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박주영 옮김, 김복영 감수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성장소설'의 진수를 보여주는 풋풋하지만 무게감 있는 책!
 
  주위에 그런 사람, 꼭 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이 특출나고, 월등해서 무엇이든 경합이 있는 장소에는 그 사람이 빠지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 능력뿐 아니라 성격도 좋아서 만인의 호감을 부리고, 그와 함께 있으면 손오공이 제 머리털로 복제를 해대는 환공술처럼 그의 그림자 속에는 또 다른 그가 족히 100명은 숨어 있는 듯 너무나 당당하고 도도해 보이는 사람. 감히 그와 견줄려고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그와 함께만 있어도 좋겠다고 여기게끔 만드는 그는 요즘 말로 풍겨져 나오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지닌 멋진 사람이 주위에 꼭 있다. 지금이야 주위를 둘러 볼 시간조차 없을 만큼 제 깜량을 채우느라 바빠서 모르지만, 깃털같이 많은 시간이 할애된 어린 시절에는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그들을 일러 '인물人物'이라 불렀다.
 
  본교수업과 보충수업 그리고 야간자율학습으로 빡빡한 하루일정을 채워나가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야말로 펜을 들고 잠을 자야 마음이 편할 만큼 오로지 '공부'만 허락된 생활이었다. 꼴찌로 들어간 학교가 공교롭게도 제 동네에서 공부꽤나 한다는 일명 '수재'들이 몰려든 학교라 예상치 않은 학교생활은 '지옥같은 현실' 그 자체였다. 나는 M- T- M이란 책이 영문법에 관한 책이란 걸 입학하고 처음 알았는데, [정석 수학]과 함께 입학고사을 치뤘다 하니 두말 하면 입아프다(입학고사가 있는 것 조차 모르고 놀다가 입학한 터라 680명 정원에 648등을 했으니, 내 뒤에 누가 있다는 것조차 신기할 따름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 단어외우랴 숙어외우랴, 수학공식외우랴 머리에 스팀이 날 정도로 책에 박혀 있던 내게 "야~ 난 너처럼 공부하면 당장이라도 서울대 들어가겠다." 며 멋진 미소로 말을 걸어온 녀석은 '인물'이었다. 중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고, 고등학교 입학식때 입학선서를 한 녀석. 공부가 되는 때는 사흘을 밤을 새우고, 안될 때는 하루종일도 잠을 자는, 수학공식을 머리로 풀이하느라 집에서 학교까지의 40분 거리를 걸어다녔던 녀석. 그는 항상 1등이었고, 전교에서도 세 손가락안에 항상 드는 녀석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새로운 영화를 보기 위해 세 시간 동안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주말이면 공룡능선을 타고 설악산을 올라 산장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 괴짜기도 했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의 행동과 발언은 마치 외교관의 치외법권을 지니고 있는 양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몰래 숨어들어 화학실험을 한답시고, 과학실에 불을 낼 때에도 에디슨과 아이슈타인도 그랬을 거라며 교장선생님이 오히려 칭찬을 했다는 후문과 청소시간에 유리창을 깨끗이 닦으려다 2층에서 떨어진 내게는 오히려 일주일의 유기정학을 먹인 사실을 비교하면 그와 나와의 거리는 상당함을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그가 저지르는 사건 사고의 배후에는 내가 숨어있었고, 그의 그림자 속에 숨겨진 나는 '체벌'을 피할 수 있었다.  
 
  하루 세 끼 같은 밥을 먹고, 비슷한 시간만큼 잠을 자고, 뇌의 용량도 그리 차이나지 않은 듯(내용물에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그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한 때는 그와 똑같이 행동을 같이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그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인간실험이었는데, 참 어리석은 발상이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는 다른 별의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판단할 즈음 우리는 반이 갈리고 대학입학을 위해 가열찬 투쟁(?)을 해야 했던 터라 입시일이 가까울수록 기억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옅어져 갔다. 3학년이 한창일 즈음이었나 보다. '참교육'을 외치는 '전교조'가 생기고, 이를 저지하려는 정부와 그에 맞서는 선생님, 학생들 이야기로 학교는 오일장마냥 시끄러웠다. 나의 '인물'이라는 친구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수업을 거부하는가 하면 학교기물을 파손하여 유기정학을 먹더니 스스로 '자체방학'을 만들어서는 설악산에 한 달여를 숨어버렸다. 그와 함께 해야 했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지만, 당장의 현실로 닥쳐온 '대학입학고사'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 도봉산을 보고 100일 기도를 하신다는 어머니의 소식이 내 몸뚱이 마저 잡아버렸다.
 
  기특하게도 가까스로 대학에 합격하고 새내기 대동제를 준비할 즈음, '인물'은 서울대에 낙방하고, 후기대학을 들어가서는 '운동권', 그것도 '국가대표급 운동권 선수'가 되어 경찰과 형사들을 뒤로 하고 전국을 도망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는데, '철렁거리는 가슴'과 '야릇하게 미소짓는 내 모습'을 감지하게 디었다. 이전의 것이 제일 친했던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나의 반응이었다면, 그 뒤의 것은 그에 대한 내 기억에서 '인물'이라는 뱃지를 떼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한 편의 기쁨일까? 순간 나에 대해 온 몸에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나의 음흉함. 그것이 내가 접한 나의 이중성에 모멸감을 느낀 때는 아마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신껏 옳은 일을 위해 청춘을 불사르는 그를 두고, 단지 도망자라는 이유로 '시대가 낳은 사생아'가 되어버린 그를 두고 안도해 했던 나를 두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고, 그 때 느꼈던 나의 이중성이 '야수성'은 아닐지 의문을 던지게 한 책이 [분리된 평화] 원제, A Separate peace 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미국의 어느 도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는 듯 활기찬 학교, 데번 스쿨에서 '인물'은 피니어스였고, 책 속의 화자인 '나'와 '내'는 큰 차이가 없다. 인물과 나 그리고 한 떼의 무리들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우정과 비밀, 경쟁과 공감, 그리고 배신과 속죄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옛날 지구 반대편의 서양아이들의 이야기가 이나라에 사는 그 옛날의 내 이야기 같아 마음을 졸인다. 차마 기억하지 못했고,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내가 감정이 이 책의 '나'가 아니었을까, 내가 느꼈던 이중의 감정은 정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야수성'이었을까 고민하게 했다. 살아온 날과 살 날의 중간에 있는 내가 '성장소설'에 눈과 마음을 던진 것은 어쩌면 더욱 더 기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나의 옛날을 더듬고 싶어서였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나를 살펴보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인물'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가 궁금해졌다. 올해 가을에는 동문회라는 곳을 찾아가 봐야겠다. 그래서 그 시절의 '인물'이 보이걸랑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 그는 왜 그런지 영문도 몰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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