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처음보는 분위기의 특이하고 멋진 독서기讀書記 !
 
 
  책을 읽게 되면서 생긴 않좋은 버릇이 한 가지있는데, 그것은 질투다. 마치 말로는 차마 다 할 수 없는 생각과 알게 된 무엇을 쏟아붓는 듯 종이에 빽빽하게 새겨놓은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배움과 깨달음을 경험함과 동시에 '그들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는 의문과 가능하다면 그 속을 들여다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황금알을 품는 거위처럼 그 속은 여느 장기臟器 와 다를 바 없음을 뻔히 알지만, 그것만은 나도 알지만 말 그대로 멋진 책을 만나면 항상 느끼는 않좋은 버릇이다.
 
  좋은 책을 쓰는 그들은 날 때부터 재능이 특출했을까?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잘 배운 것일까? 그들은 무슨 책을 읽고, 어떻게 책을 읽을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멋진 말을 만들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흔드는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이 멋들어진 책을 만날 때면 책 속에 거는 혼자만의 독백이었다. 최소한 그들의 서재만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그들을 짐작할 수 있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사람(그 깊이와 정도는 확실히 차이가 나지만)을 만났다. 나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직접 그들을 파헤쳤다. 하지만 그녀 또한 파헤쳐져야 할 또 다른 대단한 독서가다. 생각하며 살아가기 위해 책을 읽는지, 책을 읽기 위해 살아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책과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 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따라 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 듣기, 책이 알려주는 장소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등 '책 행동학'을 즐기며 사는 여인, 정혜윤이다. 침대의 가장자리 네 켠에 책을 꼽아 놓고는 손가는 대로, 닥치는대로 읽으며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의 [침대와 책]이라는 책을 이미 쓴 바 있는 그녀가 이번에는 독서가로 알려진 어떤 이들을 찾아가 그들을 만나 이들의 삶에서 책과 조우했던 순간들의 이야기를 담아 또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침대와 책]에서 그녀와 함께 했고, 지금도 함께 하는 책들의 이야기로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면 이 책은 사람과 책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엮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책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제목 스스로가 책의 서문을 대신하는 듯 하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가 그것이다.
 


 
  이 책은 특별한 독서기다.
 지금껏 나온 여느 독서기와는 다르다. 완전 다르다. 한 순간을 '성공'이라는 한 단어(자화자찬의 성공이라면 절대로 쓸 데 없고, 타화타찬의 그것이라봐야 1분의 가십꺼리가 '성공'이 아니던가? 세치 혀를 통해 나오는 순간 그것은 빛이 바래는, 그래서 성공이란 단어는 스스로건 타인이건 절대로 세상에 나오면 안되는, 머리속에서 느껴지는 단어인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처럼..) 로 뭉뚱거려진 몇 몇의 인물들을 싸잡아 '나의 성공에는 이러이러한 책이 있었다' 혹은 '최근에 읽은 책은 이러이러하다'고 마구 적어놔 독자를 유린하는 것들과 다르다. 
게다가 녹취록 또한 아니다. 세간의 입에 떠오르는 '화제의 인물'을 찾아 그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받아적는 글로 읽는 인터뷰 또한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의 본업은 라디오 교양프로그램의 프로듀서. 특히 [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하고 있다. 아마도 멋진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책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도 책을 좋아한 만큼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도 만난 적이 있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하지만 인터뷰라는 [듣기위주의 일방적인 대화형식]때문에 자신의 소회는 말하지 못했으리라. 그 소회가 쌓이고 쌓여 병이 되었을까? 이 책에서는 인물들의 이야기중에 언급되는 책 속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책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 속에서 나는 듣지도 보지 못한 수많은 책들이 소개되는데(정말이지 난 서점에서 그 책을 온전히 내 힘으로 찾으라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언급된 생소한 이름의 책속에 있는 글귀들은 멋들어지고, 아름답다. 그들이 그리고 그녀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추억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이 책은 특이한 평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은 어떤 이의 인생을 책으로 엮어본 작은 전기 정도가 될 것 같다'고 고백한 것 같이 단순한 독서기는 아니다.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그리고 저자 11 명인 듯 12명이 자신의 삶을 둘러보고 그 순간에 함께 했던 책과 책 이야기를 엮었다. 한 권의 책이 그들의 인생을 바꾸기도 했고,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계기를 던져주기도 했고, 지금의 자신이 있게 했던 책들도 있었다. 평범한 듯 비범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을 새로 고쳐보고, 새로 알아보게도 했다. 무엇인가 이루고 있는 그들의 삶에 함께 동반하고 있는 책들을 만나는 경험은 특별했다. 특히 군인에게 총알일 수 있는 글쓰는 작가들이 말하는 그들이 사랑한 책이란,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작가와 글귀를 만나기란 그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행운이겠다 싶다. 내게는 행동하는 지식인 진중권을, 그리고 사랑하는 명배우 문소리를 다시 보게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책 혹은 책읽기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제대로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지금껏 먼 산 보듯 그림 훑듯 종이에 새겨진 활자를 눈으로 찍었던 것은 아닐까? 책을 읽는다고 하면서 오롯이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제대로 읽는 Reading하지 못하고 눈으로만 쫓아 단순히 Seeing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지금껏 즐겨왔다고 여겼던 책읽기를 돌아보게 한다. 책 속의 숨겨진 주옥같은 글귀를 기억하고, 저자의 전작全作을 쫓아 그들의 그림자를 따라 밟기도 하고,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으며 온몸으로 체감할 줄 아는 그들이야말로 '책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그들의 소중한 인터뷰 대화들을 약간은 숨겨진 듯 뭍은 듯 반짝거리는 빛을 발하는 은빛으로 담았다. 이야기의 무게에 대한 그녀만의 예우로 느껴졌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글귀를 옮겨적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한 권을 모두 옮겨적어야 할 판국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들이 뱉어낸 이미 읽고 소화해 낸 한 권의 책들이 내게는 앞으로 읽고 싶은 180여 권의 화두頭 로 남겨졌다(210여 권의 책중에서 읽은 것이라곤 20여 남짓. 그것도 동화와 최근의 책들 뿐이었다. 이 책들은 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었던가?).
 
  "책을 읽기는 하는데, 머리속에 남은 것 같지도 않고...어떤 때는 읽었던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조금 읽는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이 책에서 만난 이들의 글을 보니 숨이 턱 막힌다. 과연 그들이 인터뷰 속에서 이렇듯 책을 말하고, 소중한 글귀들을 읊조렸단 말인가? 그리고 저자는 그들의 말에 꼬리를 물고 또 이 책과 같은 생각을 했단 말인가?
 20여 년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복성고조를 보면 주인공 성룡과 원표가 어마어마한 적을 만나 열심히 싸웠지만, 무참하게 매를 맞는다. 뒤로 물러나 서로 어깨를 마주하고 적을 보며 원표가 말한다. "저놈, 고수다." 그러자 성룡이 말한다. "아냐, 고고수야." 그러자 둘은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합창한다. "토끼자(도망가자) !" 지금 내 마음이 그와 같다. 이것은 서점에 들렀을 때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은 10년 전과 똑같이 아직도 많구나' 하는 중압감과는 또 다르다. 뒷걸음치며 도망가고 싶다. 그래서 다시 처음 책을 뽑아든 그때로 돌아가 책을 읽고 싶다. 한 권의 책을 만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이 말하는 책에서 또 다른 책을 배우고, 저자가 펼치는 이야기 중에서 책읽기의 참맛을 느끼게 되었다.
 
P.S : 저자인 정혜윤 님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어느 도서행사의 공식석상이지만, 그녀는 특별히 초대되었기에 식전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터라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청자빛의 무릎 짧은 원피스와 귀여운 모자가 그녀의 모습과 참 어울렸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운치있는 책 표지를 주목하니 랜턴에 비친 책을 무릎을 앉고 쳐다보고 있는 소녀가 아마 저자인 듯 싶다. 표지속 인물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책을 많이 읽는 그녀는 말도 잘하고 책 속의 소녀만큼 미인이었다. 그녀는 많은복을 받은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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