' 역시 '결점을 아는 서재'라 하여 자신의 결점을 알아야 진보할수 있다, '스스로 결점이 많은 사람임을 언제나 자각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언젠가 꾸밀 서재의 이름을 이가염 선생의 인장의 말을 빌어 '식결재識缺齋' 로 해야겠다는 생각했다. 그의 산수를 대표하는 인장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산수지음山水知音'이 그것이다. 그는 산수를 말하면서 전체적인 흐름과 작품속에서 '음악'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는데, 그것을 아우르는 인장의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훌륭한 인장 속의 단어와 글귀들을 통해 동양화라는 것은 그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화가의 생각과 사상과 음악적 상상들이 그림으로, 글로, 작은 인장으로까지 표현된 '종합예술'임을 알게 한다.
 




































  이 책의 백미는 제 2부 이가염이 이룩한 현대 산수화 이다. 대담한 정신과 화법으로 표현된 이가염선생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게 되는데, 전통의 정신을 이어서 배우는 학습시대와, 자유로운 개성을 연출하여 다양한 화법을 시도하는 사생시대, 그만의 화풍이 굳건하게 만들어지는 완성시대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가염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이강산수' 편은 따로 두어 이강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수십년 간의 그의 작품들을 따로 감상할 수 있게 해 두었다. 이가염선생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었다. 특히 번역작이 아니라 십수 년간 그를 연구한 우리 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작품집이라 이해 면에서 공감하는데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알랭 드 보통이 쓴 책 [여행의 기술] 에서 그는 '진정한 여행의 참맛은 실제로 여행을 통해 여정 속에 생긴 복잡다난함을 경험하면서 도착한 여행지에서 느끼는 맛보다는 그런 것들이 모두 걸러진 후 여행지에 집중한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진, 그림을 보면서 상상하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책을 보고 읽으면서 느끼는 내 기분이 그랬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지고 만끽하면서 중국의 어느 미술관에 온 듯, 감히 이가염 선생을 가이드삼아 중국을 여행하고, 이강에서 머물며 풍류를 즐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어제 읽은 '옛시읽는 CEO'를 읽은 탓일까? 그림을 보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 시를 짓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게 한다. 이제 막 찾아온 서늘한 가을 주말을 만끽하게 한 정말 멋지고 훌륭한 작품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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