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면 ㅣ 결정서가 1
이승우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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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18년 동안 감추어왔던 옛날 일을 아주 힘들게 꺼내는 동안 뛰엄뛰엄 떨어져 앉은 10여 명의 회원들은 말없이 그를 주시했다.” - 「뒷면」, P9

 

소설 「뒷면」은 한 사람이 오랫동안 감추어온 과거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는 말의 내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조건과 맥락이 개입한다. 말하는 이의 의도와 듣는 이의 기대, 발화가 이루어지는 상황과 관계의 미묘한 차이가 말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다소 장황할 만큼 언어의 전달 과정에 개입하는 조건들을 해부한다. 그러나 이 서술은 단순히 말의 불완전한 전달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가, 고백의 진실은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준비에 가까워 보인다.

 

주인공 추는 쌍둥이 형제의 동생이다. 형은 사고를 일으키고 다니며 가족의 걱정을 사는 인물인 반면, 추는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꾸려가는 사람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추에게 형을 대신해 공무원 시험을 치러줄 것을 요구한다. “그냥 두면 그 인생이 어떻게 될지 뻔한데, 우리가 가족인데,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냐. (...) 술 먹고 쌈질이나 하고 다니는 형을 보면 네 맘도 편하지 않을 거 아니냐” 라며, 형의 인생을 염려하는 가족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부탁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추에게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라는 압박이다. “형의 미래는 걱정하면서 제 미래는 걱정 안 해요?”라는 추의 항변에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고유한 삶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그는 금지된 일이며 범죄 행위이기도 하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요구를 거절한다.

 

추가 <18년 동안 감추어온 이 이야기>를 고백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온라인 커뮤니티 <뒷면>이 은밀히 하는 대면 고백 모임이다. 그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와 불확실한 미래에 지쳐 있던 어느 날, <누구나 완벽해 보이기를 원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뒷면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커뮤니티의 슬로건을 발견한다. 그곳의 익명 게시판 <수거함>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와 잘못, 고민과 수치스러운 경험을 털어놓은 글들이 넘쳐난다. 추는 그 사연들을 읽으며 묘한 쾌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경험하고, 점차 더 자극적이고 은밀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헤비유저가 된다.

 

그러나 익명의 고백이 제공하는 쾌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실체, 익명의 가면 뒤에 가려진 사람의 표정과 상태가 궁금해진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고백합니다. 진짜 고백을 경험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진짜 고백을 경험하라는 초대를 받아 얼굴을 마주하는 모임에 참석한다. 여기서 소설은 기억과 고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1. <진짜 고백>이란 무엇인가?

 

추는 18년 동안 감추어온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고 있으므로 그것이 충분히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다르게 판단한다. 고백의 진정성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고통의 크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이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고백하는 순간 말하는 사람에게 있던 발화의 주도권은 듣는 사람에게 넘어간다. 추는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침묵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그들이 기대하는 고백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의 이야기는 형의 죽음과 어머니의 원망으로 이어진다. 자동차 사고로 형이 죽자 어머니는 그 죽음을 단순한 사고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식을 제대로 보듬지 못한 자신의 죄책감을 형의 죽음에 투사하고, 나아가 “형의 인생이 꼬인 것이 추 때문”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라고 욕하며, 그 책임을 추에게 돌린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청중은 이야기의 빈틈을 발견한다. 추는 형을 대신해 공무원 시험을 치렀는지, 아니면 끝내 거절했는지를 분명히 말하지 않는다. 청중은 바로 그 부분을 추궁한다. 고백에 빠진 내용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며, 그렇다면 진짜 고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추의 이야기는 결국 진짜 고백이 아니라 <가짜 고백에 대한 자백>으로 판정되고, 그는 모임에서 퇴출된다.

 

여기서 드러내는 것은 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역설이다. 고백은 감추었던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지만, 때로는 더 중요한 것을 감추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은 잘못을 털어놓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신의 수치와 죄를 고백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치명적인 진실은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백은 진실의 발설인 동시에 은폐의 기술이 될 수 있다.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선택하고 배열하며, 듣는 사람은 그 기억의 누락과 왜곡을 의심한다.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청중 역시 진실 자체를 알고 싶어 한다기보다 타인의 수치와 죄를 확인하고 그로부터 우월감을 얻으려는 것은 아닐까. “경멸은 우월감의 다른 얼굴”이며, 타인의 고백을 듣는 쾌감에는 그러한 심리가 숨어 있다.

 

그렇다면 추는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형을 대신해 공무원 시험을 치렀는지, 치렀다면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그리고 왜 그 사실을 끝내 말하지 못하는지. 추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 침묵을 통해 기억과 고백의 더 깊은 층위로 독자를 이끈다. 기억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저장고가 아니다. 기억은 현재의 자기 이해와 감정에 따라 과거를 재구성하며, 때로는 왜곡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은폐한다. 추의 기억 역시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지키려는 의식과 분리할 수 없다. 말하지 않은 사실이 무엇인지보다 왜 말할 수 없는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까닭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과 함께 제시된 작가의 철학적 에세이 「기억, 고백, 그리고 거울」은 「뒷면」을 읽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작가는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궁전의 우화」를 인용하며 “세상에는 완전히 똑같은 두 개의 물체가 공존할 수 없다”는 명제를 환기한다. 거울은 눈앞의 존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 존재를 복제하고 증식시킨다. 거울 속의 나는 분명 나와 닮았지만 나 자신은 아니다. 거울은 동일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이러한 거울의 역설은 쌍둥이 형제인 추의 존재 조건과 겹쳐진다. 추는 형과 동일한 외형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 동일성 때문에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가족에게 그는 형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존재이며, 형의 인생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존재다. 형과 추는 둘이면서 하나로 취급되고, 하나이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추에게 형은 단순한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성을 위협하는 거울의 이미지다. 자신과 닮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침범하고, 자신의 존재를 형의 그림자 속에 가두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추가 끝내 말하지 않는 진실에는 단순한 죄책감이나 수치심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형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가족의 요구에 대한 저항이며, 형의 삶과 자신의 삶을 분리하고자 하는 존재론적 항변이다. 어머니가 형의 인생을 추에게 전가하듯, 추는 자신의 삶이 형의 삶을 대신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상황을 거부한다. 그가 완전한 고백을 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타인의 시선에 온전히 노출하는 순간, 그는 다시 타인이 규정하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억을 모두 털어놓으라는 요구는 때로 자기 자신을 타인의 판단에 완전히 내맡기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요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향한 추의 외침은 이러한 해석을 더욱 아프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참회의 언어라기보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부과되었던 존재의 부당함을 향한 항변으로 읽힌다. 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은 형을 대신할 수 없는 동생으로서의 무능력이 아니라, 형과 다른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자신의 고유한 삶이었을 것이다.

 

결국 「뒷면」에서 기억과 고백과 거울은 서로 분리된 주제가 아니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을 보존하기보다 현재의 자아에 의해 재구성되고, 고백은 그 기억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시 판단되고 변형된다. 거울은 그 과정에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기 이미지와, 그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으려는 고유한 존재의 갈등을 상징한다. 우리는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구성하고, 타인에게 고백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하지만, 그 설명이 곧 자신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말해진 것의 이면에는 말해지지 않은 것, 드러난 모습의 이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존재의 몫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 「뒷면」은 단순히 인간의 감추어진 비밀이나 부끄러운 과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타인에게 보여주는 얼굴과 그 얼굴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 자신의 간극을 의미한다. 누구나 뒷면을 가지고 있다는 커뮤니티의 슬로건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정작 그 뒷면마저 타인에게 전시하고 판단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진실은 타인에게 모두 설명되고 승인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맺는 말: 말해지지 않는 것, 존재 고유성의 저항

 

짧은 분량의 이 소설은 말과 기억, 고백과 관계의 복잡한 조건을 따라가면서 인간 존재의 고유성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도달한다. 작가가 「기억, 고백, 그리고 거울」이라는 창작 단상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타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타인의 기억과 시선 속에 비친 모습으로, 과연 한 인간의 존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추의 미완의 고백과 고백의 빈틈인 침묵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보하면서도 강렬한 저항의 목소리를 남긴다. 어쩌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의 뒷면을 남김없이 고백하는 일이 아니라, 끝내 타인에게 내어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뒷면을 인정받는 일인지도 모른다.

 

추의 기억은 과거를 객관적으로 복원하는 기록이 아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감추는가에 따라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과정이며, 고백은 자발적 자기 폭로처럼 보이지만 듣는 사람의 기대와 판단이 개입하면서 그 진실성은 다시 심판 받는다. 더욱이 타인의 고백을 요구하는 행위 자체에 경멸과 우월감이라는 쾌감이 숨어있다. 한편 거울은 이 작품의 가장 깊은 층위라고 여겨지는데, 쌍둥이 형제라는 설정은 단순한 가족관계가 아니라 닮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 부정되는 역설을 보여줌으로써 동일성의 환상과 고유성의 위기를 첨예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추의 침묵은 바로 이 동일성의 강요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끝으로 어쩌면 이 작품을 더욱 확장된 생각으로 이끄는 긴장을 말해야겠다. 추의 침묵이 단순히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자신을 타인의 판단으로부터 지키려는 마지막 자기보존의 행위로 볼 것인지 이다. 이 두 해석의 긴장이야말로 소설 「뒷면」을 흥미롭게 만드는 핵심으로 여겨진다. 고백을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자기 존재의 진실을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은 오늘날의 익명성과 자기 노출,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의한 정체성 구성이라고 주장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추의 침묵을 고백의 실패로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의 심판 기준에 머물기에서 이탈하여 그 침묵을 자기 존재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저항으로 읽었다. 모든 것을 말해야만 진실한 인간이 되는가? 타인에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남겨두는 것 역시 자기 존재의 권리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기억과 고백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독립된 자아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다른 차원의 물음을 던진다. 「뒷면」이란 제목도 이런 의미에서 감추어야 할 비밀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전부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자기 존재의 영역이라는 명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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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읽는 힘, 사기열전 - 2천 년 전 고전에서 배우는 70가지 인생 수업
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리텍콘텐츠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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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 즉 인생이란 시대와 인연이 짜놓은 판 위에서 펼쳐지는 운명의 합작품이다!”

 

<열전(列傳)>은 《사기(史記)》 130편 중 70편을 구성하는 역사의 진정한 동력인 개인들- 장수, 상인, 학자, 자객, 등등 - 에 대한 생생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제왕과 제후들을 다루는 <본기(本紀)>나 <세가(世家)>와 달리 사람 냄새가 가득해서 그들의 행적은 더욱 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밀착된 교훈들로 다가온다. 특히 사마천의 현실주의에 기반한 관점은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실체적 양태들이어서 도덕적 이상과 같은 괴리감을 덜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이 책에서 우리들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인식과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게도 되는데, 유방을 도와 한나라의 제국통일 공신들인 명장 한신이나 책사 범저가 시기심으로 탁월한 재능의 인재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장면들처럼 인간의 다면성을 새삼스레 발견하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깊어지기도 한다. 아마 오늘의 언어로 해석한 이 책을 읽게 되면 “사람을 읽는 힘”이란 것에 대한 통찰력을 조금은 더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삶을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란 무엇일까에 대한 사유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보며 비극적 인간드라마들에서 펼쳐지는 세상의 이치에 대한 해독의 순간일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감춰진 이해관계와 악의를 꿰뚫는 것의 한계를 직시하며 인간의 가변성마저 계산하는 종합적 지혜란 것이 과연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재능이 넘치고 가치 있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지라도 주변의 인간들과 세상은 그것에 온전한 보상을 하기는커녕 온갖 질투와 음모, 나아가 죽음으로 몰아가기가 일쑤인 실상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 세상이기에 이러한 물음들로 가득한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타인과의 관계, 이 세상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하는 삶의 가치를 가늠해보는 시간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문학자 김태현 박사가 박제된 옛 지식으로 대하곤 하는 2000년 전의 고전 《사기 열전》에 오늘이라는 현재의 숨을 불어넣어 생동하는 실천적 지식으로서 새로운 언어로 해석하여 쓴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총 70편의 열전을 야망과 처세에서부터 인생과 허무에 이르는 7장으로 범주화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과 마주케 함으로써 삶의 가치와 사유의 시선을 생각토록 이끈다. 그것은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 어떻게 그 성취로 쥐어진 권력과 재화를 절제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의해 발휘되는 힘의 행사를 멈추어야 할 시기를 선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인 범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세상의 이치란 “해가 중천에 뜨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이 당연함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향한 경고의 목소리일 것이다.

 

한편 희대의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회자되곤 하는 훗날 진시황이 되는 정의 친아비인 여불위의 얘기는 범저가 멈출 때를 알았음에 반해 여불위는 권력의 욕망에 눈이 멀어 그만 멈추지를 못한다. 복중에 자신의 아이를 가진 애첩을 진나라 왕에게 들임으로써 나라를 자신의 손아귀에 쥐려했던 야망은 바로 그 야심이 자신의 운명까지 파멸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욕심이란 그칠 줄 모른다. 세상을 온통 기회와 거래 관계라는 잣대로 들이댔을 때 자신조차 그 관계로 치환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아무튼 인간은 그 한계를 인식하는 데 서툴기 그지없는 존재이기에, 더욱 인간관계와 세상의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보려는 지혜가 필요한 것일 게다.

 

“天下凞凞 皆爲利來 ; 天下壤壤 皆爲利往 (천하희희 개위리래 ; 천하양양 개위리왕) 천하가 떠들썩한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하여 오고, 천하가 북적대는 것은 모두 이익을 위하여 간다." - <화식열전(貨殖列傳)>, p47

 

이 문장은 오늘과 같이 부가 신뢰와 능력을 대신하는 시대를 긍정하는 하나의 목소리일 수 있겠다. 이는 부를 일군 거상들을 그저 칭송하거나 이익에 몰두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시대를 읽는 지혜와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력의 결합을 통한 자유의 쟁취와 존엄한 삶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면목을 긍정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부정하기보다 이를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로 인정하고 긍정함으로써 그 부유함이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시대의 동력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자연의 섭리, 순응을 긍정하는 얘기도 있지만, 열전에는 온통 시기와 질투, 권력의 비정함처럼 ‘나’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타자를 비롯한 시간의 거대한 흐름, 보이지 않는 적들에 의해 참담한 운명에 직면한 인간의 이야기들로 수두룩하다.

 


비범한 능력을 지니면 이를 두려워한 나머지 배제되거나, 혁혁한 전쟁의 승리를 안긴 장수를 기다리는 것은 열광적 환영이나 귀중한 보상이 아니라 간신들의 시기와 음모로 죽음이 기다리기도 한다. 또한 오국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어 제나라 정벌에 나섰던 기원전 284년의 연나라 상장군 악의(樂毅)가 70여성을 함락하고 나머지 두 성의 함락에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이를 악의가 일부러 정복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제왕이 되기 위해 그곳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한다는 반역의 행위로 몰아 국가의 운명을 위태로움에 빠지게 하는 간신배들로 득시글대기도 한다. 전쟁터에서 해임된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하고 연나라는 제나라에게 다시 함락시켰던 70여 성을 빼앗기고 자신들의 안위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만다.

 

"차가운 권력의 속성은 타인을 포용하는 도덕적 관념보다 상대를 짓밟는 치밀한 계산에 먼저 반응한다."  - <위기 무안후 열전>, p119

 

나는 <악의 열전(樂毅列傳)>, 이 이야기에서 지금의 한국 정치현실을 본다. 그 어느 때보다 국제정세가 우리에게 이로운 시기가 아니다. 진정한 리더가 없을 때 그토록 비난하던 간신들은 국가가 위난에 닥치면 그저 나라를 팔아먹고 적에 빌붙어 자기 배를 채우려 국가배신을 일삼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우리 역사는 이러한 무리들로 인해 오랜 시간 열등국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자 김태현은 “상황 변화에 따라 튀어나올 본능적인 방어기제와 질투를 미리 계산”할 줄 알아야 하며, “성취가 가져올 타인의 시기심과 리더의 불안을 세밀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의 교훈을 말하지만, 타인의 불안과 질투까지 미리 가늠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실천적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물론 이러한 진단은 인간의 저열한 본성을 인정한다면, 그것마저 가늠하는 예지를 지녀야한다는 말일 테지만, 지금까지 보여 온 인간행태를 볼 때 과연 인간 능력의 한계로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대조적인 두 열전이 있는데, <순리 열전(循吏列傳)>과 <혹리열전(酷吏列傳)>이다. 요즘 한국의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에 매몰돼 정의롭지 못한 판결을 한다는 의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이는 법을 다루는 공직자들이 어떤 시선으로 법을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들일 것이다. 사마천은 <순리 열전(循吏列傳)>에 이치에 맞는 다스림, 즉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진정한 공직자로서 법이란 어두운 밤길을 걷는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밝혀주는 길잡이로 인식”하고 있으며, <혹리열전(酷吏列傳)>의 인물들은 “법이란 정치적 상대의 목을 치는 날카로운 칼”로서, “법전을 무기로 삼아 국가의 고위관리부터 국민까지 가차 없이 베어 넘기는 자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법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 정치적 이익을 위해 법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리들은 법의 이치를 잃어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그 칼을 쥔 자 역시 필연적으로 그 칼날에 베이고 만다는 준엄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 판사들은 순리인가, 혹리인가. 그들만이 자신을 알 것이다. 휘두른 그 법은 그대로 자신을 겨눌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과연 자성(自省)의 지혜가 미칠까 모르겠다.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은 노자와 한비자를 대비하여 이들 명쾌한 사상과 재능이 권력의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본성의 양면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인데, 엄격한 법(法), 통치기술(術), 절대적 권위인 세(勢)를 주장함으로써 쇠락하는 조국 한나라의 부국강병을 호소했던 한비(韓非)가 쓴 “다섯 좀 벌레를 비판한 <오두(五蠹)〉”는 그대로 오늘 한국사회의 오적을 떠올리게 한다. 법피아, 검피아에서, 핵마피아, 종교마피아, 언론마피아, 재벌마피아에 이르는 이 사회를 더럽히는 신오적(新五賊)은 법치의 진정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늘의 우리현실을 반성토록 한다. 물론 사마천은 한비를 통해 높은 재능과 사상, 실천력이 권력자들의 경계심을 초래, 화를 부른다는 경고로서 서술되고 있지만, 한비가 동문수학한 재상 이사의 간사한 음모와 계략에 의해 독배로 사살되는 것은 또 다른 경고로 다가온다. 한 탁월한 인물이 얄팍한 투기에 의해 파멸 당할 때 제국 진나라 또한 패망의 길로 들어섰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 같다. 끈질긴 기득권 패거리들이 항시 저들보다 재능 있는 인물을 어떻게 세상에서 몰아냈는지를 안다면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세태에 대한 이해를 한층 진지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라는 교훈으로 새기고 싶어진다.


“臣恐大王之投杼也(신공대왕지투저야; 신은 대왕께서 끝내 베틀의 북을 내던지실까 두렵습니다), 아무리 굳은 믿음도 같은 의심과 모함이 반복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 <저리자 감무 열전>, p289

 

열전을 이렇게 읽다보면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들이 모두 이를 시기하거나 자기 권력의 유지에 불안을 느낀 집단이나 군주에 의해 척살되거나 자결이 강요되고, 죽음에 내몰린 역사가 인간들의 그치지 않는 행태 바로 그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간질과 변덕, 의심과 곡해, 배신과 시기에 인간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목격하게 된다. 권력과 부 앞에 형제도, 부모도, 오랜 우정을 나눈 벗도 모두 잔악함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하물며 인간의 신체 질병을 진단치료 하는 신의(神醫)로 불리는 편작(扁鵲)조차 열등감에 이를 시기하던 어의 이혜라는 인물에 의해 길가에서 주살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도사린 그 수치스러운 잔악성이 얼마나 깊게 인간 세계에 깃든 것인지에 진저리 치게 한다.

 

사마천은 이것이 인간이기에 이조차 삶의 관계에서 종합적으로 헤아리는 지혜를 지녀야 할 것이라 말하는 듯해서 산다는 것, 이 세계에서 함께 산다는 것의 지독한 염오(厭惡)를 느끼게 된다. 하물며 노자(老子)가 “아름답고 좋은 것은 상서롭지 못한 그릇이다.(不祥之器)”라 말 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재앙의 씨앗임을 말하는 것처럼, 타인의 변변치 못한 용렬(庸劣)한 시기심까지 헤아리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란 것은 왠지 역겹기조차 하다. 아무튼 2000년이란 시간을 건너온 지혜의 긴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선택과 두려움, 성공과 몰락이라는 오늘의 우리와 닮은 형상의 삶들로부터 인간을 다시 묻게 된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거나 마주하게 될 중요한 삶의 문제들을 수두룩하게 접할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예측 할 수 없는 변화와 경쟁, 인간관계의 갈등과 집단 안의 이해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삶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우리의 판단을 조금은 겸손하게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어 주리라 생각된다. 아무쪼록 “인생의 방향을 가늠해보는 하나의 인간학 지도”라 해도 될 것 같다. <사기열전>을 원(原)저술로 읽을 때의 지루함을 떨쳐내고 오늘 우리들의 실천적 언어로 다시 읽는 기회가 되었다. 인간과 삶의 본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분명 인생의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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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 ㅣ 트리플 37
임솔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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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들의 삶이란 상기하고 기억하고 회상하고 상상하며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속 세 편 단편들의 주인공인 지윤, 도희, 민영의 이야기들은 분명 현실 속 삶의 양상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마음속에 지각되는 느낌과 생각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말과 행위란 이러한 것들의 외형적 표현양태일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말로 진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술되지 못한 것들은 그 말들과 말들의 사이, 말의 이면 속에서 그것의 의미가 해독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들 존재하는 것들의 기억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는, 어쩌면 무의식이거나 전의식에 해방의 통로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공감과 배려의 언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의 각 단편작품들은 두 번 읽게 된다. 소설집에 실려 있는 에세이 「내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에 서술된 내용들은 각 작품들의 보충이거나 장면의 사실들, 삭제된 장면들의 기록이다. 소설의 이미지에 가닿는 하나의 짧은 단서일수도 있고, 배경과 대사의 배후적, 아니면 무의식의 연결지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 한다는 자극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각 작품에 대한 처음의 독해가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더 깊게 문장들에 다가가는 시도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드넓은 대합실이 펼쳐진다. 지윤은 겁부터 난다. 이렇게 드넓은 장소에서 지윤은 늘 호흡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 「금빛 베드 러너」, p17

 

「금빛 베드 러너」의 화자인 지윤은 타자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결여를 지각함으로써 모든 관계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했던 삶의 장면들을 반추한다. 그러한 장면을 더듬으며 엄마에게 봉투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곤 엄마가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검사 결과를 받은 지윤은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저 멀리 밀쳐놓고 암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고 말한다.

 

엄마에게 받았던 재사용된 듯한 흰 봉투에 쓰여있던 “힘 내세요.”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와 봉투 속 7년 전 사랑했던 연인에게 부치지 않았던 편지의 사연이 흐르고,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서울 호캉스를 함께하는 계획을 실행한다.

 

지윤은 서울 나들이에서 엄마와 그림 전시도 둘러보며, 엄마도 좋아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엄마는 기침과 고열 증세를 보이고, 감기약을 찾아 약국을 찾지만 엄마가 말했던 ‘화이투벤’ 상표의 약이 없다. 지윤은 당혹스러움에 “두 주먹을 꼭 쥔다. 평정을 잃을 때 지윤이 조건반사처럼 하는 동작”이다. 지윤은 다시 약국을 찾아 다른 이름의 감기약을 사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에게 이러한 판단은 자신을 이겨내는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지윤이 타인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결핍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힘겨운 노력이다. 그녀의 표정에 웃음밖에 없다는 자폐스펙트럼 진단검사자의 말처럼 무감각하고 무표정해 보이는 자신으로 인해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관계에 긍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적으로 오랜 동안 훈련한 표정이다. 지윤은 이윽고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자신에게 자폐스펙트럼과 관련한 증상이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잘 알고 돌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낀다.

 

애정을 구걸하는 지윤의 연애편지 속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네 마음을 모르겠다고. 사랑한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적혀 있었”던 구질구질한 말들이 마치 자신이 쓴 것 같았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은 지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마음으로 지윤에게 닿는다. 엄마는 지윤에게 이제 “안 그럴 거지?”라고 다짐하듯 묻는다. 아마 지윤은 세상의 잣대가 들이대는 것에 더는 자신을 맞추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직접 볼 리 없는 곳들을 함께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상담하는 지윤에게 자폐스펙트럼이 아니라며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지닌 사람들을 ‘걔’들이라고 마치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된 존재들로 치부하듯 말하는 상담사의 위장된 배려, 기만의 언어에 묻어있는 “자신의 무지에서 묻어나는 미량의 악의”를 느끼는 것처럼, 우리들은 은연중에 사람을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화하여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시선에 노출된 사람은 그 범상치 않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피로감은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지로 작동하게 된다. 지윤의 엄마가 딸 지윤에게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말은 이해의 말이고 사랑의 언어이며 화해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지윤에게 평온이 깃들었을까?

 

“엄마가 왜 하필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갈 수 있는 곳이 그만큼 없었던 거겠지. 도희도 갈 곳을 더는 알지 못했다. 도희는 돌아갔다.”

-「도희의 시간」, p61

 

「도희의 한 시간」은 어린 시절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던 기억으로 시작된다. 등산 바지, 바람막이 점퍼, 기능성 옷을 입고 나선 엄마를 따라가는 낯선 여행은 아이에게 불안감을 드리운 무엇이었던 것 같다. “왜 하필 저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왔을까.” 그래서 덮쳐오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아이는 꾸준히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이 타인을 해독하려는 힘겨운 노력의 장면이 겹치는 듯하다. 일출을 보고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되뇌다가, 오색 파라솔을 대여해 준 엄마의 행위에 낯설어한다, 고개를 들어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어린 도희의 마음에 깃들었던 그 감정을 우리들은 안다.

 


정동진에서 엄마와 함께했던 날의 기억의 장면들은 온통 엄마 표정의 변화를 흘깃거리며 두려움과 무서움,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이 열차여행의 장면은 몇 몇 수녀들이 교사를 하는 고등학교 시절, 막 개통했던 KTX를 타고 수업을 거른 채 한 시간 남짓의 여정에 외로움과 죽음이 어우러진 사연과 순간의 생각들의 장면들, 그리곤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던 시절 애인이 이별 통보를 하면 무작정 열차에 올라 서울로 향하고, 빈 백팩을 매고 마중 나오던 애인과의 반복된 여정의 시큼한 나날들, 그리곤 옆 좌석에 앉게 된 노수녀와의 짧은 대화들, 진주와 포항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열차 칸이 분리되어 갈아타야 했을 때 칸을 바꿔 타야 하는 노수녀가 어느 순간 도희를 발견하고는 “왜 또 여기냐고” 묻는 장면은 마치 생이란 반복되는 어긋남, 두려움과 곤혹으로 이루어졌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내게 다가왔다. 평론가 전청림이 해설에서 “불가사의한 바깥의 역량”, 그것의 미덕에 대한 깨달음의 장면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도희의 ‘한 시간’의 파노라마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억의 장면들처럼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묻혀있던 생의 엄청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길어내 현실 속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의식의 표면에 해방되어 새롭게 해석되도록 하는 것만 같다. 인간의 이러한 역동적 정신의 작용을 나는 거의 마주하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일 테다. 조금 느린 일반 열차를 이정표 없이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을 떠올리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좀처럼 저 심연에 켜켜이 쌓여있는 의식하지 않았던 장면들과 이제는 마주해야 할 것만 같다. 그 시간은 아마 너그러운 화해와 이해, 사랑이라는 공감의 장면들로 이뤄질 것이다.

 

“살아 본적도 없는 집을 이토록 아늑하게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다. 민영은 없는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 「쉴 곳」, p80

 

「쉴 곳」은 세 작품 중에서 내겐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민영은 자신의 성장기를 보듬어주었던 열여덟 살 터울의 오빠 민기와 그의 아내 정화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촌스럽지만 층고가 높아 옹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 집(펜션)에 늦은 밤 도착한다. “정화와 민기의 집은 환했다.”, 민영을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의 불빛처럼, 그래서 민영은 긴장감이 탁 풀리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정화와 민기는 극히 대조적 성향의 사람들이고, 이제 쉰 줄에 들어선 그들 내외의 관계는 서걱거린다.

 

오빠의 얼굴이 낯설다. 코 성형수술을 한 탓에 얼굴의 전체적 이미지가 변한 것이다. 민영은 그런 민기를 걱정한다. 민영은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면 자해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데, 어린 시절 보았던 “거울 조각들에 묻어 있던 핏자국”의 기억부터 학습지를 다 하지 않아 정화의 매보다 훨씬 약한 손바닥 매를 맞았을 때 마침 집에 들어 선 정화가 불같이 “당신이 뭔데 우리 애를 때려?”라고 대거리를 하던 정화를 떠올린다.

 

그렇게 정원 밭의 두더지 굴을 마구 밟아대던 민기의 폭력성의 기억, 사람들과 무던하게 지내고 싶어 나서거나 끼어들지 않는 정화의 성향, 그것을 정화가 의견이 없는 무심과 타자에 대한 배격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무시와 배제로 행동함으로써 소외된 삶이된 신산한 사연이 이어진다. 정화가 민영을 지칭하던 “우리 애”처럼, 정화는 민영의 코가 자신을 닮았음을 말하듯 민영은 그들에겐 자식과 같은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아마 민영도 이러한 표현과 감성들을 모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민영의 성향은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데,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퇴사했다.”는 민영의 표현처럼, 책임 떠넘기기, 상대 모욕하기, 적반하장의 대거리처럼 세상의 태도는 정말 불가항력일 때가 많다. 민영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세상에 반응하려 하지 않지만 손 떨림이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억압된 감정, 숨기고 참아내려는 마음의 지옥은 신체의 증상으로 드러나 고통을 알린다. 민영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손을 감추고, 떨려오는 턱을 제어하기 위해 상대와 대화하기도 전에 긴장이 몰려온다. 그녀는 아예 말을 삼가게 되고, 혼자의 삶을 선택한다.

 

그럴 때면 민영은 정화와 민기가 억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시끄러움 속에 졸음이 오는 그런 평온을 찾아 그들의 집을 찾는다. 그리곤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민영과 정화가 차를 몰고 나갈 때 민영과 정화의 대화는 지지해주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도의 삶을 밀고나가는 것으로서 세계와의 주도적 대면의 시도가 지닌 아름다운 장면으로 내게 남았다. 민영은 액셀을 밟기 시작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번화가를 지나치고는 이내 멀리 갈 거라고 민영은 말한다. “좋네 멀리 가보자”,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멀리 간다는 것. 아마 두려움에 대한 적응, 그것의 돌파는 사실 누구나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본다. 이내 정화가 말한다. “민영아 천천히 가자, 언니 멀미나.” 이때 민영이 말한다.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그래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으로 일체가 되면 울렁거림, 두려움과 긴장이 멀리 떠나버릴 수 있다.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 봐, *달걀 꺼내듯이.”

 

긴장한 정화는 웅덩이가 나타나자 크게 휘청거리고 급브레이크 밟는다. 그녀의 손이 떨고 있다. 민영은 오빠 민기에게 배웠던 말, “걱정 마. 아무렇지 않아.”라고 말한다. ‘쉴 곳’은 이처럼 서로를 들여다보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일 테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아웅다웅하지만 그래서 그 고통과 욕망과 결점과 변화를 서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곳. 그리고 마음의 응원을 해주는 이들이 있는 곳, 그런 이들이 있는 곳은 언제든 졸음에 겨워 누울 수 있는 곳일 터이다. 민영과 정화, 민기가 있는 곳, 밤고구마를 좋아하지만 민영을 위해 물컹한 호박고구마를 따로 준비해 내놓아주는 곳, 환영하고 가끔 둥지를 떠나 멀리 낯선 곳으로 동행해 줄 이가 있는 곳 말이다. “현실에 없었던 장면, 오래오래 보고 싶어지는 장면”이어서였을까? 그래 “섬세하게 작은 세계를 가꾸어나가는 듯한 정원사의 태도”가 더없이 나의 내면을 어떤 휴식의 평온함으로 채워준 소설로 남을 것 같다. 없는 기억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공감의 언어로 생각하는 것, 아마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집은 그런 언어로 가득채워진 작품집이라 해도 될 것이다.

 


* 달걀 꺼내듯이: 이 문장은 정화가 닭장에서 달걀을 민영에게 꺼내보라 했을 때, 암탉이 노려보는 데 부담을 느낀 민영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정화가 민영에게 건넸던 말이다.

“얘가 날 쳐다보는데. 그냥 꺼내면 돼. 그냥 어떻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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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AI, 신 - 인류학으로 모험하는 도덕적 상상력
웹 킨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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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상대주의와 AI 윤리의 회피

— 웹 킨의 『동물, AI, 신』에 대한 비판적 독해

 

“기술 발전이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포스트휴먼, 유토피아가 올까? 아니면 묵시록적 특이점이 올까? 아마도 한 발 물러나자. 언뜻 보기와 달리 이것이 전대미문의 상황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 인간과 비인간이 유의미한 도덕 관계를 맺어온 역사는 꽤 길다. 인간과 사이보그 같은 기술은 물론, 인간에 가까운 동물들, 인간에 준하는 귀신들, 인간을 뛰어넘는 신과 언제나 함께해왔다.” -〈서문> 9쪽

 

웹 킨의 『동물, AI, 신』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탐색하는 책이다. 저자는 인간이 동물과 신, 귀신, 각종 기계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끊임없이 재설정되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로봇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공포와 열광 역시 전대미문의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닮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존재를 상상해 왔고, 그 존재에 권능과 의지, 심지어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 역사적, 문화인류학적 선례가 AI의 윤리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접근은 분명 의미가 있다. 인간이 기계에 마음을 투사하고, 동물에게 인간과 유사한 감정과 의도를 읽어내며, 자신이 만든 인공물에 자율적인 행위주체성을 부여하는 현상을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순전히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낯선 기술에 대한 두려움에도 오랜 문화적 기억과 상징적 관습이 개입한다. 그러므로 AI를 둘러싼 논쟁에서 인간 자신의 인식과 감정, 사회적 관계를 살피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과거에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불분명했다는 사실이 오늘날 AI를 둘러싼 윤리적 우려의 심각성을 약화시키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과거에 인간이 신의 권능을 믿었고, 동물과 도덕적 관계를 맺었으며,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해 살아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인공지능의 윤리적 지위를 판단하는 데 어떤 직접적인 답을 제공하는가? 역사적으로 참고할 선례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현재의 기술이 과거의 사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 인간이 오래전부터 비인간 존재와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은 AI 윤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그 윤리적 검토를 생략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저자는 AI를 둘러싼 도덕적 패닉과 유토피아적 열광을 모두 경계하는 듯 발언한다. 인간이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전대미문의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AI에 대한 우려를 단순히 낯선 존재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반응, 이를테면 “로봇과 인공지능을 둘러싼 ‘도덕적 혼동’이나 ‘요란한 호들갑’”(126쪽)으로 설명한다면,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가려질 수 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AI가 단지 인간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언어를 구사하고 지식을 종합하며 복잡한 판단과 행동을 수행하는 시스템이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날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역량이 사회의 핵심적인 의사결정과 권력의 배분에 개입할 가능성이 우려의 대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I가 실제로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초월이 언제, 어느 정도로 실현될지 불확실하더라도, 그 가능성과 현재 확인되는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관리할 것인지가 문제다. 불확실성은 윤리적 검토를 유보하는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검토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저자가 AI를 연극배우나 접신 무당, 점쟁이와 비교하며 인간의 말투와 사회적 행동에 내재된 패턴을 이용하는 존재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견된다. 이러한 비교는 AI가 인간에게 영험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 AI의 능력과 위험이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영험하다고 믿는 것과 그 대상이 실제로 복잡한 정보처리 능력과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AI가 인간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초능력이나 독립적인 의식의 증거는 아니다. 그렇지만 작동 원리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시스템의 영향까지 심리적 투사, 투사와 내면화의 위험이라는 상호작용의 관계만으로 돌릴 수도 없다. 인간이 AI에 의인화된 이미지를 투사하는 문제와 AI가 실제로 인간의 판단, 행동,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별도로 검토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선례를 통해 오늘날의 기술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필요하지만, 선례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이미 해명한 것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가 오래되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기술이 그 관계를 어떤 규모와 속도, 권력 구조 속에서 변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거의 신과 동물, 생명유지 장치는 현대의 범용 인공지능과 동일한 조건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유사성은 비교의 근거이지, 동일성의 증명이 아니다. 저자 웹킨은 AI 윤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하나의 존재 사실로서 소개하지만 그 규범적 근거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다. 그 결과 윤리적 우려를 단순히 기술에 대한 낯섦이나 문화적 투사의 문제로 환원해 이해할 위험을 야기한다.

 

2. 사회적 관계의 윤리와 보편적 판단의 기준

 

웹 킨의 논의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도덕성이 추상적인 원칙이나 고립된 행위자의 판단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인간이 실제로 누구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가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루나족이 개를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는 존재로 대하거나, 크리족이 곰을 존중해야 할 근(近)인간으로 이해하는 사례는 이러한 관점을 보여준다. 동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걸며, 상대방의 반응을 해석하는 행위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도덕적 관계를 형성한다. 관계의 방식이 달라지면 의무의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관찰은 도덕성을 추상적 규칙의 집합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에 중요한 수정을 가한다. 실제의 윤리적 판단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인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누구에게 책임을 느끼는가는 문화와 역사, 경제적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저자가 트롤리 딜레마와 같은 사고실험을 비판하며 실제 인간의 관계와 대화, 사정의 청취를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의 도덕적 갈등은 고립된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방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성이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과 도덕적 정당성이 관계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은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은 가까운 사람에게 더 큰 애착과 책임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친밀한 관계가 언제나 도덕적 판단의 정당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차별, 부당한 희생의 강요 역시 사회적으로 익숙한 관계와 관습을 통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관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내’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 관계의 얽힘으로서 일인칭 관점이라 부르며, 도덕성은 이 일인칭의 관점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삼인칭은 냉엄한 객관주의적 관점이라 지칭한다. 이러한 관점은 자신의 이익이나 감정의 친밀성에만 의존하지 않고 보편화할 수 있는 도덕 원칙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칸트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준칙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저자는 도덕적 삶이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시스템에 의존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주장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가 실제 삶에서 구현되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관습, 사회적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특정한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관습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시스템이 도덕적 삶의 조건이라는 주장으로부터, 그 시스템이 승인하는 모든 가치가 정당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가령 특정 사회에서 동물에 대한 잔혹한 대우가 관습적으로 허용된다고 해서 그 관습을 해당 사회의 문화적 특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 역시 오랜 역사와 사회적 승인을 근거로 면책될 수 없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일과 그 차이를 도덕적으로 승인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는 윤리와 모든 판단을 맥락 속에 상대화하는 윤리는 동일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웹 킨의 논의는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과 긴장 관계에 놓인다. 저자가 실제로 모든 보편적 도덕 원칙을 부정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다양한 삶의 방식과 도덕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목적은 특정 문화의 기준을 인류 전체의 기준으로 일반화하는 오류를 경계하려는 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편적 판단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제한하는지, 그리고 상이한 관습 사이의 충돌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웹 킨은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다.

 

보편적 윤리는 모든 사회가 동일한 관습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공존하더라도 타인의 생명과 존엄성, 자유와 안전을 어떤 방식으로 보호할 것인지 질문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편적 원칙은 구체적 상황을 무시하는 추상적 명령이어서는 안 되지만, 구체적 상황을 이유로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임시적 규칙에 그쳐서도 안 된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면서도 그 차이가 정당화할 수 없는 피해와 지배를 비판할 기준이 필요하다.

 

AI 윤리에서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AI 시스템은 특정 개인과 관계를 맺는 동시에 수많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정 사용자에게 친절하고 유용한 AI가 다른 사람에게는 차별적이거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용자가 AI와 친밀감을 형성하고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경험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정당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개별적 관계의 성공과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은 구별되어야 한다.

 

AI의 도덕성을 판단할 때 필요한 것은 관계의 맥락을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그 관계가 누구에게 어떤 이익과 피해를 가져오는지 폭넓게 검토하는 일이다. 사용자와 시스템 사이의 상호작용만이 아니라 그 시스템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 제삼자, 취약한 집단, 미래 세대까지 고려해야 한다. 관계의 윤리를 강조하려면 오히려 관계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형성된 신뢰가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가려서는 안 된다.

 


3. AI의 도덕적 지위와 책임 귀속 문제

 

『동물, AI, 신』에서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볼 부분은 인간과 비인간의 도덕적 경계가 실제로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논의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켰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하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은 어떤 기준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뇌사자의 장기기증은 어떤 조건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이러한 사례는 기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할 때 기존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얼마나 복잡해지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의 사례는 행위와 책임 사이의 관계를 다시 묻게 한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자동차는 프로그램된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했을 뿐이라는 설명은 사고의 인과관계를 일부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과 책임을 귀속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자동차의 작동이 알고리즘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그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학습시키며 배포하고 감독한 사람과 조직의 책임을 검토해야 한다. 기술적 과정이 복잡해질수록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구조를 더 정교하게 규명해야 한다. 웹 킨은 이 자율주행 자동차의 도덕적 책임 소재의 유무에 대한 적극적인 윤리검토를 하지 않고, 다만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책임의식의 사례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문제는 AI의 도덕적 지위를 논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AI가 도덕적 판단처럼 보이는 결과를 산출한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 행위주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대로 AI가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의식이나 감정을 지녔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AI의 모든 행위를 윤리적 검토에서 제외할 수도 없다. 여기서는 적어도 세 가지 질문을 구분해야 한다. AI가 도덕적 고려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가(AI 시스템의 윤리적 평가), AI가 도덕적 판단을 수행할 수 있는가(AI의 도덕적 행위 주체성; 의식소유 여부), 그리고 AI의 행위에 대한 책임(AI의 개발 운영 주체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세 질문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하지 않다.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나 이해관계가 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곧 책임을 질 수 있는 행위주체라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시스템이 인간에게 중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시스템에 인간과 동일한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 시스템의 설계와 운용을 엄격하게 규율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따라서 AI 윤리는 AI를 인간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재의 AI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개입하는지, 어떤 위험을 발생시키는지, 그리고 그 위험을 예방하고 통제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AI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철학적 논쟁이 해결될 때까지 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검토를 미룰 이유는 없다.

 

저자는 로봇과 AI의 도덕적 지위가 경험론적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사회적 기술과 지식에 어떻게 의존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이 AI에 행위주체성을 투사하고, 그 결과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잊을 위험을 지적한다. 이러한 통찰은 AI와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자기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술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지만, 동시에 그 기술에 판단을 위임하면서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약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의 질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AI가 편향된 자료를 학습하고 차별적 결과를 산출하거나, 사용자의 의존성을 유도하고, 인간의 판단을 부당하게 조종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문제를 사용자가 AI와 맺는 관계의 질로만 설명한다면, 기술을 설계하고 공급한 주체의 책임이 흐려질 수 있다. 사용자가 위험한 시스템과 관계를 맺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요구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생산자와 운영자의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AI 시스템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AI의 기술적 특성을 무시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기술 체계에서 책임이 분산되고 불분명해지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이다. 개발자, 기업, 배포자, 운영자, 사용자에게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책임의 범위는 각자의 권한과 예측 가능성, 통제 능력에 따라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AI가 독립적인 판단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누가 그 판단의 조건을 만들었고 누가 그 결과로 이익을 얻으며 누가 피해를 감당하는지를 더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여기서 윤리적 검증은 기술 발전의 장애물이 아니라 기술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위한 조건이다. 개발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유로 검증의 시간과 비용을 불필요한 부담으로 취급한다면, 기술의 편익은 사유화되고 위험과 피해는 사회 전체에 전가될 수 있다. 특정 기업이나 국가가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과 그 기술이 인류 전체에 정당한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은 동일한 목표가 아니다. AI 윤리는 기술을 얼마나 빠르게 발전시킬 것인가 만이 아니라, 그 발전의 방향과 권한을 누가 결정하며 그 결과에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문제다.

 

4. 맺음 말 : 역사,문화적 인간 비인간 관계의 다양성의 윤리가 AI의 윤리적 정당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문화인류학적 윤리 판단의 한계)

 

결국 웹 킨의 인류학적 접근은 AI를 둘러싼 인간의 반응과 관계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설명이 AI의 실제 역량과 위험에 대한 평가, 보편적 윤리 원칙의 정립, 책임의 귀속 문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인간이 비인간 존재와 관계를 맺어온 역사는 AI 윤리를 이해하기 위한 비교의 자원이지만, 그 자체가 윤리적 정당성을 보증하는 규범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물어야 할 것은 인간이 과거에 무엇을 신성하게 여겼으며 어떤 존재를 도덕적 관계의 대상으로 삼았는가 만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이 어떤 권능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 권능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책임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역사적 경험을 참조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위험을 과거의 익숙함으로 덮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AI가 인간을 닮았다는 사실은 윤리적 검토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인간이 AI에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투사한다는 사실 역시 AI의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투사와 기술의 실제 역량을 구별하고, 기술을 둘러싼 권력과 책임의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면서도 그 기술 자체의 위험과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오늘날 AI 윤리의 과제이며, 웹 킨의 논의가 더 깊이 답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웹 킨은 관계 중심적 접근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AI의 도덕적 지위를 인간화라는 지극히 성급하고 편의적으로 단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편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더라도 그 원칙의 구체적 적용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정당화 할 수 있는 보편적 원칙의 공유 문제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문화인류학적 관계성이라는 상호작용과 도덕성 정당화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학적 설명이 제아무리 설득력이 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AI시스템이 정당한지, 어떤 위험을 허용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는 결정되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적 설명이 우리들이 윤리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분명 풍부한 시야를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AI가 초래하는 문제의 정당성이나 책임의 소재까지 결정해 주지 않는다. 결국 웹 킨의 글은 다양한 상황(민족, 지역, 동양과 서양 등의 차이)에 적합한 윤리적 감수성을 저마다 갖추고 있기에 AI나 지능 로봇을 수용하는 도덕적 감각도 다르다는 낙관적 견해를 보인다. 아마 그렇기에 웹 킨은 “인간 반응은 언제나 기존 관습, 제도, 역사적 기억을 원용하기 마련이기에 오늘날 신기술을 두고 벌어지는 ‘호들갑’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p146) 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AI에 대한 우려의 윤리적 물음이 제기되는 것은 페티시즘의 논리에 의한 자아감의 투사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지나치게 심리적 관점에 매몰되어 AI라는 인류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거시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것 같다. 웹 킨의 인식은 AI를 단지 “말뭉치로부터 통계적 패턴을 발견하여 짜깁기하는 확률적 앵무새”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AI는 이미 자율 학습을 통한 인간에게 낯선 자기 생성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웹 킨의 글의 마지막 쪽에서 “몇몇 소수가 신의 대리자, 혹은 알고리즘 독점자로 행세하는 것을 모두 묵인한다면 모를까, 인류 전체가 그 따위를 믿으리라 기대하지 마시라.” 라며 득의에 차 자신의 지성만으로 AI 따위가 도덕적 일탈을 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는 작금의 자본주의적 경쟁 논리의 급진적으로 추진되는 AI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역사적 선례를 강조함으로써 AI의 새로운 기술적 역량과 실존적 위험을 과거의 경험 속에 흡수해버리고, 도덕성을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맥락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편적 윤리 원칙과 책임의 기준을 약화시켜 버리고 있으며, AI를 둘러싼 인간의 투사와 의인화를 비판하면서 정작 AI를 설계하고 운용하는 주체들의 책임, 그리고 AI 시스템 자체의 행위와 위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아마 설득력 있는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한계 일 것이다.


*보론(補論) : 웹 킨의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지니는 한계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AI가 "인간에 가까워질수록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골짜기로 가라앉듯 떨어지며 혐오감"을 보이는 것을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 불렀다. 즉 인간과의 유사성 정도에 따른 호감과 혐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아마 웹 킨이 인류학적, 역사학적 관점으로 오늘의 AI 도덕성의 문제를 검토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의 출발점이라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근(近)인간으로서의 인간 친화적 동물이나, 준(準)인간으로서 생명유지장치, 심장박동기 등 인간에 이식되어 하이브리드를 형성하는 기계들, 그리고 귀신이나 종교적 신 등 초(超)인간이라는 인류가 경험해 온 존재들의 선례를 통해 AI의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저자는 인간과 닮음, 인간적 인 것들에 대한 경험적 논리를 그대로 AI문제에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AI는 이들과 다르다. 오늘날 AI에 대한 윤리적 경각심은 인간과 닮았다고 해서 야기되는 것만이 아니다. 즉 AI에 대한 윤리적 문제는 크게 세 가지 범주에서 제기되는 우려이다.

 

그것은 AI 시스템 자체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AI의 의식 소유 여부라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주체성에 따라 야기되는 문제, 그리고 AI의 행위에 대한 책임 주체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웹 킨은 ‘인간과 닮은’이라는 ‘도덕적 행위 주체성’의 측면에 매몰됨으로써 AI 윤리에 대한 나머지 문제점들을 간과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이 저술의 주요한 논증의 한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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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진술에서 질(質)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심코 어떤 대상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을 투사하고는 마치 그 대상의 본질자체를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양 말하고는 한다. 때문에 ‘이 사람은 질이 좋다.’라든가, ‘이 천은 질이 나쁘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그 말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그 ‘질(質)’이라는 것이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분리되어 독립된 정의를 지니는 자의적 판단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만일 질이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판단가치에 따른 구분이라면 그 말은 단지 말하는 자의 내면 투사에 불과할 뿐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질을 주관적 표현이라고 보편성의 가치를 그저 폄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1. 사회적 가치 판단으로서 질(質)이란 대체 무엇인가?

 

왜냐하면 이 문제는 몇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어떤 대상이 지닌 특성이나 성질이라는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서의 질’이 있고, 그 대상이 어떤 기준에서 더 낫거나 우수하다는 판단인 ‘평가로서의 질’이 있으며, 그 대상이 추구할 만한 가치나 목적 적합성 여부에 관한 판단인 ‘가치로서의 질’로 구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두 개의 의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튼튼하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다. 어느 의자가 질이 좋은가? 내구성 기준으로는 전자가, 예술적 감상이나 실내공간의 미적 조화 측면에서는 후자가 질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즉 내구성이나 미적 속성이 곧바로 종합적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을 판정하려면 대상의 속성뿐 아니라 그 속성을 평가하는 목적과 기준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질을 단순히 대상 안에 들어 있는 독립적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대상의 속성, 평가 목적, 판단 기준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야 비로소 어느 만큼의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상에서 이러한 살핌을 등한시하고는 대상을 마구 재단하고 판단하곤 한다.

 


질이 대상 자체에 완전히 내재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만 발견하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말 할 것이다. 이와 달리 질은 대상과 분리된 외부의 가치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의적인,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앞서 세 가지 층위를 언급했듯 실제로 질은 이처럼 무 자르듯 단순한 관계가 아닌 복잡한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질’이라고 말할 때 질은 내구성, 정확도, 안전성, 처리 속도와 같이 일정한 조건 아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무엇을 위해 이용(사용)하는 가에 따라 중요성을 달리하는 ‘목적과 맥락’의 측면에서 말하기도 하며, 효율성, 공정성, 아름다움, 지속 가능성 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와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른 평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빠른 자동차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의자가 항상 가치 우선을 갖는 것도 아니듯 말이다.

 

결국 측정의 객관성이 가치 판단의 객관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대상의 모든 특성을 종합하여 좋은 질을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의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칼은 잘 자르는 칼이고, 좋은 연주자는 연주라는 활동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질은 대상을 목적과 기능에 대한 적합성으로만 설명한다. 이는 인간의 삶처럼 목적 자체가 논쟁적인 대상에게는 대체 무엇이 탁월성인지를 다시 물어야하는 극히 지엽적인 설명에 머물고 만다. 칸트는 판단을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개념이나 규칙을 제시하기 어렵다며, 보편적 동의를 요구하는 판단일지언정 객관적 측정 기준을 갖는 것은 아니라며 미적 판단의 보편성 문제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라 해서 이보다 나은 설명을 한 것은 아닌데, 대상을 오직 성능(능력)과 유용성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모든 대상을 어떤 공통된 척도로 비교하려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자, 제기한 질문, 대상과 분리된 질이란 무엇인지 다시 물을 때가 되었다.

 

질이 대상과 분리된 독립된 실체라면 우리는 그 질이 무엇인지 대상과 무관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음, 우수함, 탁월함과 같은 말은 대개 무엇이 좋은지, 어떤 점에서 우수한지, 무엇을 위해 탁월한지 물을 때에만 비로소 구체적 의미를 얻는데 불과하다. 그럼 질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일까? 질은 개별적 속성을 넘어 여러 속성을 종합하고, 그것을 목적이나 가치에 비추어 평가하는 개념이라 이해 할 수 있다. 일례로, ‘좋은 소설’이라는 판단은 문장의 아름다움, 서사의 완결성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기존의 관습을 변형하는 힘, 언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정도 등 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차원이 관여하는 것이다. 이들을 정리하면 질을 이렇게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질이란 대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한 우수성의 실체라기보다, 대상이 지닌 여러 특성이 특정한 목적과 가치의 지평에서 평가되고 서로 비교되는 관계적 개념이라고 말이다.

 

2. 질 판단 기준이 대상의 전체 특성이 되는 기이한 역설

 

이제 본론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늘의 질은 흔히 점수, 순위(서열), 지표, 인증, 생산성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수단은 복잡한 대상을 비교하기 쉽게 해주지만 동시에 매우 큰 위험을 갖는다. 측정 할 수 있는 특성이 질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질을 취업률과 논문 수로, 노동의 질을 생산량으로, 예술의 질을 관객 수와 시장 가격으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이 지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지표가 평가의 일부로 그치지 않고 대상의 전체로 규정하며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질은 더 이상 대상에 관해 질문하는 개념이 아니라, 대상을 특정한 질서에 편입시키는 규범으로 작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로버트 M. 피어시그는 그의 자전적 저술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몬태나주립대학 영문과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학과장이 그에게 “선생께서 학생들에게 질을 교육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그 요구이다.

 

우리는 대상의 질을 판단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곧 질이 되어버리고, 마침내 기준에 포착되지 않는 대상의 특성을 질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는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문학 학과장은 피어시그에게 질을 교육하라고, 규범, 즉 정해진 속성이 곧 본질이니 그것을 엄수하고 그 외의 것은 배제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측정하고 관리 가능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 중요한 것이 측정, 관리 가능한 것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표준화가 부당한 것은 아니다, 정확성이나 안전처럼 공통 기준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적에 유용한 기준을 모든 대상과 가치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질인가를 묻기 전에 왜 그것에 질이라는 판단을 갖다 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 대상의 특성을 잘 측정하는가와 그 기준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는 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질을 판단하는 권한과 기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질을 정의하는 작업은 나음(우수성)의 속성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특성, 평가의 목적, 가치의 위계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때 근본적 의문이 생긴다. 질을 ‘더 나은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나음은 질과 별도로 정의 될 수 있는가? 만일 나음을 정의하기 위해 다시 다른 질적 기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끝도 없이 정의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피어시그는 질에 대한 이 물음의 상자에 갇혀 끝없이 맴돈다. 여기 그 문장을 인용해 둔다.

 

"질을 함유하고 있는 대상과 분리해서 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질은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만다, 이야기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모든 실용적 용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실용적 용도를 위해 그것은 정말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달리 무엇에 근거하여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분명히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보다 낫다....하지만 낫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15장, p332

 

이 인용절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이미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그리고 질을 가치판단으로 설명하려면 그 가치판단의 근거를 다시 설명해야 하므로 질(質)의 본질은 끝없이 유예된다. 가 될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질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독립적 본질을 지시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러한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능하는 언어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한다. 그렇다면 질은 대상을 기술(記述)하는 말인가, 대상을 평가하는 말인가?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이 천은 부드럽다 → 이 천은 내구성이 높다 → 이 천은 질이 좋다> 촉각 특성에서 시험 비교할 수 있는 특성으로,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선 특징들을 종합할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가치를 포함할 수도 있는 특정 가치의 관점에서 종합하고 승인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질은 기술적 개념에서 평가적 개념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질이 좋다’라고 우리들이 말할 때 반드시 그 평가의 근거를 명시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단순한 개인적 감상 이상의 의미를 주장하는 듯하다. 마치 대상 자체에 좋은 질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곳을 짚는다. 질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질에 관한 판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적 역전 현상을 맞이하게 되는데, 대상에서 질을 발견했다고 말 할 때 실제로는 이미 어떤 기준에 따라 대상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고, 그 평가의 결과를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놓는 순간 평가의 기준은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사회가 노동의 질을 성실성, 생산성, 효율성으로 평가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노동의 질이란 본래 그러한 속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왜 성실성과 생산성이 좋은 노동의 기준이 된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노동을 조직하는 경제체제의 필요가 그러한 기준을 강화한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이 노동의 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일 수 있다. 문제는 이 특정한 가치가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지워버리고 그 가치를 대상의 자연적 본질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질이 좋다는 표현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특정한 가치 체계를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언어가 된다.

 

여기서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질이 대상에 내재한 본질이라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모순이다. 반대로 질이 평가 기준에 의해 구성된다면 왜 그 기준을 대상 자체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질의 본질이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질을 찾는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좋은 소설’, ‘좋은 칼’, ‘좋은 교사’, ‘좋은 사회’>, 이 네 가지에서 ‘좋음’은 동일한 속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의 독립된 ‘좋음’을 발견할 수 없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런데 각각의 맥락에서 적절성, 목적의 성취, 가치 있는 결과들을 판단한다는 유사성이 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적 실천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이 적절한 이해일 것이다.

 

피어시그는 질의 본질을 사유하는 가운데 오리무중에 빠져 끝없이 순환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피어시그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그가 애초에 서로 다른 평가의 맥락을 관통하는 하나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고 질을 가정한 것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질을 정의하기 위해 더 근본적인 질을 찾아가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수행하는지 살펴보지 못했던 까닭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질은 “본질을 가치 대상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판단을 조직하는 언어적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질을 단지 언어의 사용이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3. 질은 객관주의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주의 언어인가?

 

우리는 어떤 대상의 질을 평가할 때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가치나 취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해당 대상의 물리적, 생물학적 조건과 인간의 경우 생명이라는 가치가 판단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에 관해 판단할 때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상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라는 대상의 실제 특성, 그리고 어떤 성질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라는 평가의 기준, 마지막으로 왜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판단의 정당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적용하면 질의 문제를 전적으로 객관주의나 상대주의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종합하면 질은 대상과 완전히 분리된 실체도 아니고 순전히 주관적인 감정도 아니다. 질에 대한 판단은 대상의 특성과 평가 기준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앞서 제기한 문제를 재구성해보자. 우리는 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상에 가치판단을 부여하곤 한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을 정당화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정당화하려면 다시 그 기준이 지향하는 가치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정당화하려면 또 다른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 순환 논리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질은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지 못하는 개념처럼 보인다. 만일 이 말이 진실이라면 질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독립적인 본질을 가리키지 않으며, 평가와 정당화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본질을 계속 찾아가는 작업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질의 본질을 찾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어떤 가치를 승인하고 어떤 대상을 배제하는지, 그 기준은 누구에게 유리하며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으로 물음의 본질을 바꿔놓는다. 질의 정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요구하는 사회의 조건을 묻는 것으로 이동해야 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애초의 물음인 ‘질이 좋다’고 말 할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포함될 수 있음을 간과했던 실수도 있다. 대상에는 실제로 더 우수하게 만드는 어떤 성질(능력)이 있다는 ‘존재론적 주장’과 특정한 목적과 가치에 비추어 그 대상을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려는 ‘규범적 주장’을 구별하지 않고 뒤섞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혼란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상적 언어 습관에서 이 둘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다보니 전혀 다른 주장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오류다. 규범적 판단을 마치 존재론적 사실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거나 감추고 있는지를 은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 혼용 때문이거나, 이에대한 식별 불능의 무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피어시그는 질이라는 사회적 가치판단에 저항한다. 그는 가치판단의 정당성을 얻는 조건 자체로서 질을 묻는 것인데, 가치 우선순위가 들어있는 질이 좋다는 판단에서 가치 선택과정이 생략되었을 경우, 부여한 우수성이 마치 대상 안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객관적 속성인 듯 보이는 그 판단 전체에 의심을 가졌던 까닭이다. 존재론과 규범의 혼용 문제는 근대 사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효율성이나 성과, 피어시그의 말을 빌면 합리적 이성의 가면을 쓴 근대 과학적 이성을 객관적 가치 기준으로 내세우는 현상의 비판적 검토일 것이다. 과연 가치판단의 객관적 정당성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가? 그것이 대체 인간의 정의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계속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질’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취향이 충돌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판단은 언제 사회적 규범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명확하게 분리하여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하는 것과 그 대상의 좋음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판단은 실제 삶에서 뒤섞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거나, 반대로 사회적 기준을 거부하는 것 자체를 좋은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두 인식은 실제 우리들 사회와 사람들에게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사회의 기준에 순응하면서 자기 판단을 잃기도 하고, 그 기준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 판단만을 믿고 그 밖의 모든 가치 판단을 부정함으로써 광기로 치닫기도 한다.

 

4. 질에 저항하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

 

아마 허먼 멜빌이 창조한 인물, 사회적 가치에 단순한 불복종을 넘어, 타인이 정해놓은 일련의 판단기준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이 질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 대표적 인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피어시그는 이 말을 하지 못함으로써 지독한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사회는 질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어떤 행동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유용하고 무용한지,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지들 판정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이러한 판정에 논박으로 맞서지 않고 판정의 요구자체를 무력화한다. 피어시그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대상의 질을 판단하는 충분한 근거인가?라고 묻는다. 이다. 물론 바틀비의 거부, 그의 침묵은 저항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거부는 해석불가능의 지점에 내려놓는다. 질을 말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짙은 혐오를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가치 판단에 동의하지 않으며 거부의 의지를 보이는 문학작품들은 수두룩하다.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회의 관습적 요구인 슬픔을 표현하지 않거나, 재판을 받으면서도 법정에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뫼르소처럼. 그는 사회가 특정한 상황에 요구하는 감정과 표현을 자연스레 수행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그의 행동 뿐 아니라 인격 전체를 의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 인간 사회의 논리적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판단하는 우리들의 인식을 생각해보자.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고 후회하는가? 그리고는 이 판단을 통해 그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인격에 대한 판단을 하고, 마침내 이 판단을 근거로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끌어들인다. 규범적 측면을 끌어들여 그 사실만으로 인간 존재 전체나 도덕적 성격을 확정하려는 것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질의 광범위한 무법지대가 결코 타당한 것이 아님을 뫼르소에게서 발견한다. 여기에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배제된 그레고르 잠자도 한 예로 추가해도 될 것이다.

 

이들 문학 작품 속 인물들과 더불어 사회적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그 기준을 내면화한 사람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곤경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학들로 이 세계가 가득 채워져 있다. 그만큼 질의 문제는 우리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요청하는 중대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실을 추구하는 주체가 치르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써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어시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지식과 판단의 틀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자신의 사유와 사회적 삶 사이의 간극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급기야 정신 분열에 시달린다. 실존철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R. D. 랭은 『분열된 자아; 정상성의 세계에서 자아가 입는 상처((The Divided Self)』,(1960)에서 이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세계가 외부의 정상성 기준에 비추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랭은 한 인간이 자기 경험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및 공동의 세계를 유지해야한다면 그 사이의 긴장은 감당키 어려운 것임을 시사한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면, 그 인정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과 개인의 내적 경험 사이의 균열을 이해하려는 랭의 관점은 질의 문제를 사회병리학으로 예리하게 관찰토록 해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교정(Correction)』 (1975)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로이타머는 건축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질서를 실현하려는 강렬한 의지의 인물로 자신이 구상한 완벽한 원뿔형 건축물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현실 속의 타인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수록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를 추구하는 그의 사유자체가 그를 압박한다. 피어시그는 질에 관한 문제를 기존의 철학적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데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지만, 로이타머는 생각하는 질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행위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두 인물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유가 사회보다 우월하다거나 그들의 파국이 반드시 진실 추구의 대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5. 맺음말 : 질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다!

 

피어시그는 말한다. “Those are society’s standards, they aren’t my standards.” 그것들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라는 이 말은 사회기준을 거부하는 개인의 독립선언처럼 읽을 수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은 자로서 그보다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타협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아픈 감각의 표현에 가까움을 안다. 우리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때론 강한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때론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융화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질과 실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질 사이에서 그 관계를 물으며 충돌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깊은 내상을 입어 혹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상이 결코 나쁜 질인 것은 아니다.

 

이제 맺어야 할 것 같다. 질이 사회적 합의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질을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질을 지키면서도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피어시그를 비롯한 많은 저술들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를 어떻게 끝까지 추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완벽한 질서와 판단의 확실성은 결코 견고한 본래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이 때론 파괴되기도 하지만, 그 가치 판단의 확실성이라는 질 또한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로 그 질을 대체하기도 한다. 대상에 그 어떤 절대적 가치판단을 주장할 때 인간 세계는 대단한 충돌에 직면하게 된다. 대상이 가치판단을 양적으로 넘어설 때 그 세계는 새로운 질서의 인간으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때의 진통은 곤혹스러운 혼란이겠지만, 그를 이겨내면 그 변화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수시로 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질은 절대적 속성의 언어가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여기에 절대적 진실의 의미를 씌워놓으면 독단과 폭력이 자라난다. 사회적 합의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질은 이러한 임시 합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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