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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토너의 흡연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소하고 위트있게 꾸며낸 맛깔난 이야기 책!
대학시절 내가 무척 따랐던 선배가 있었다.
사 년이나 위인 그 선배는 까마득한 저하늘의 태양같이 높아서 눈도 함부로 맞출 수 없던 존재이지만(80년대 말 대학은, 특히 남자들로 득시글한 우리과는 그렇게 살벌했다. 무시무시한 군부정권 만큼이나..) 함께 운동을 했던터라 터울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학번은 세 학번 차이지만 실제나이는 일곱 살이나 많은 '노老학생'이었던 그는 이제 막 청년이 된 내게는 캠퍼스티를 입은 중늙은이로 비춰져 은근히 함께하기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알 순 없지만 대단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그 선배는 항상 주머니가 넉넉해서 함께 하면 늘 밥과 술을 자신이 도맡아 내는 덕에 그를 쫓아다니는 후배들이 예닐곱 명은 족히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남들이 부러움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질투일 뿐 그에게는 넉넉한 주머니 사정보다 훨씬 더 넉넉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등진 채 학력고사 점수높이기에 급급했던 무지랭이 새내기에게는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같은 이야기에 낮밤을 잊고 듣고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대학도 세번 째로 옮긴 그의 이력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은 트여 있었고, 사회경험에 목말라하는 중생들에게는 모세와 같은 존재였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로 사회와 정부를 꼬집는 소재들이 주를 이루었는데, 빠질 수 없는 음담패설도 한 몫을 했다. 학기중에 '자체방학'이라는 명목아래 덜컹대는 중고차를 타고 7박 8일로 여행을 떠나거나, 물때가 좋을 땐 언제나 밤낚시여행을 떠나곤 했다. 웃음 뒤에 남겨진 질문과 고민은 내게 숙제로 남겨졌고,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 답을 찾곤 했다. 그 선배에게서 나는 사회를 알았고, 남자를 알았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여자도 알게 되었다.
소설 <유이화>를 통해 알게된 작가 조두진의 책 <마라토너의 흡연>을 읽으면서 그 선배를 떠올리게 된 건 일곱 편의 단편소설 모두 술 한잔 놓고 밤새워 낄낄대며 장단맞춰 듣던 선배의 맛깔나는 이야기들을 닮았기 때문이다. 정년을 앞둔 형사의 난감한 상황을 그린 [7번 국도]도 그렇고,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강조하다가 결국 어처구니 없는 상황극이 연출되는 [족제비 재판]이 그렇고, 제아무리 선비라도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힘쎈 남자' 신드롬에 낚여버린 사나이의 이야기 [정력가]가 그렇다. "술먹으면 모두가 '개'가 된다"고 했던가? 술집에 모인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그리고 피부과 친구의 손톱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상황에서 병원 밖을 나온 '별 수 없는 인간'의 군상이야기까지 ... 사회에서 저마다 '제 자리'를 박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을 재미있게 꾸며놓았다.
가장 재미있게 본 소설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마라토너의 흡연]인데, 카오스 자체인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덕목을 가진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자신의 삶에 대해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교훈을 얻었는데, 그 반전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세월은 훌쩍 지나 나는 그때 그선배의 나이보다 열살은 너 먹었다. 꾸준히 만나던 선배와도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여섯 해를 지나는가보다. 얼마전에 읽은 <완득이>가 청소년을 위한 우리 작가의 성장소설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고단한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을 위해 해학과 독설를 갖춘 어른을 위한 소설이라고 보겠다. 소설가는 세상의 거울이다. 아니 빽미러다. 목표를 향해 무표정하게 앞만 보며 달리는 우리에게 소설가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살필 수 있는 그림을 던져준다. 우리에게 웃음을 더져주고, 안심을 시켜준다. 그리고 큰 기침을 하고 다시 앞을 볼 수 있는 여유를 던져준다. 이 소설은 내게 잠시 휴식을 주었고, 웃음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배움을 던져주었다. 이십 년 전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