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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의 다카포
호란 지음, 밥장 그림 / 마음산책 / 2008년 3월
평점 :
책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을 알려준 책리뷰 고수 [호란] !
가수 '호란'이라는 이름을 알기는 공교롭게도 어느 남성잡지에 매달 실리는 컬럼에서였다. 최신의 트렌드와 문화의 선두주자임을 앞다투어 자랑하는 매체들임에도 카탈로그를 보는 듯한 광고와 패션 일색의 내용에서 책에 대한 대접은 한페이지에 대여섯 권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정도. 그나마 소개해 주는 것만도 어딘가 싶을 정도다. 게다가 '이 책을 읽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의 성의없는 책소개는 오히려 책을 고르기에 반감을 가질 만큼이다. 패션잡지에서 좋은 책을 소개받기란 어쩌면 '우물에서 숭늉찾기 인지도 모른다'고 위로하면서도 항상 마득찮은 감을 버리지 못하던 터였다.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남성잡지(매월 멋들어진 몸매를 자랑하는 남자 연예인을 표지모델로 하는 잡지여서 오히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후문이 있다)임에도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한다는 이 잡지의 뒷부분을 보면 한 권의 책(주로 소설)을 소개하고, 한 페이지 가득 '화려한 리뷰'를 만날 수 있는데, 그 리뷰를 쓰는 이가 '호란'이었다. 영화나 IT제품의 리뷰를 본 적은 많았지만, 신문의 주말판 별지에서 보도자료를 보고 베낀 듯, 기자의 이름만 빌린 듯 확인불가해 감히 '리뷰'라 말하기 어려운 것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펜을 가지고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사람이 독자로서 책을 읽고 제대로 써 내려간 '어른의 독후감'을 만나기는 처음인 듯 했다. 특히 가수라는 그녀의 직업을 알고 난 후엔 '입만 살아있는 치들'로 여겨왔던 나의 연예인에 대한 편견 또한 제동을 걸게 했던,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치 '책'이라는 풀장에 푸욱 빠져서 마음꺼 헤엄치다 나온 듯 그녀의 리뷰를 읽노라면 책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과 느낌을 알 듯 하고, 그녀가 풀어놓은 책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듣노라면 그녀가 헤엄쳤던 풀장의 물은 진탕 헤엄을 쳐서 모두 밖으로 튕겨버렸던, 모두 마셔버렸던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을 것처럼 모두 흡수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읽고 난 책을 다시 편다면 무제 연습장처럼 활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리라...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리뷰를 읽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고, 내가 읽은 책에 대해 나의 생각을 담아 글을 쓴다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녀의 책을 읽고 이렇게 리뷰를 쓰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녀의 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책 [호란의 다카포]의 책출간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책이었음에도 몇 권의 책을 통해 만나는 작가를 만나는 듯 익숙하고 반가웠다. 정방형에 가까운 핸디사이즈의 크기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과 즐거움 그리고 책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 책의 내용이 압권이었다. 가수인 그녀가 생각하는 음악과 음악하는 즐거움에서는 '천직을 만난 사람의 행복감'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듯했고,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재능'에 부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미 남성잡지에서 읽은 바 있는 그녀의 리뷰는 덧대어 'p.s.'라고 해서 칼럼에서 못다한 책 속 이야기와 느낌을 만날 수 있었다.
"홍대 구석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다듬으며,
가끔 한 번씩 스트레칭을 해주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행복했다.
다카포. 처음으로.
나의 오랜 혼자놀기의 산물인 책 이야기들"
이 책을 쓰게된 이유와 과정, 그리고 제목을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같이 즐길 시간은 부족한데, 무엇이든 원하면 얻을 수 있는 '유혹많은 세상'에서 '한 권의 책을 읽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오죽하면 책이 제 모습을 버리고 '컨텐츠'만 빠져서는 유체이탈해서 e-book에 담기겠는가?) 하물며 내가 읽은 책에 대해 그 감상을 '리뷰'나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큰 맘 먹지 않으면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즐거울 수 있다면' 가능해진다. 책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나에게 '딱'맞는 책을 만나고, 그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무심하게 책꽂이에 꼽기는 너무 '헛헛'하다. 누군가에게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 책을 통해 얻은 느낌을 말하고 싶을 때, 하지만 딱히 그런 상대가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못할 때 '책리뷰'가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읽은 책 목록'이 아니라 허접하지만 개인적으로 소중한 '독서노트'가 될 수 있다. 얼마전 어느 행사에서 소설가 김영하씨는 '책리뷰를 쓴다는 것은 책과 자신의 마음을 한데 어울리게 해서 새로이 만들어지는 또 한 권의 책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만의 혼자놀기 산물이었던 책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이 되었고, 또 다른 책읽기라는 혼자놀이를 즐기는 이들에게 선물이 되었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산모의 산고産苦만큼이나 괴로운 것이라고들 하지만 그녀는, 그녀만큼은 즐겁고 행복한 작업이었으리라.
야릇한 이름, 몽환적인 노래의 음색만큼이나 느낌있는 글들이 가득찬 책이다. 솔직 담백하고 당당한 그녀의 글에서 간혹 독자를 의식해서 무언가를 부연하고 해명하는 식의 글을 만난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연예인으로서의 그녀를 만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그녀를 만나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강호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림고수들의 존재를 '뒤통수 한구석에 묵직하게 의식'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녀가 이미 고수임을 내게 확인시켜주는 시금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 다시 그녀가 책을 낸다면 난 기꺼이 그 책을 찾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