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직관주의자 - 단순하고 사소한 생각, 디자인
박찬휘 지음 / 싱긋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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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만지고 탈 수 있는 예술품, 자동차

 

"얘, 이건 정말 예술이지 않니?

예술품은 우리가 만질 수가 없잖아. 하지만 난 예술품을 매일 만지고 탄다고!"

 

내가 무척 좋아하고 따랐던 큰형님 같은 출판사 대표가 자신의 애마(?)아우디에 나를 태우며 한 말이었다.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는, 옷맵시가 무척 좋은, 무엇보다 자동차 아우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0년 전 덕수궁 돌담길에 있는 그가 좋아하는 커피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맛난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마치 '서로의 이상형을 만난 첫데이트' 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을 캐나다로 보내고 홀로 지내는 큰형님 같은 그 분을 위해 나는 생각날 때 마다 곰탕과 명란젓, 더덕무침 같은 먹을 거리를 보냈고, 자신이 좋아하는 안경테와 향수를 답으로 보내줬다.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그 분을 만나 사랑을 하듯 커피를 얻어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를 무척 좋아했다.

 

두 달 전, 그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간 수많은 전화를 나눴지만 내게 기색조차 하지 않다가 야속하게 떠난 뒤에야 소식을 들었다. 고독해서, 그래더 더 멋졌던 사람,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그가 사랑한 예술품 아우디가 떠오른다. 

 


(고) 권성준 에이콘 출판사 대표님

 

형님의 예술품을 만든 디자이너를 우연히 만나다

 

박찬휘 작가의 <딴생각>을 펼친 건 큰형님(?) 덕분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랑한 형님이 사랑한 차 아우디를 디자인한 사람이라기에 반가웠다. 그 분께도 형님 차를 디자인한 사람이 책이 냈다고도 알렸다. 그는 꼭 읽어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때도 그는 자신의 몸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잉걸을, 내게 말하지 않았다. 

 

 그때 <딴생각>을 읽고 이렇게 짧게 리뷰했었다. 


 


 

  

"책을 읽다 보면 무엇에서도 느끼지 못한 흥분을 느낄 때가 있다.

아직까지 한 번도 하지 못한, 딱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예서 읽었을 때,

어느 언저리까지만 느꼈지만 정점, 즉 엑스터시 같은 결론에 이르지 못한 그 무엇을 예서 찾았을 때,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몇 단어로 설명이 충분한 문장을 예서 만났을 때,

이런 명징한 문장을 만나면,

내게 숨었던 도파민을 폭발하게 한다.

 

'일이관지'란 말을 좋아한다.

한 가지에 궤를 뚫은 사람은 그 사람의 삶 속에 이유가 숨어 있고, 다른 무엇에 손을 댄다고 해도 궤를 뚫을 수 있다...뭐 이런 비슷한 뜻이다.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가 바라본 사물의 세계는, 아니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과 생각은 반할만큼 매력적이다. 그는 자동차 스케치만큼 잘 쓴다.

 

글맛 역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을 만큼 픙미가 가득하다. 게다가 그의 손끝에서 비롯된 곳곳에 숨은 사진과 사소한 사물의 스케치는 글에 딱 어울리는 멋들어진 가니쉬였다.

그는 목탄과 마카로 스케치하는 하얀 도화지를 일러 '촉각하는 공간'이라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가 읽는 책 역시 손끝으로, 손날로, 펜으로, '촉각하는 공간'이 아니던가.

읽는 내내 마음껏 페이지를 접고, 펜으로 줄을 긋고, 그의 딴생각에 뭔가를 긁적이며 궁싯거리고 있다.

 

읽은 양을 만족하게 하기보다

아직 읽을 양이 남아있음을 안심하게 하는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이런 '빵'은

생각날 때마다 두고두고 꺼내어 먹을

아주 맛난 '빵'이다." 

 


그리고 큰형님이 없는 지금, 그가 사랑한 자동차의 디자이너의 새 책이 출간되었다. 

제목은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 나는 큰형님을 기억하며 책을 펼쳤고, 느리게 느리게 마지막까지 읽었다. 

그 분이 말한 '누구나 만질 수 있는 예술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지켜봐야 할 작가의 등장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데, 그건 영화쪽 이야기고. 책은 절대 그렇지 않구나!' 책을 덮고 난 내 첫 소감은 이랬다. 박찬휘의 전작 <딴생각>이 나와 내 주위 특히 사물에 대한 투철함이 보인 작품이었다면,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는 우리가 느끼는 관념어에 자신이 속한 디자인, 디자이너의 세계를 담았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명징한 단어들의 쓰임은 놀라웠고, 호기심과 직관, 긍정과 거리 그리고 디자인이라는 모호함들을 그만의 소화력으로 나를 이해시켰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놓을 줄 모르게 했다. 

오래 저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놀랍고 반가운 당황스러움'을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당신의 직관을 사랑하라

 

자동차 디자이너인 그는 첫 생각, 직관을 예찬했다. 그는 '오직 직관만이 교감을 통한 통찰력으로 이어진다'고 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려 시험을 볼 때 첫번째로 마킹한 답안과 첫 번째 그림은 나와 가장 가깝다며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생각이 필요할 때는 가장 '나다운 것'이 중요하다. 예술이건 디자인이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유한한 심상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직관의 쓰임새다. 

... 

처음 골랐던 답안이 여전히 찜찜하다면, 이번만큼은 정말로 다시 고치는 게 맞는 것 같다면, 그런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면, 한번 첫사랑을 떠올려보라.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답은 직관 속 황홀했던 첫순간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맨 처음의 마음,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고 그토록 완고하기만 했던 첫사랑이 답이다." (본문 122쪽)

 

아울러 그 직관의 표현은 단순함이라고 강조했다. '왜 단순함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첫째, 단순함은 개인의 취향을 떠나 모두가 멈추어 쉴 곳이라 했다. 인간은 기술과 기능에 열광하는 한편 복잡계로부터 동떨어지고 싶어 한다. 멍때리기 위해 '불멍'가 '물멍'을 찾아 굳이 떠나는 이유가 그것인데 단순함은 우리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둘째, 단순함은 창의성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라서다. 그는 이 책 곳곳에서 단순함을 강조했는데, 극적인 단순함에 이를 때 우리는 그것을 '우아하다'고 부른다고 했다. 

셋째, 단순함이 바쁜 모두를 돕는 유일한 수단이라서다. 단순한 사물이 복잡한 세상에 쉼이 되어주듯 분주한 모두에게 단순한 소통의 방식은 모두를 돕는 데 기여한다며 할머니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려 단순한 설명이 완벽한 이해를 만든다고 했다. 

 



 

욕망, 그 일말의 선함에 대하여

 

유독 내 눈에 띄는 꼭지글은 '욕망이 그리도 나빴나?' 였다.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에 대한 고찰을 내려놓은 글인데, 그의 생각이 물씬 품어져나오는 대목이었다. 

 

"배가 고파서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해야겠다는 의지는 욕구이다. 반면 특정 식당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겠다는 의지는 욕망에 해당한다. 새로운 제품을 구상하고 신박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때 우리에겐 욕구와 욕망, 이 두 가지 마음이 모두 필요하다. 

... 

한마디로 말해 욕구는 현재, 욕망은 미래다. 욕구가 내 손에 들린 현재의 물건이라면, 욕망은 현재를 도발함으로서 얻어지는 '신상(신상품)'이다." (본문 185쪽)



아래 위로 접은 좋았던 페이지들. 거의 모든 페이지가 접혀 있다.

 


저자는 SNS에 등장하는 '좋아요' 버튼에 일희일비하는 현대인의 공허한 욕망을 토로했다. 아울러 '나의 욕망이 오롯이 나로부터 나왔다고 착각하기에 SNS 등의  왜곡된 공간에서 타인의 삶을 엿보며 얻은 공험함을 더 치명적으로 느끼고 결국 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욕망은 그리 참단한 내용의 것이 아니라며 '인간의 욕망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일 때에만 인간적일 수 있다'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말을 빌려 내가 타자를 사랑으로 욕망하는 만큼 타자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그런 마음이 욕망이고, 사랑의 대상으로 타자를 인식할 때 비로소 인간적인 역할을 다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후 큰형님이 아우디를 사랑한 건 그가 억대의 자동차를 구입할 만큼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흔히들 말하는 '하차감'을 욕망해서도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 큰형님은 수많은 부품들의 조립품인 이 물건이 빈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요철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장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찬사를 보낸 것이고,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승차감' 그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큰형님이 내게 "얘, 이건 정말 예술이지 않니?" 라고 말했던 건 디자이너들의 구매자에 대한 사랑에 그만의 화답이었던 것이다.

 

 

예술가의 숙명 나, 그리고 세상에 귀기울이기

 


아래 위로 접은 좋았던 페이지들. 거의 모든 페이지가 접혀 있다.

유튜버가 크리에이터라 불리는 시대, 세상에 없던 무엇을 만들면 모두 예술가다. 그 점에서 작가도 예술가로 불린다. 인정하든 말든 디자이너는 현대인들에게 예술가다. 인간의 욕망을 그림으로, 프로토콜 타입으로, 그리고 실체로 만들어냈던 저자는 그만큼 생각이 많았다. 필경 그는 처녀작을 탈고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책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예술가가 또 예술을 하고 앉아 있으니...난 배가 더 고파진다.

 

그는 <종이 위의 직관주의자>에서 지식과 지혜를 논하고, 옳고 그름에 대해 말했다. 또 고독과 오해, 욕망과 긍정, 심지어 짝퉁의 가치에 대해서도 논했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할머니의 손길, 장모님이 만든 단 하나 뿐인 명품 손뜨개질 스웨터까지...뮌헨에서의 자발적 고독은 그로하여금 세상을 좀 더 가까이, 그리고 줌아웃되어 최대한 멀리 바라보게 했다. 하릴없이 바쁘기만 한 내가 주목한 건 그런 그의 시선이었다. 그리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그런 주제들에 대한 그의 필체에 빨려들듯 매료되었다. 

 

마지막으로 반가운 건 그의 독서론이었는데, 고교생들을 위한 강연에서 "그렇다면,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는 독서를 말했다. 전기차 회사의 디자이너이면서 메이킹 팩토리가 되어버린 지구촌을 우려하는 아이러니에 대한 그의 답변인지라 더욱 인상적이었다. 

 


"식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독서는 사람을 더 사람답게 만드는 행위이자 힘이다. 

가령 생성형 인공지능은 기존의 있는 것을 조합한다. 존재하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만나며 유사한 꼴의 파생상품이 만들어진다. 지금보다 늙은 나의 사진을 만들어내고 성별이 뒤바뀐 나의 모습도 생성형 지능이 적절히 조합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활자를 통한 개인의 상상은 각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투과한다. 활자와 개인의 사유가 만나 증폭될 때 그것은 삼차원, 사차원을 건너 유일무이함이 된다. 진정한 인간만의 우리만의 스토리텔링의 탄생은 이렇게 다차원적이다." (본문 326쪽)

 


그가 끊임없이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리라. 두 번째 책을 읽으면서 확실하게 느낀 건, 그가 요즘 잘 찾기 힘든, '휴머니스트'라는 점이다. 다음 주제는 뭘까? 그래서 그의 세 번째 책이 기대된다. 모르겠다, 벌써 도화지를 옆에 두고 글을 타타닥 치고 있을지도.


 

예술을 그리고, 예술을 써 나갈 바쁜 당신의 두 손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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