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땐 이 와인 - 40가지, 상황별 추천, 와인 가이드
이재형 지음 / 코코넛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맛있는 요리, 반가운 사람, 기쁜 선물에 어울리는 최고의 와인리스트를 공개한 책!
 
 
  고등학교 삼 년을 홀로 강릉에서 보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부모를 떠나 멀리 지방에서 황금같은 학창시절을 보냈으니 떨어지는 성적만 빼고는 문제될 것이 없는 말 그대로 '화려한 인생' 그 자체였던 시였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어머니가 정한 하숙집에서 머물러 있었지만, 입학한 후 3개월쯤 지나자 학교생활도 익숙해지고 도시도 익숙해졌고, 싸이클을 타고 10분 거리에서 통학을 했었는데, 한 20분 정도를 더 가면 경포대 해수욕장이 있다는 걸 반에서 친하게 된 구섭이한테 알게 된 때도 그 무렵이었다.
  한 학기를 보내고 뜻이 맞는 동기 두명과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모대학 불문과 교수님이 아버지였던 구섭이가 주말에 집에 들렀다가 제자가 외국에서 가져온 와인을 몰래 가방에 숨켜왔다. 스크류를 알지도 못했던터라 젓가락으로 코르크를 파내어 구멍을 내려고 하다가 코르크와 부서진 조각들을 병속에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살짝 기울여서 '쪼르르륵~' 소리를 내며 떨어져야 할 향기나는 피빛 액체가 꺼꾸러질 만큼 세워도 '꿀럭'대며 코르크 가루와 함께 토해지는 것이 웃음도 나지 않지 않았다.  코르크 가루를 '퇴~퇴' 뱉어가며 마셨던 시큼털털하고 단 듯 쓴 듯 기묘한 맛은 어찌나 요상하던지. 셋이 10분도 채 안되 와인으로 세수한 듯 빨개진 얼굴을 하고선 방바닥에 누워 천정을 보며 낄낄거렸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가 처음으로 맛 본 와인이었다. 병에는 큼지막한 종이가 붙어있었는데, 대문자로 써진 MEDOC 이란 글씨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항상 웃는 얼굴이셨다. 평소에는 말씀도 없으시고 표현도 잘 안하시던 분인데 가끔 술을 드시면 세상에서 가장 편한 미소로 귀가하셨다. 누런 봉투에 군만두나 찐빵을 사오시거나, 군고구마나 귀하던 귤을 사오시기도 했다. 그리고 자던 아이들(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나의 삼촌,이모들)을 깨워서는 식을라 맛없어질라 한입 가득 먹이며 지갑이 빈털털이가 되도록 용돈을 주셨다. 머리를 쓰다듬고 뽀뽀를 하시고 '아끼시는 모습'이 어린 내가 봤을 때도 보기 좋았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얘들아~~~'부르시고는 지갑이 빈 줄 알면 호랑이같은 아내에게 혼난다시며 평소때 용돈보다는 약간 많이 남기시고 전날 밤 주셨던 돈을 다시 빼았는다고 삼촌들은 투덜댔지만, 술드시고 귀가하시는 할아버지의 붉은 얼굴에 귀에 걸린 미소를 하신 술취한 외할아버지가 난 보기좋았다. 그래선가보다. 난 술을 마시면 즐거워진다. 아니 즐겁지 않으면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내 경우엔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열 배는 더 않좋아지는 듯 해서 몇 번 하다가 그만두었다. 하지만 즐거우면 술을 마신다. 비를 좋아해 비가 오면 즐거워지니까 술을 마시고, 영화를 좋아하니 영화를 보면서 혼자 술을 마신다. 대낮에 이런 경우를 만나면 술대신 커피로 대체되긴 하지만.
 
 
 
 
 
 
 
  술을 즐기면서도 실상은 술맛을 잘 모른다. 소주맛도 제조사마다 차이가 있다는데, 난 잘 모르겠다. 누군가 그렇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마시면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쓴 맛은 변함없더라. 맥주도 그렇고, 막걸리도 그렇다. 양주야 항상 거나하게 취해서 마셨기 때문에 게다가 한 두 잔만 빼고는 폭탄주로 마셔서 진정한 그 맛은 알 수가 없다. 와인이라고 별 다를까? 내게는 매 한가지다. 처음 맛본 화이트 와인은 시큼덜덜한 맛에 쪽 빠진 와인글라스가 예쁘다고 세 명이 일곱 병을 글라스에 가득 담아 원샷으로 비웠고, 우연히 알게된 두꺼비표 '진로 포도주'와 소주를 '오십세주'처럼 반반 섞어 삼겹살 구이와 돼지족발에 마시면 그 맛이 최고인 줄 안다. 그래서 항상 술자리를 생각하면 그 때마신 술에 대한 기억보다는 사람에 대한 기억만 남는다. 어디에서 어떤 술을 몇 병을 마셨고, 몇 잔째에 내가 취했더라 라고 정확하게 카운트해주는 친구도 있더라만 내게 만약 그짓(?)을 시킨다면 필기도구와 메모장을 잘 둬야 할테고 이것들을 내 바지춤에 묶어둬야 할거다. 취해서 웃고 즐기느라 잃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최근들어 주변에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와인을 마시는 횟수도 늘어가는데, 직접 사오거나 추천하는 사람들의 품평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면 한결 그 맛을 알기가 쉬웠다. 그리고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이라든가,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매치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들의 숨겨진 매력을 엿보기도 한다. 시키는대로 주는대로 마시는 와인은 맛있다. 그들이 평하는 와인의 맛은 늘 새롭고 그들의 이야기처럼 술에 그 맛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아 좋았다. 문제는 내가 선물로 준비를 해 가거나 자리를 마련해야 할 때인데 이럴 때는 여간 난감한게 아니다. 잘 아는 척하는 것도 싫지만 그렇게 마셔놓고 모르겠다고 하는 고백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면장도 한다'고 무턱대고 마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뭐라도 좀 알고 마셔야 기억이라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눈에 띈 책이 바로 [이럴 땐 이 와인]이다.
 
 
 
 

 
와인이나 맘껏 마시자고 떠난 여행이 유학이 되어버린 와인애호가이면서 와인수입회사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저자 이재형씨의 이 책은 나같은 와인 문외한  한사람을 위해 만든 책같았다. 제목도 정말 마음에 든다. [이럴 땐 이 와인]이 그것인데, 종종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이 내가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고 조외가 깊은 줄 알고 '이러저러한 상황에 처했는데 그 답을 찾아줄 책을 구한다'는 사연의 댓글을 보내오면 나름 고민하면서 책을 찾아보다가 [이럴 땐 이 책을 권합니다]같은 책을 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와인에 관련되어 같은 생각 같은 이름의 책이 나와 반갑지 그지 없다. 내용 또한 제목에 걸맞다. 숯불구이, 스테이크, 오이스터(생굴), 양고기, 한식, 중국요리, 피자, 치즈 등 우리가 자주 접하는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권해주는가 하면 친구들을 함께 할 때, 외국인과 함께 할 때, 접대용으로, 멘토(스승)와 함께, 와인전문가와 함께, 여인들과 있을 때, 소개팅과 프로포즈를 할 때 등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와인도 소개해준다. 그 뿐 아니다. 성공 기원, 연인에게, 결혼선물, 집들이, 아기의 탄생, 생일선물, 명절, 입학과 졸업, 은퇴선물 등 선물이 필요할 때 적합한 와인도 알려준다. 와인과 함께 하는 무드있는 상황에서의 숨은 연출법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밖에도 와인과 요리를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추천 레스토랑이나 바를 추천해주고, 어려운 와인의 이름을 간편하게 외우는 팁도 공개한다. 저자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와인에 얽힌 이야기와 국내에서 소믈리에로 근무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들들 토대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어 마치 영화 사이드웨이를 보는 듯 즐기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곤혹스러웠던 것은 소개하는 와인들에 대한 맛과 향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요리와 안주들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였는데, 달려가 한 병을 사들고 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한 잔의 와인을 옆에 두고 마시면서 읽는다면 읽는 맛은 두 배가 될 듯하다. 이 책의 압권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부록과 같은 것인데, [5만 원 미만대 최고의 와인들]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루마니아, 이스라엘, 미국, 칠레, 아르헨티나,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 적당한 가격대비 최고의 와인리스트들이 짧은 소개와 함께 공개된다. 고맙고, 반갑다 아니 할 수 없는 멋진 선물이다.
 
 

 
 
제 맛도 모르고 달달 외워 내뱉는 어설프니는 체질에 맞지 않고, 대단한 내공을 지니려면 수백 명의 와인을 마셔줘야 할 지경인 내게는 적재적소에 적당한 와인으로 요리와 함께 맛과 멋을 즐기기에 충분한 책인 것 같았다. 이 책을 통해 두 해전 출장선물로 받은 와인세트가 '동료들과 가볍게 한 잔 할 수 있는 '모스카토 다스티Moscato d' asti와 아스티'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출처를 알 수 없이 내 방 책장 옆에 잠들어 있는 묵직한 와인이 타닌과 산도가 훌륭한 밸런스가 돋보이는 유기농 와인의 대명사 타라파카 나투라Vina Tarapaca Natura 란 것도 처음 알았다. 천천히 세계 와인리스트의 이름을 쫓아 사람과 사연의 기억들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어떤 맛일지, 어떤 사람일지, 어떤 기억들이 남겨질 지 벌써 설렌다. 전문적 지식을 갖춘 소믈리에가 되라는 듯 딱딱하고 어렵게 설명된 와인 관련서에 질렸거나,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와인지식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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