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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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하다 이제 티셔츠냐?" 이 책을 만날 때 저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을 넘어 바라기 열풍으로 이어지는 현상 덕에 태어난 책이 이 책이 아닐까. 이 책은 한마디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지고 있고, 입는 티셔츠들에 대한 단상들을 이미지와 함께 수록한 글모음'이다. 

어느 잡지에 연재한 것을 모았다는 글을 얼핏 읽은 것 같은데, 게 뭐가 중하랴. 하루키가 입는 티셔츠라고 하지 않은가.






나는 하루키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려워서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중반, 막 독서가 좋아질 무렵 용돈을 아끼고 아껴 화제가 된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을 읽고, '이게 뭔 소리냐' 하며 나만 모르냐는 절망감과 그 돈으로 차라리 뻥튀기를 사 먹을걸하는 아쉬움에 허탈해한 이후, 애써 무시했던 작가다. 거대한 서사에 놀라 엄지척을 하고 난 소설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은 알고 보니 하루키가 아니라 '무라카미 류' 였던 적도 있으니...난 하루키를 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하루키가 쓴 소설과 수필집과, 그를 필력을 말하고, 소설 속에 넣은 음악들을 말하고, 심지어 그가 입고 갖고 있는 티셔츠를 말한 책들을 거의 가지고 있으니, 이 역시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책들 절반 정도는 읽었고, 나머지 절반은 언젠가 곧, 읽을 예정이다. 

이 책 <무라카미 T>도 몇 해 전 출간되자마자 구입해, 비바람이 치던 지난 주말 침대 위에 쭈구려 앉아 몽땅 읽었다. 내용이라곤 별 게 아니다. 절반은 이미지, 절반은 글로 가득한 티셔츠에 대한 수다집. 티셔츠를 언제 왜 샀는지, 입었는지 지 얼마 줬는지 등이 난삽하게 적혀 있어 읽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럼 난 이토록 투덜거리면서 그의 책들을 긁어모으는 걸까. 

하루키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그의 글은 나의 상상을 닮았다. 아니, 망상이라고 해야겠다. 

두서는 없지만 끊임없이 생각하던 스토리,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등장인물과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결국은 결말을 맺는...어느 한가한 날, 어떤 계기로 한동안 내 머리속을 떠오르던 스토리들을 그가 말하고 있어서다. 그의 글을 읽다가 보면 어데서 읽은 듯 데자뷰를 자주 경험하는데, 그 때문이 아닐까. 원래 데자뷰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만나는 내 기억일텐데, 그의 소설을 읽으면 당연히 데자부를 랑데뷰할테니, 랑데자뷰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허무맹랑한데 친숙하다. 실제로 그는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은 소설을 배운 적도, 써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오죽하면 영어로 쓰고 일어로 번역하며 글을 쓴 적도 있다고, 그래서 번역체라 불린다고도 하잖은가. 

물론 30여년을 소설을 써서 먹고 살고, 책도 많이 팔았으니 재능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했지만, 기승전결은 고사하고 스토리보드도 없고, 플롯보드도 없고, 티핑포인트도 없는....의식의 흐름이 시키는대로 적어가는 한마디로 근본없이 쓴 소설이란 말인데....귀해서 일까, 생각이 발칙해서 일까, 이게 참 묘한 매력이다.



손님 없는 어느 재즈바 주인과 한 잔 두 잔 걸친 게 한 시간 정도 되었을 때, 문득 주인 하루키씨가 "난, 이런 생각을 해 봤어..." 라며 주저리 주저리 끝없이 낮지만 같은 톤으로 떠들고, 적당한 취기와 분위기에 무장해제된 난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에 빠지는....그런 느낌을 소설 속에서 경험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하루키라는 이름을 들으면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대표작가'라기 보다는 '옆집에 사는 얘기꾼 술친구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난 그가 달리는 이야기도, 그가 즐겨 듣는 올드 뮤직 이야기도, 심지어 목이 늘어난 게 묘한 매력이라는 빈티지 티셔츠 이야기도 흥미롭게 들리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하루키를 키워드로 하는 책을 죄다 모으는 게 아닐까. 





책을 집어들며 '티셔츠에 무슨 이이기가 그렇게 많냐?'는 의문이 들었다. 

답은 바로 티셔츠에 담긴 프린트가 주된 소재였다. 이 티셔츠는 이 글자라서 좋았고, 저 그림이라서 맘에 들었고, 어떤 티셔츠는 아예 뜻도 맥락도 없는 글자라서 좋았다는...물론 몇몇은 누가 줬고, 가격 싸기로 유명한 단골 빈티지샵에서 싸서 골랐다는 것도 있었다. 재미있는 대목은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자기 이름이 박힌 티셔츠를 받은 게 가득한데,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입겠더라'는 부분이었다(내 이름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내겐 마냥 부러운 대목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이 책을 덮을 즈음, 나 역시 맘에 드는 프린트가 새겨진 티셔츠를 찾아 온라인 빈티지샵을 뒤지고 있더란 거다. 한참을 뒤져 목선이 좋은 미인을 실루엣을 박음질한 다크 그레이색 티셔츠를 한 장 구입했고, 오늘 도착할거란 메시지를 받았다. 입으면 어떤 기분일까, 과연 그걸 입고 밖에 나갈 수 있을까, 아님 잠옷으로 입지 뭐, 잠깐 설랬다. 이렇게 난, 또 한 번 옆집 아저씨와 뜻을 같이 했다. 

별 거 아닌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면, 티셔츠를 무쟈게 좋아한다면(좋아하고 싶은 사람 포함) 읽어보시길...물론 하루키 광팬이라면 놓치면 안 될 최애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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