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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장아이링 지음, 김은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소설[색色, 계戒] !
하루를 쏟아부어내듯 열중한 그 무엇.
그것이 뭐였었나? 싶은 나날들이 있다.
처지와 관계에 얽혀 초심을 잃고,
이루어가지만, 실은 잃어가는...
그것이 눈에 보여 얼른 고치고 되돌리고 싶지만,
이미 그 무엇에 발을 푸욱 담궈버린 나날들이 있다.
살아있는 감각은 그것을 알지만...돌이킬 수 없다.
늦.은.때.
그래서 나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질 때,
거울보기가 싫어질 때,
내 눈에 걸려든 또 다른 무언가에 빠져버린다.
그것 또한 아닌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며심하게 아주 심하게 빠져버린다.
결국 조각나 파괴될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된다.
중독.
주욱 떨어진 수트에 뽀마드를 바른 양조위는
실은 갈 곳 없이 헤매는 목마르고, 허기진, 고독한 늑대가 아니었을까?
한 마리 늑대.
그의 눈만...
그가 토해내는 숨소리만 뇌리에 남는다.
나같아서...
우리같아서...
- 지난 해 연말, 영화를 보고 난 후 쓴 리뷰.
영화[色색, 戒계] 가 국내에 상영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많았다.
우선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 과 함께 중국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 평가되는 장아이링張愛玲 의 작품을 섬세함과 깊이있는 감정묘사로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오른 리안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명배우 양조위와 신인 여배우 탕웨이의 출연도 화제를 낳았지만, 파격적인 세 번의 정사신은 실제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영화를 보았는가? 그렇다면 본 그대로다'는 묘한 대답으로 진위를 피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였다. 최고의 원작과 감독, 그리고 배우가 만난 이 영화는 결국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나 또한 남들과 특히 다를 바 없이 숱한 화제를 낳았던 영화였고, 개인적으로 리 안 감독과 양조위를 좋아해 기꺼이 본 영화였지만, 스크린이 밝아지고 일어서서 머리속에 남았던 것은 양조위의 눈이었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만난 남자에게서 느끼는 왕치아즈의 애증과 배신으로 그녀를 떠나 보내야 했던 이易 선생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은 모든 것을 관객의 판단에 내맡기는 영화의 작위성때문에 그 진심을 알지 못한 채로 남겨둬야 했었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책으로 다가왔다. 장아이링의 책 [色색, 戒계]가 그것이다.
그녀가 책을 발표한 후에도 여러 번 수정을 할 정도로 아꼈던 [해후의 기쁨 相見觀]과 [색, 계 色, 戒], [머나먼 여정] 등과 함께 총 일곱 편의 작품들이 수록된 이 책을 쥐고 가장 먼저 펼쳤던 작품은 단연 [색, 계 色, 戒]였다. 나라를 배신하고 적국의 앞잡이가 되어 '오직 살아남기'만을 위해 발버둥치는 그에게 나타난 왕치아즈. 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의심하고, 시험하고, 또 관찰했다. 그리고 전쟁상황에서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군들의 두려움을 한 몸으로 느끼며 지쳐있던 그는 그녀만이 자신을 알아 줄 지기知己로 알고 그녀를 유일한 휴식처로 느끼게 된다. 또한 나라의 복수를 위해 이易 선생을 만나게 된 왕치아즈는 그를 만날수록 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연애하거나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뭔지 알 수 없었던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죽여야 한다는 의무감과 그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은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복잡하기만 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곳은 공교롭게도 인도인이 운영하는 '보석가게'였고, 그곳은 둘의 관계에 있어 마지막 장소가 된다.
"내가 고른 반지인데...마음에 들어요?"
"반지 따위엔 관심없어. 반지를 낀 당신 손이 보고 싶을 뿐이야."
조금 서글퍼 보이는 미소였다. 스탠드에 비친 그의 옆모습에서 그녀는 부드러움과 왠지 모를 연민의 기운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는데 그의 속눈썹은 나방의 미색 날개처럼 여윈 그의 두 뺨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사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구나.'
갑자기 몰려든 생각에 뭔가르 잃어버린 듯 심란해진 그녀의 심장이 쿵광거리며 미친듯이 뛰었다.
그녀의 변심으로 살아남은 이易 선생. 그녀를 비롯한 일당을 모두 처결할 것을 지시하고 가정부가 차를 내오자 차를 받친 접시 위에 담뱃재를 털며 생각한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평생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한 지기知己였다. 중년 이후에 이런 만남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 그녀는 죽으며 나를 분명 원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그럼 남자가 아니었으면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침실에 들어와 그녀가 누웠던 침대위에 앉아 아직 구김이 남아 있는 그곳을 쓰다듬던 이易 선생은 10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고 눈을 감는다. 그녀와 일당들의 사살을 명령한 시간이다.
'그는 현재 전쟁 국면이 일본에게 점점 불리해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지기知己를 한 명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평생 영원도록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위로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만큼 강렬했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냥 감정이 있었다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원시시대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였고, 매국노와 매국노를 위해 결국 앞잡이가 된 관계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서로를 점유한 관계였다.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그의 귀신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영화속에서 궁금해 했던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의심, 믿음, 그리고 배신으로 얼룩져 수많은 이야기를 담았던 이易 선생의 눈, 사상과 선악에 상관없이 살아남기만을 바라야 했던 암울한 시기의 한 남자에게 찾아온 사랑에 대한 감정과 곧 이어진 배신과 이별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것은 다한 셈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작품들은 더욱 훌륭했다.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또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저마다 가지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때문에 괴롭게 되는 소설 [못잊어 多少恨]는 1950년대에 완성한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필체와 심리적 묘사가 어울어져 있었다. 특히 동양인만의 보수적사고와 사랑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의 모습은 장소와 시간만 다를 뿐 아직도 존재하는 우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 있어 책 속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이 밖의 소설들도 중국의 격동하는 근대사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사랑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작품 속 주인공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을 놓칠 수 없었다.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을 써내려간 장아이링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책 책이었다. 그녀를 통해 중국 근대사 속 여성들을 살펴 볼 수 있었고, 비슷한 시기와 상황을 겪은 우리네 여성들을 짐작하게 했다. 남성보다는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책인 듯. 여성들이 읽는다면 내가 해석한 [색, 계 色, 戒]와는 또 다른 관점으로 비춰지리라 생각된다. 일곱 편이 하나처럼 잘 엮어진 멋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