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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평점 :
현실세계에 살게 된 어른공룡 '둘리'의 슬픈 이야기
아마도 830422-1185600 이라는 주민번호가 나오면서부터 인가보다.
까까머리에 중학생인 내가 매주 만나기를 기다릴 만큼 좋아했듯이, 소년소녀들의 영원한 친구인 줄 알았던 '아기공룡 둘리'가 구설수에 오른 건 2003년 4월 19일 오후 2시 30분 부천시민이 보는 가운데 아기공룡 ‘둘리’에게 부천시 명예시민증 전달식 및 명예시민증이 전달 된 후부터인가보다. 상상속의 동물이 의인화되어 '둘리'라는 이름을 갖더니 급기야는 어른취급을 해버렸다.
자유롭게 살던 인간들이 저들이 만들어낸 시간에 얽매여 그 속에 구속을 받더니 그마저도 성이 차질 않는지 영원히 '아기공룡'으로 상상속에 그림속에 있어야 할 '친구'를 세상밖으로 꺼내어 놓아서는 달랑 '주민등록증'을 줘버린 것이다. "넌 이제부터 어른이야. 이제부터 알아서 살 길 찾아라." 말하듯.
어디 그뿐인가? 주민등록증의 프린트도 채 마르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성인용싸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외쳤다.
"이 주민등록증 위조다!! 감히 둘리에게 가짜 주민등록증을 주다니..." 정작 주인은 아무 말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 후 4년 후에는
'도봉구민 둘리' 호적 등본 떼 주세요!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으니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기억속에서는 바이올린 타고 우주별까지 여행해야 할 '둘리'를 주민등록증을 주면서 세상이라는 중력에 끌려 이 땅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인간들의 짓(?)이 여간 마득치 않았다. '둘리'에게 있어 창조주와도 같은 만화가 '김수정'씨도 부천시장과 함께 둘리에게 주민등록증 줄 때까지는 상상하지 못한 일은 단 열흘 후에 벌어졌다.
한창 젊고 실력있는 신인들을 '인디존'이라는 코너를 통해 발굴하던 격주간 만화잡지
'영점프'의 2003년 5월 1일자 단편만화에서 '둘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어른의 하루는 아이들의 수천일에 맞먹는가보다. 나이를 훌쩍 먹어서는 우리의 중년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그려진 둘리의 모습을 보고 원작자 김수정은 "숨이 턱 막혀왔고, 현기증이 일어났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둘리를 이렇게 만들어 놨어?"
'아기공룡 둘리'가 아닌 '공룡 둘리'를 다시 생각하고는 자신의 둘리를 망쳐놓은 신인 만화가 최규석에 대해 '이제 막 만화를 시작하는 최규석씨는 그 상상력과 그 용기만으로도 충분히 만화가라는 호칭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다음에 또 누군가가 둘리를 그리겠다고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추측컨대 만화의 소재를 찾던 어느 신인 만화가가 '둘리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아이디어를 찾았고, 둘리의 하느님 '김수정'에게 '공룡둘리'를 소재로 단편만화를 그려도 되는가를 물었고, 하느님은 심드렁히 허락을 했을 것이다. 자신도 이지경(?)이 될 지는 상상하지 못했을 터, 그래서 그의 상상력과 용기를 칭찬했으리라. 김수정은 생활에 찌들어 폭싹 늙고, 변해버린 둘리와 주변인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누군가가 또 둘리를 그리겠다고 하면 단호히 거절할 것'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대신했다.
['인간말종'은 아마도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시다 잠깐 조는 사이에 만들어진 변종이다]는 우스개소리처럼 매주마다 자신의 손에 의해 세상과 만났던 둘리를 깊은 생각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잠시 맡긴 순간 이젠 더 이상 '아기공룡 둘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처음에 말한대로 그의 실수는 둘리에게 주민등록증을 줘버림으로써 '아기'의 이름을 떼어버린 순간부터인지 모른다. 그 여파은 너무나도 막강해서 '아기공룡 둘리'를 생각할라치면 첫 그림은 빌딩숲 속에 작업화와 모자, 그리고 소주병을 들고 구부정한 허리로 세상을 원망하는 듯 쳐다보는 둘리의 모습이 떠오르고 '호이 호잇~'하며 천방지축 뒤흔들며 매주 나를 웃게 했던 아기공룡의 모습은 그 뒤를 따르는 더 먼 기억이 되어버렸다. 김수정의 한마디 승락은 둘리를 지켜보며 함께 자라온 어른들에게서 '아기공룡 둘리'를 빼앗아 버렸다. 한낱 독자가 이럴진대, 원작자는 얼마나 원통하고 후회를 했을까. 안봐도 PMP다.
[공룡 둘리]가 다른 단편들과 함께 모여 책으로 만들어졌다. 제목 한 번 멋들어지다.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가 그것이다. 쌈마니
희동이, 사고를 친 희동이 때문에
도우너를 외계인으로 팔아버리는
철수, 동물원 타조우리에 갇혀서 몸을 파는
또치와 어린 시절 그 복장 그대로 밤무대를 뛰는 것 같은
마이콜, 늙은 고길동의 집을 사기친
도우너, 그리고 순간 어른이 되어버려 마땅한 직업이 없었던지
'일용직 잡부'로 변한 공룡 둘리의 모습은 우리 현실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닮아 있다. 만화속에서 '호이~호잇~' 주문과 함께 능력을 부리던 둘리의 손가락은 산업재해로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아직 마음은 그대로라 해부의 위기에 빠진 도우너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나서지만, 따끔한 또치의 충고만 듣고 등을 돌리고 만다.
"거긴 살만 한가요? 여긴...만만치가 않네요.
아저씨, 저 조금만 누웠다 갈께요. 아저씨, 눈이 오네요.
다시 빙하기가 오려나 봐요."
아무런 손쓸 방법이 없자, 고길동의 묘에 찾아서 소주를 마시고 빙하기를 맞는 공룡 둘리의 말과 모습에서 많이 겪어봤던 나의 모습이 들어 있는 듯 했다. 냉정하리만치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놀라운 필체로 그려낸 단편 [공룡둘리]을 그린 만화가 최규석에 대해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을 정도지만, 대단한 작가의 발견에 대한 기쁨보다는 상상속의 친구를 잃어버린 슬픔때문에 입을 다물게 된다. 한 날에 대단한 작가는 태어났지만, 절친한 친구는 죽어버린 듯한 기분...
씁쓸했다. 나에게 둘리는 죽었다.
최규석의 날카로운 시선은 다른 단편들 곳곳에서 나타난다.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이라고 말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처럼, 살기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 먹는 것이 밥이라면, 삶은 하루하루 죽음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지루할 수 없고, 빚지지 않은 것이 없고,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세월이 젊음에게]에서 말한 구본형씨의 말처럼 끔찍한 삶의 먹이사슬과 지긋지긋한 밥벌이의 고통을 '배달시킨 치킨 한마리'로 잘 표현했다[사랑의 단백질].
특히
'배가 너무 곱파서 생명을 잇기가 힘이 드러 구걸을 함미다' 맞춤법도 틀리는 입간판을 내걸고 구걸하는
붉은 돼지저금통의 해학은 기발한 작가의 상상력과 관찰력을 충분히 입증시킨다. 이 또한 전국 최고의 판매량을 자랑하는 대구의
[금산삼계탕]사장이 삼계탕으로 변신해 소비자의 입으로 들어간 닭들을 추모하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는 몇 년 전의 기사를 생각나게 했다.
이 밖에도 사회적 약자 위에서 군림하는 전형적인 강자들의 처세를 꼬집는 단편
[콜라맨], 끝이 없는 권력, 지배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그 허실을 이야기한
[리바이어던], 현실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린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고단한 삶을 그린
[선택]등 에서도 현실속 우리의 어두운 그림자를 잘 찾아 그려내고 있다. 사회고발적 스토리텔링을 겸비한 멋들어진 화력畵力은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하게 만든다.
책표지의 [공룡둘리]는 지명수배가 내려져 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님 누명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줬던 모습이라면 아무도 찾지 못할 어딘가에 꼭꼭 숨어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원작자 김수정이 '절대 불허'한다고 이야기한 만큼 더이상 볼 수 없으리라. 저자 최규석도 더이상 공룡둘리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단백질]에서 치킨이 된 닭돌이을 보고 괴로워했던 '붉은 티셔츠의 청년'의 마음일테니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세상에 내려온 그가 안쓰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더 마음이 씁쓸한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음직한 상상이 현실에 대비될 때 그 아득함이 이렇게 깊은 줄은 몰랐다. 때론 상상속에 그대로 남겨둬야 할 것들도 있는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