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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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향수, 유혹, 질투, 그리고 행복. 26개의 단어들. 
두 글자의 한 단어 속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사고思考 들의 잔치 !
 
최첨단이 자랑인 듯 매일같이 최신의 제품과 상품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툼을 하며 쏟아져나오는 오늘날 이미 알고 있는 이름보다 더 많은 이름들이 서로를 알리고 있다. 시선으로도 쫓을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쉼'은 곧 죄악시 되고, '행동'은 찬양시 되어버렸다. '생각'을 권유하기보다는 '활동'을 강요하고, '깊은 사고력思考力 '보다는 '넓은 정보력情報力'을 우선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창조적인 생각Creative Thinking'이라고 하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사유思惟 라 하는데, 철학적 개념으로는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으로 본다. 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현상現象에 집중하고 마치 그것 밖에는 없다는 듯 몰두하며 살았던 내게 '사유思惟 의 즐거움'을 알려준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자 문명의 영향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기에 이렇다 할 관찰의 대상이 되지 못한 관념의 두 글자들을 한데 모아 그들에게 본래의 이름값을 매겨주는 화려한 잔치가 열렸다. 철학자이면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용석 교수의 생각과 손에 의해 펼쳐진 잔치의 이름이 바로 [두 글자의 철학]이라는 책이다.
 
우선 글을 읽고 있자면, 벌거숭이 디오게네스나 발끝까지 끌릴 듯 긴 수염의 공자님처럼 기인奇人 이나 노인老人의 모습을 띨 것 같은 철학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이 표현만 봐도 난 현상학적 관념주의자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잘 다려진 블루톤 체크무늬 피케셔츠에 소매는 두 번 정도 걷었을테고 그에 어울리는 조끼를 입고, 그리 헐렁해보이지 않지만 편안해 보이는 갈색 카고바지에 양말이 보이지 않는 덮개가 있는 슬리퍼를 신었을게다. 한 손에는 책을 들었는데 책의 한 쪽 면을 밖으로 감아 손에 쥔 채로 밤색 뿔테 안경 너머로 나를 보며 즐기듯 고민하는 듯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서재의 중간에 둘이 앉아 있을테고, 오래된 책 냄새와 파이프 담배냄새도 나는 듯, 커피향도 은은하게 흐르는 듯하다. 저자이자 화자는 묻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강조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편안하게 듣는 듯 읽기만 하면 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방대한 자료와 축적된 사고로 펼쳐지는 이 축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가장 많이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관념적인 두 글자의 한단어를 찾아 그 함축적 의미를 단어의 기원인 한자에서 찾고, 동서고금의 자료속에서 그 단어의 넓이와 깊이를 더한다. 게다가 우리가 봤음직하고 읽었음직한 영화와 책속에서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단어가 얼마나 멋들어진 말인가를 되새겨준다.
 
예를 들어 말씀 언言 과 빼어날 수秀 의 합으로 만들어진 꾈 유誘 자가 더해진 유혹誘惑 은 세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첫키스 장면처럼 줄리엣이 로미오의 요구를 모두 거절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사실 모든 것을 허용하고 더 나아가 로미오를 유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재림 감독의 영화 [연애의 목적]에 나오는 "저가 가서 키스나 하고 갈래요?" 같은 대사는 거부할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표현만 다른 유혹으로 시대는 바뀌었어도 생명력의 표출과 즐김, 그리고 기쁨으로서의 유혹의 변질은 변하지 않음을 사례를 들어 이야기한다.
또 우리는 '유혹을 당한다'는 수동태의 표현을 자주 쓰는데, 실은 유혹이 곧 욕망을 실현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매우 능동적이라고, 그래서 '유혹당하기'는 '욕망채우기'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혹은 대표적인 상호 소통의 행위라는 것을 소유, 정복, 지배에 대한 욕구 때문에 현대인들이 잊고 있던 것이고, 소통은 즐거움이므로, 유혹은 본질적으로 유희라는 것이다. 단, 키에르케고르가 "모든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유혹자가 있다. 행복이란 바로 그를 만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걸맞는 상대를 만났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번에 걸맞는 상대를 만날 수 있겠는가? 여러 상대를 많이 만나봐야 걸맞는 상대를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면 확실히 유혹은 자주 당해도 보고, 해도 봐야 한다는 말이 맞기도 하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의 느낌은 사고가 확장된 듯 막혔던 교통체증이 풀린 듯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주워 듣기만 사람과 생각한 사람과의 차이점을 새삼느끼게 한다.
 
[리뷰]를 읽는 독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유혹'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를 썼을 뿐, 이보다 더 훌륭한 문장의 생각들이 유혹을 포함해 26 가지의 두 글자 단어들를 통해 펼져진다. 잔치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관념적인 단어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 대해 어려워서 포기하지 않을까 했던 선입관으로 비롯된 두려움을 몇 장을 넘기면서 어리석인 기우杞憂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늘 내가 사용하고, 옆에 두었던 말들(단어들)이었는데, 이렇게 깊은 뜻과 이야기가 숨어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느낌은 감탄이 되고, 오해가 풀려 이해로 변했다. 정말 재미있는 과정이었다. 여느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형상화되지 않은 관념들이 머리속을 떠도는데도 즐거움은 더했다.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리라. 더우기 뜻하지 않게 선택한 책 속에서 이런 재미를 느끼기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저자의 책을 좀 더 찾아 읽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 인류 최대의 화두이자 이 책에는 있을 법하지만 없는 '사랑이라는 두 글자의 철학'을 또 다시 저자의 손을 빌어 읽고 싶다.
 
나처럼 짧디 짧은 어휘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두 글자로 된 한 단어'가 얼마나 깊은 의미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지 알게 될 것이고, 영화와 책 그리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사고의 확장이 어디까지 가능한 지를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너무 어려워서, 아니면 나와 상관없다고 치부해버렸던 철학이란 학문이 실은 우리 생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그리고 그 쓰임과 소용이 얼마나 방대한 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 단어의 이야기마다 그리 길지도 않다. 혼자 있을 때, 혼자 있지만 외롭고 싶지 않을 때 읽으면 참 좋을 책이다. 특히 오늘 처럼 눅눅히 흐린 저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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