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콘과 코드 - 그림으로 읽는 동아시아 미학범주
임태승 지음 / 미술문화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이젠 그림을 느끼지만 말고, 아이콘과 코드를 읽어라!
 
  그림이라고는 동그라미와 막대기의 조합으로 이뤄진 사람밖에 몰랐던 내가 '사람을 사람답게 그리게 된 때'는 초등학교 4학년, 그림 잘 그리는 짝꿍을 만나면서부터다. 내 그림이 벽에 흰 분필로 그려진 낙서라면 짝꿍의 그림은 원근감이 살아있는 3차원의 작품에 가까웠다. 짝꿍은 공부를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나보다는 잘 하지만) 그림만큼은 우리 학교 최고여서 고학년의 선배들을 물리치고 학교대표로 그림그리기 대회를 나갔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월요일 조회시간에 제 키만한 트로피와 상장을 받아들곤 했다. 당시 내가 바라보는 짝꿍의 모습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요, 그림과 색칠을 해대는 손은 피카소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모를 정도로 빠르게, 멋지게 그려냈다. 흰 백의 도화지에 마치 녀석에게만 보이는 점선이 있는 양 재보지도 않고 스윽스윽 그려대는가 하면, 하늘을 그릴 때도 보라색과 노란색을 섞어서는 구름이 튀어나올 듯, 햇살에 살이 델 듯 그려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초등학교 4학년은 매주 한 두차례 있는 미술시간에 짝꿍 그림을 보고, 가당찮지만 녀석의 그림을 흉내내는 재미로 보낸 것 같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짝꿍의 그림감상의 힘인지, 집에서 하루 한 시간씩 소년잡지에 습자지를 대고 덧그림을 그린 덕이었는지, 제법 그림을 그리게 되어 3학년 까지 '양'이었던 미술 성적은 4학년엔 '미'를 그리고 졸업반이 되어서는 난생 처음 '수'를 받게 되었다. 자신이 붙어 중학시절엔 실력도 없으면서 미술반을 들게 되었는데,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동양화 부문에 학생이 필요했던 때문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미술반에서 나의 '동양(한국)화 사랑'이 시작되었다. 맹물이 뭍어나도 티가 나는 얇은 화선지, 수백가지 농담을 낼 수 있는 검은 먹물, 그리고 굵디 굵은 붓의 조합. 그것에 의해 산과 바다, 강이 태어나고, 사람이 태어나며, 자연이 태어났다. 농담의 그윽함과 여백의 여운에 넋을 빼앗겨 동양화에 푸욱 빠질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미술반에서 동양화반에 있었지만, 대학까지는 전공으로 할 수 없었다. 실력도 없거니와 '돈되는 과를 선택하라'는 추호秋虎 같은 아버지의 엄명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회비용에 대한 미련은 항상 남아서인지 지금도 한가한 주말이면 인사동의 갤러리를 돌며 한 폭의 화선지에 담긴 세계를 훔쳐보곤 한다. 나이먹어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될 나이가 되면, 채 마치지 못한 동양화에 전념하는 것이 내 노년의 작은 소망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이 책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동양화와 한국화의 명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와 그것이 뜻하는 깊은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소개하는 책은 중국철학과 미학을 전공한 철학과 교수 임태승님의 [아이콘과 코드] 다.
 
 


   
  우리가 흔히 그림을 즐긴다고 하는 것은 선과 색 그리고 구도적 관점에서의 회화를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가의 고유한 풍격이나 시대사조 혹은 유파등을 고려해 그것을 즐긴다. 하지만 이것들이 때로는그림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목에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림을 느끼려고만 했지, 그림이 담고 이쓴 의미나 그림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소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동아시아 예술 자체의 과학적 원리로써 그림을 마주하고 이해하는 방법으로 회화의 진정한 맛을 다시 발견하자는 일종의 제안에서 이 책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림을 단순히 보지 않고 '뜻을 표현하는 과학'으로 보고 사의화寫意畵의 과학, 즉 아이콘과 코드라는 두 요소의 조합이라는 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 그림이라고 보았다.
 
 그림 속의 아이콘이란 화면 속에 나타나는 개별적 요소들 즉 산, 물, 사람, 집, 정자, 다리, 배, 폭포, 바람, 달, 구름, 안개, 눈, 비, 바위, 나무, 꽃, 새, 동물, 곤충, 악기 등을 말하고, 이러한 각각의 아이콘이 담고 있는 의미 혹은 메시지를 코드라고 저자는 보았다. 그래서 저자는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이콘과 코드가 합쳐진 그림의 퍼즐게임에서 그 조합의 원리를 알면 간단하고 명쾌하게 작품의 감상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신(傳神) - 뺨 위의 터럭 세 끝이 말해주는 것
품격(品格) - 세밀한 기교로부터 꾸밈없는 투박함까지
교졸(巧拙) - 아름다움의 두 느낌, 달콤함 혹은 망설임
허실(虛實) - 서로 품기고 보듬는 시적 공간의 유희
의경(意境) - 내 마음과 세상 물상의 그윽한 만남
낙유(樂游) - 즐거움 자유 초월의 두 가지 색깔
적(適) - 넉넉하고 홀가분하며 편안한 자유로움
비덕(比德) - 예술을 모방하는 삶과 자연
동정(動靜) - 흐르는 물은 하나요, 바라보는 정감은 두 가지
추악(醜惡) - 못나고 못된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
 
 

 

 

 

 

 

 
 동아시아 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필수적인 범주들인 위의 열 두가지 범주들은 서로 연결되고 상호 보충되는데, 각 범주 속에 나타나는 작품들을 들여다 보고 있자면 왜 그 속에 속했는지,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그림 하나 하나가 절대로 허전한 빈 칸을 채우고자 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책 속에서는 정말 그림을 보는 것 뿐 아니라, 읽는 것이 가능했었다. 작품마다 동양철학과 미학에 정통한 작가의 해설과 그 속에 담긴 아이콘과 코드의 숨은 그림 찾기는 '신선한 그림읽기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저자의 글을 읽기 전 한참을 뜯어본 '내가 본 작품'과 저자의 설명이 곁들여진 후 들여다 본 '미학적 관점의 작품'은 온전히 하나를 놓고 본 것인데도 그 격을 달리 했다. '정말 과연 그럴까?' 하는 의아함도 없잖았지만, 얕은 내공의 내가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림없었다. 그저 들려주는 듯 배우며 즐기기에도 바빴다. 그에 대한 해석은 순전히 작품을 즐기는 자의 몫이라 이야기들 하지만, 동양화는 단순히 느끼기만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뜻과 의미를 담고 있지 않던가? 이제는 한 편의 작품을 보더라도 오래도록 지켜보며 전보다는 더 많이 그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6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도 선정된 이 책의 속에 있는 작품만을 저자의 설명에 따라 눈으로 보고 머리로 그 뜻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값을 할 수 있는 책이었다.
 
  최근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문화적 수준이 향상되었다기 보다는 '투자수단'으로 그 관심이 쏠려 씁쓸하긴 하지만,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의 기준은 결국 값어치라고 볼 때 '국민소득 대비 문화맹'에 가까운 국민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되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좋은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하는 법. 미술품투자에 관심을 둔다면 전문가의 평가나 소문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찾아 배워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을 이 책으로 한다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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