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음 ; Vergänglichkeit (On Transience)」 ; 사라짐이 가치를 만든다!

 

“무상함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희소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프로이트의 덜 알려진 에세이 한 편에 눈이 멈추었다. 유한성에 대한 애도와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한 찌르르한 공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짧은 글은 1차 대전(1914년)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어느 여름날 한 젊은 시인과 아름다운 자연 속을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시인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추정되는데,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던 시인은 돌연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것이라며 아름다움을 충분히 기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아름답고 완벽한 그 모든 것이 소멸과 쇠퇴의 길로 나아가기에 가치도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견해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모든 사물의 덧없음은 반박할 길 없는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들이 나름의 소중한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명한 위의 인용문장이 출현한다. 향유(享有)의 가능성에 어떤 한계가 있기에 향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영원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귀중하다는 것이다. 비록 “하룻밤만 봉오리를 피우는 꽃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듯, 인간이나 예술작품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경험된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을수록 그 경험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덧없음, 무상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일까? 프로이트는 시인의 비관이 단순한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정서적 반응이라고 판단한다. 아름다운 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미래의 상실을 미리 경험하게 만들고, 아직 잃지 않았는데도 이미 애도의 예감이라는 정서상의 강력한 요인이 판단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이 정서적 요인은 마음속에 솟아난 덧없는 슬픔에 대한 반발, 즉 사라질 아름다움의 향유가 그 덧없음에 대한 생각으로 방해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무상함(허무함)을 떠올리면 현재의 아름다움조차 즐기지 못하게 된다. 이것을 ‘애도에 대한 반항(revolt against mourning)’이라고 부른다.

 

때문에 우리들은 절정의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려는 욕망을 보인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비극이면서도 동시에 그 대상을 욕망하게 만드는 조건이기에 상실을 견디기 어려워하면서도 결국 그 상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라질 것이므로 슬프지만, 또한 사라질 것이므로 소중하다. 결국 죽음과 소멸을 부정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를 인정한 뒤,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일 게다. 즉 무상함은 가치의 파괴가 아니라 가치의 근거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내내 껴안아야할 유한성, 아름다움, 상실의 의미를 매우 압축적으로 위로하는 인간의 생에 대한 애도론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최초의 경험들의 절대적 환상,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의 감각을 야기한 시간의 흐름 속 부패한 사랑을 돌리려하는 인간의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을 찬양했던 징그러운 불멸성을 떠들던 작가가 떠오른다. 아름다움, 절정의 순간을 끊임없이 현재화함으로써 마치 덧없음을 부정하려는 보토 슈트라우스의 탐욕적 불모성에는 프로이트의 숙명에 대한 승인도 없고, 그 승인을 통한 승화도 없다. 자신의 실존을 의심하지 못하면서 자기 성찰을 강변하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이 난데없이 왜 기억에 남아있는지 모를 일이다. 잠시 다른 길로 들어섰다. 다시 제자리로.

 

이러한 연상에 이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모든 것을 가족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로 환원한다고, 또한 욕망을 결핍으로 해석한 것을 비판하며 욕망은 생산이라고, 애초부터 사회적이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던 들뢰즈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섰다. 들뢰즈의 생산기계로서의 인간의 이해는 유한성을 부정하고, 급기야 의도치 못했겠지만 오늘의 기계주의 세계의 문을 합리화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나는 상실에 대한 불안, 사라지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붙들려는 인간의 그 여리고 애처로운 모습이 좋다. 그래서 그 유한성이라는 시간 속에서만 빛나는 소중한 것들의 소멸에 슬픔의 정서를 느끼는 인간이 좋다. 인간의 무수한 취약성의 본질 인식 기반위에서 그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좋다. 인간을 미화하거나 인간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마치 인간본성이 선험적 도덕성을 지녔다고 비반성적 인간을 양산하는 가치에 반대한다.


사라짐의 애도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들은 더욱 동료 인간들에 대한 보다 따뜻한 시선을 지닐 수 있을 것만 같다. 영원성보다 유한성의 가치를 인간 존재의 조건이자 가치로 보는 프로이트의 이 에세이는 내 정서의 근간에 대한 지지의 글로 여겨졌던 것 같다. 이 에세이는 1915년 집필되어 1916년 발표된 글이다. 훗날 「애도와 우울증(Mourning and Melancholia)」으로 이어진 상실과 인간 삶의 유한성에 대한 사유가 응축된 중요한 글이다. 이 글은 국내 열린책들이 출간한 프로이트 전집 14권인 『예술, 문학, 정신분석』, 「Vergänglichkeit (On transience)」 333~339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쓰고 나니 프로이트의 이 산문을 표제로 한 신간이 눈에 띤다. 그 책과 이 단상은 아무 상관이 없는 우연의 동시성일 뿐이다. 우리들은 사라짐으로써 아름답다. 소멸은 항상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아등바등하지 말자. 살아온 인생이 추해지기만 할 뿐이다. 허무함, 무상함은 우리의 소중한 정서임을 인정하면 이 세상은 무한하게 아름다운 것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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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억제된,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다.“

- 피터 게이, 『프로이트 Ⅰ』 P228, 교양인 刊, 『꿈의 해석』 재인용

 

“꿈은 전부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은폐되어 있긴 하지만 이기적 자아가 모든 꿈에 등장한다. 꿈에서 성취되는 소원은 한결같이 이 자아의 소원이다.“ 

- P367, 『꿈의 해석』, 열린책들 刊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국내 출간 문헌들을 전반적으로 재독하는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욕구를 불러일으킨 동기에 숨어있는 내 무의식을 탐색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무엇인가가 그렇게 하도록 나를 이끈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문화사가(文化史家) 피터 게이가 쓴 『프로이트』평전을 읽고 난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토대로 발표한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부터 읽어나가고 있다. 사실 세간에 자신의 무의식, 즉 그 원시적 욕망을 들여다보려 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의 무책임한 배설로 인한 소음을 떨어내려는 동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아니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던 글에 내 시선이 멈췄다. 이 글은 그러한 충동에서 긁적이게 된 짧은 단상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인간 개체의 본질적 동력인 유전자의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에 반항하여 행동할 수 있는 문화적 힘을 강조했듯,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성하는 여러 이론들 중, ‘무의식에 남아있는 유아적 근친상간 경향’의 통찰 또한 우리 인간 정신의 심층의 욕구들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덕적, 문명적 이해를 진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제안이라 해도 될 것이다.

 

『꿈의 해석』, 프로이트는 이 책을 겸손하게 『해몽(解夢)』이라 부르곤 했지만, 그의 겸허한 표현과 달리 이 책은 엄연히 정신분석학을 정초(定礎)하는 최초의 연구문헌이라는 측면에서 『꿈의 해석』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느긋하게 다시 읽는 즐거움은 예사로이 지나쳤던 문장 속에서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일 게다. “Ⅴ章 「꿈-재료와 꿈-출처」, 4節 〈전형적인 꿈들〉, (2)項 ‘소중한 사람이 죽은 꿈’”은 우리들 대다수가 일상적으로 꾸는 꿈들을 분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특히 주목된 이유는 책이 출간되자 가장 격렬한 항변, 분노에 찬 반대와 비판을 불러온 대목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내게 새롭게 발견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우리들은 가까운 친척들의 죽음과 더불어 부모나 형제자매들로부터 그들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들 자신도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죽은 꿈의 내용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 하나는 꿈속에서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아 깨어난 후 자신의 무정함에 놀라고 의아해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몹시 비통해 하며 잠자는 동안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꿈이다. 즉 소중한 이의 죽음에 대해 무심하거나 비통해하는 두 가지로 분류하는 것인데, 이 두 유형은 그 해석에서 완전히 다른 목적을 의미한다. 전자는 모종의 다른 소원을 은폐하기 위해 위장된 것이고, 후자는 관계된 사람이 죽었으면 하는 소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아버지의 죽음이 꿈에 나타났고 이를 몹시 비통해하며 우는 꿈을 꾼 후자의 얘기를 해보자. 이러한 꿈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꿈일 때도 있고, 생존해 계신 아버지가 죽는 꿈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꿈은 그들의 죽음을 바란 적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발끈할 것이다. 친부(親父)의 죽음을 소망하는 무슨 되먹지 못한, 불효막심한 작자가 어디 있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압하여 무의식으로 침전된 것이다. 이 억압을 뚫고 꿈을 통해 유아기건 아동기건 어떤 시절에 그러한 소원을 가졌기에 도덕적 금기에 의해 억압되어 무의식속에 묻혀있던 것일 뿐이다. 다만 꿈을 통해 일상적 삶의 행위 속에서 실현할 수 없었던 것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꿈은 이렇게 우리들이 신경증환자가 되지 않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세상에 현실 속에서 부모의 죽음을 소망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들은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소망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할 때에만 더없이 이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행위 할 수 있다. 아마 인류문명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대한 문헌들은 이처럼 우리의 적나라한 본질을 일깨움으로써 이를 극복한 진전된 도덕적인 인간의 지향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동기라는 시기에 철저하게 어린 이기주의자 안에서 이타적 움직임과 도덕이 깨어나고 이차적(성숙한) 자아가 일차적(원시적) 자아를 뒤덮고 방해(억압)함으로써 문명화된 도덕적 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 도덕성 발달이 모든 인간에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내면 성장을 파악하는 일을 우리는 하지 않지만 많은 인간에게서 이 도덕성 발달이 지체되거나 정체된 상태로 어른이 되는 도덕적 퇴행에 머문 인간들이 매우 많다고 추정할 수 있다. 겉으로는 동일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내적 도덕성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세상에 들끓는 혐오와 저주와 악의의 언어들과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횡행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잠깐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다시 친부 살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소망하는가의 문제를 계속해보기로 하자.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들이 아주 많다. 자식을 삼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거세하고 스스로 지배자가 되어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는 제우스 이야기는 그리스신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대강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약삭빠른 문인들은 부자간의 투쟁을 중심으로 작품을 쓰면 성공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순전히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행위들일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이 고대신화를 변주해 작가의 의지를 삽입한 탁월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이 비극을 운명(신)의 절대적 의지와 파멸에 직면한 인간의 헛된 반항 사이의 대립에 근거한 비극, 즉 인간 자신들의 무지와 무력함을 깨닫고 불가해한 운명의 뜻에 복종하는 법을 설파한 것이라고 해석했었다. 프로이트에게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오늘 우리들 현대인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이러한 절대적 운명의 의지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실패에 대한 충격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목소리가 운명이 강요하는 힘을 인정하게 만드는 무언가의 존재, 그럴만한 계기가 내포되어 있음의 어렴풋한 수긍의 당혹스러움이라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 비극을 읽고 대체 무엇에 감동했었는가? 무엇으로부터 비극적 감정에 전율했었는가? 오이디푸스에 닥친 일이 우리의 운명이 될 수도 있음에 대한 공감, 즉 우리 모두 어머니에게 최초의 성적 자극을, 아버지에게 최초의 증오심과 폭력적 희망을 품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저주에 대한 이해의 주장에 동의할지 망설인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꿈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설득한다고 쓰고 있다. 즉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는 우리 어린 시절의 소원 성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신경증환자가 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와 달리 성적 자극을 어머니로부터 분리시키고 아버지에 대한 질투심을 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유년기의 원시적 소원을 성취한 인물 앞에서 마음속의 소원을 억압한 만큼 경악한다는 것이다. 이 비극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은 바로 이 경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도 오이디푸스처럼 자연이 우리에게 강요한 소원, 도덕을 모욕하는 소원의 존재를 모르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소원이 폭로되면 우리는 모두 유년 시절의 사건들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그 외면에 진실이 있다. 인정할 때에 세상과 우리 인간은 도덕적으로 건강해진다. 부정하고 외면할 때 세상은 지체발달상태, 문명적 퇴행의 양상을 보인다. 마치 지금의 무책임하고 비논리적 정쟁의 담론들이 설쳐대는 세상처럼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어서 또 하나의 위대한 비극인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말하는데, 수많은 비평들은 햄릿의 우유부단, 즉 부왕(父王)의 복수를 결행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불분명한 성격에 대한 오류의 지적이지만 프로이트는 결단력 있는 행동가 햄릿을 말한다. 왜 나는 이것을 보지 못했을까? 작품을 주의 깊게 읽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햄릿의 망설임의 원인이나 동기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어떤 무의식의 방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햄릿』의 이야기에 압도되는가? 고작 사고 활동의 지나친 발달 때문에 행동력이 마비된 신경쇠약증의 범주에 드는 병적일 정도의 우유부단한 한 인물의 성격에 매혹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작품의 줄거리를 보면 햄릿이 행위를 할 수 없는, 결코 우유부단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노에 휩싸여 벽 뒤에서 엿듣는 염탐꾼을 칼로 찌르고, 그를 죽이려는 두 명의 신하를 특유의 단호함으로 저 세상으로 보내는 장면처럼 매우 결단력 있으며, 게다가 계획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부왕의 혼백이 맡긴 임무를 왜 실행하지 못하는가? 대체 무엇이 그의 실행을 가로막는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여기서 다시금 어린 시절의 아버지 살해라는 억압된 소원의 성취를 꺼내든다. 즉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대신 어머니를 차지한 삼촌이라는 남자가 이미 햄릿 자신의 소원을 성취시켰기에 징벌해야 하는 죄인보다 자신이 더 나을 것이 없다고 꾸짖는 양심의 가책이 복수를 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햄릿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우리들은 의식의 수면에 드러나지 못하게 억압된 금기들, 어두운 욕망들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모든 꿈은 소원성취이다”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우리들 무의식의 이기심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 독보적인 꿈의 해석은 우리 자신들의 원시적 욕망,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경이로운 창구가 되어준다. 이 통찰은 우리들의 종교와 도덕 발전 및 인류사의 이해에 중대한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우리 모든 인간은 그렇게 말끔하게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저 혼자 도덕군자이고 정의로운 인간이라고, 윤리적 무결점의 인간이라고 교만을 떨어대는 인간들이 지천이다. 수없이 은폐된 자신의 이기적 소망들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들은 조금은 더 이타적 인간이 될 수 있을 터이다. 햄릿은 신경증환자이다. 어린아이의 소원의 망상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폭로하고 현실화하는 데 이르지 못한 인간의 한 유형 아니겠는가.

 

햄릿처럼 살지 말자. 햄릿들이 우리 세계에 너무 많다. 도덕적 지체장애자들 말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꿈-해석의 기초를 놓아 정신분석의 초석, 나아가 심리학을 정초하고자 한 야심의 저작이기도 하지만, 2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자기 분석의 일부, 남자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결정적 상실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프로이트 자신) 반응”이기도 하다. 아마 이 관점에서 이 저술을 읽게 되면 예전에 보지 못했던, 아니 우리들이 읽어내지 못했던 숨겨진 의미들이 무수하게 떠올라 타인과 세계와 우리들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한층 성숙시켜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류를 등지고 나만의 세계를 위한 독서를 느릿하게 하다 보니, 보이지 않았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말들, 한 인간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게도 된다. 나는 프로이트의 이 저작을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한 편의 잘 써진 휴먼드라마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분간 이처럼 시간을 보낼 계획이다.

 

“모든 꿈의 바닥에는 유아적인 동시에 품위 있는 사회에서는 아마도 외설적이라 부를 소망이 깔려 있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장했다.” 

-피터 게이, 『프로이트 Ⅰ』 P240, 교양인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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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유지되지만, 그 바탕에는 ‘이래도 되는가?’라는 자기검열의 감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결과가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 이철우, 『수치심 잃은 사회』 P99

 

“‘수치심 상실’에는 사무친 수치심의 느낌이 선행한다. 수치심 상실은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다. (...) 지독한 모욕, 자신의 자율성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목숨 건 뒤집기를 통해서 모욕에서 벗어나려 시도한다. 즉 모욕을 오만한 자만을 통해서 방어한다. (이 때)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느낀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구겨진 자존감이 수치심 상실의 근저에 놓여있는 것이다.”  

- 한병철, 『존중 없는 사회』 P92

 

한 사회를 극심한 분열과 혐오의 정치 장(場)으로 내몰고 있는 책임 없는 한 인간의 외설(猥褻)스럽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독설의 파장을 지켜보다 몇 글자 적어둔다. 위에 인용한 두 학자의 글은 지금 한국 사회를 휩쓰는 정치담론의 실체를 적확하게 묘사한, 아니 그러한 냉소적 저주를 배설하는 자들의 악의의 실체를 잘 설명해준다. 사실 이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프리모 레비(Primo Michele Levi)가 “저항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할 힘을 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요,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며, 또한 프랑스 정치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Frédéric Gros)가 말한 “전통적으로 윤리의 기둥으로, 연대의 표식으로 작동해 온 감정”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계에서 이 단어는 오로지 타자에 대한 잔인한 악의로써 멸시와 존재 부정을 강요하는 오염되고 얼룩진, 회복될 수 없는 부정적 폭력의 언어로만 사용되고 있다. 조리돌림하고 따돌림하여 배척, 매장시키려는 악의로서만 말이다.

 


혐오와 조롱, 멸시는 평등한 정치적 존중을 가로막는다. 이러한 언어가 하나의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갈 때 얼마나 철저히 비이성적 과정을 거치는가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해왔으며, 지켜보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인식과 결합하여 세계와 사회를 의도적으로 분할하는 근본악이 기승을 부리는 해로운 사회에 직면해 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대체로 이러한 조롱과 저주의 말들에는 언어 논리적으로 배설된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이 없기가 일쑤고, 설혹 검증 대상이 있을 경우에도 왜곡되거나 날조된 거짓의 사실이 대부분이다. 검증 불가능한 진술은 의미가 없는 헛소리이고, 하나마나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배설한 자의 감정적 악의 이외에는 없는 자기감정의 투사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이 지금 이 사회에 거침없이 난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지적했듯, “타자에 대한 존중이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됨으로써 타자 경멸을 양산하는 시대성 때문일 것이다. 즉 인간 존중에 기초하는 우정의 정치학으로서 공존의 비전을 상실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특히 이러한 분열과 저주의 악의(惡意)를 뱉어내는 인간을 묘사한 『유해 인간(Gente toxica)』 (2013)의 작가 베르나르도 스타마테아스(Bernardo Stamateas)의 말은 그 인간에 대한 이해측면에서 경청할 필요가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타자의 성취를 방해하고,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권위와 언어폭력, 거짓말과 험담을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무심하게 저지르는 인간은 흔히 타자에게 끊임없이 훈계하려 들고, 노이로제적 예민함을 발산하며, 충동적이고 무책임하며 자신의 자존감만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회적으로 유해한 인간에 대한 이 정의에서 보듯 근원적 수치심은 자존감의 상실이나 인정받지 못한 데서 유래하는데, 종종 원한과 공격성으로 변환된다. 그래서 수치심, 모욕, 공격성은 서로에 대한 조건이 되고, 해당 인간이 배설하는 언어나 행위 폭력은 자신의 수치심을 거부하고 동시에 가리기 위한 가면이라 할 수 있다. 담론가로 행세해 온 한 저열한 인간은 대통령이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정책이나 인사에 대해 물어 온 적이 없다’며 분노를 표현했다. 이 인간은 자신의 비대해진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고 여겼던 것이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레온 부름저(Leon Wurmser)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작동양태를 그의 위대한 저술 『수치심의 가면』 (1997)에 “수치심이 억압되거나 왜곡될 때 오만, 경멸, 냉소 같은 방어기제로 전환된다. 고 썼다. 결국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개인적 방어기제는 냉소주의로 표현된다. 한 유해한 인간의 악의적 배설의 언어들이 왜 저러한 형태를 띠는 것인지에 대한 근접한 정의라 할 것이다.

 


수치심의 상실, 부끄러움을 잃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 존엄과 공동체의 결속을 무너뜨리고 분열과 갈등의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급기야 사회 해체를 초래하는 매우 나쁜 상황을 낳는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존중의 능력도 없는데, 수치심이란 어떤 상위의 사회적 질서에 존중을 포함하고 있는 감정인 까닭이다. 프리드리히 헤벨(Friedrich Hebbel)이 그의 문학작품에서 일관되게 천착한 “얼굴을 붉히는 곳에서 더 고상한 자아가 시작된다.”며, 수치심은 도덕적 감정이며, 그것은 존중을 명령하는 어떤 상위 가치체계의 전제라고 말한 것에 대한 상실이자 배제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수치심이라는 이 도덕적 감정은 손상된 명예를 의식하며 어떤 정화(淨化) 또는 속죄 의식을 통해 사회에 다시금 복귀 통합된다. 이와 달리 오늘의 수치심 문화는 타자를 파렴치할 정도로 모욕주고, 처벌하고 말살하려 한다. 수치심 상실을 냉소주의라는 방어기제의 가면을 쓴 인간은 자기 이상의 붕괴를 사회의 상위 질서의 파괴, 즉 무례함과 무존중(無尊重), 무경외(無敬畏)의 저열하고 파렴치한 세상으로 퇴행시킨다. 따라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기 이상과 다른 모든 가치와 이상에 대해 냉소적 경멸을 배설한다. 그것은 과잉의 자아가 선택한 암울한 자기 저주이다.

 


이 저주받은 유해한 인간은 즉시 대상을 적대하며 조리돌림 등 동원할 모든 린치를 가하려고 하며, 상대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나아가 사회구조 해체라는 문명적 퇴행을 초래한다. 한병철 교수가 『존중 없는 사회』에서 “수치심을 잃어버린 인간의 특징으로 냉소주의와 타자의 더 높은 가치에 대한 조소와 조롱으로 표출”된다고 지적한 것과 적확하게 일치한다. 즉 수치심 상실에는 수치심 느낌이 선행하며, 그렇게 잃어버린 수치심을 물리치고 동시에 은폐하려는 수치심의 가면이 된다. 연일 저 악의와 저주를 배설하는 의미없는 감정의 언어로 가득한 냉소적 경멸은 수치스럽게 구겨진 자존감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때문에 그 배설구(排泄口)에서는 원색적 비명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그야말로 수치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가치론적 다수인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와 무례가 이 사회를 점령하고 있다. 바로 소수 기득권자라로 자임하는 인간무리들의 해체에 거칠고 극악하게 훼방하고 조롱하며 저주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아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정치적 조롱과 저주의 폭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과 속하지 않은 집단을 분리하면서 외부 집단을 향한 부정적 평가에 기초하여 난데없는 편견을 통해 극심한 차별의지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 외부의 사람들을 주변화(周邊花)하여 부정적 감정을 들씌우는 것이 곧 차별이다. 이렇게 집단 분열의지에 사로잡힌 인간은 인식 범위가 극히 협소해지고 이윽고 인식불모지대에 빠져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수치심, 도덕심과 같은 정신적 제방을 쌓고, 이를 문화적으로 승화시키는 고도의 심리적 성취능력을 발달시킨 인간의 본질에는 고착된 충동과 승화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고 지적한 것은 수치심과 관련한 상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수치심 잃은 사회』에서 이철우 박사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감정이며,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은 관계의 감정이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작동시키는 윤리적 신호다. 이것을 잃었을 때 인간과 사회가 겪는 것은 지금 각종 매체에서 보여지 듯 “감정적 해체, 윤리적 무감각,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 나아가 공동체의 붕괴이다.” 무례함이 솔직함이 되고, 책임 회피가 전략이 된 작금의 정치 담론 양상은 너무도 불온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 개인의 존중은 물론 공동체의 안정과 신뢰를 보증하는 권위마저 무시하게 된다. 헌법적 권위마저 무시하려는 권위의 진공상태를 만들어내는 인간들이 우글대는 세상은 이 사회를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다. “존중(수치심 갖기)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야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필수 조건”이라는 한병철 교수의 지적은 신뢰성 상실이라는 병든 오늘의 우리들에게 매우 중대한 일깨움을 제공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능력을 제발 잃지 말자. 적어도 수치심을 아는 사람은 저 악의적 괴물들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분열과 갈등, 사회적 해체만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열중하는 무리들로부터 이 사회, 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서적 공감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도덕적 감정으로서의 수치심이다. 이것을 잃을 때 차별과 권력의 탐닉과 독단과 사회적 유대 파괴만이 남는다. 서로 존중하는 사회,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라는 정치적 감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저 표독스러운 오만과 경멸, 냉소의 저주의 말아닌 말들이 설 자리가 없는 사회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그런 능력을 지닌 존재인 까닭이다.

 


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적 변동으로 인한 이상의 상실을 부끄러움의 상실이라는 가면으로 가리지 말자. 그것은 정말 나쁜 근본악이자 사회악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전락시키는 사악함은 수치심의 상실에서 출현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정치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이처럼 수치심을 잃어버린 사회가 왜곡된 인간 감정들인 혐오와 조롱, 분노, 배제와 분리, 그리고 폭력으로 진행되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러한 증오와 멸시, 외면의 감정에 도사린 정치 행위의 편재, 그 왜곡과 불온함의 근저는 어떤 특정 개인에 향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칸트가 지적했듯 수치심 상실은 “어떤 사회구조보다 인간 존재에 깊이 내재한 악행의 뿌리”라고, 그것은 타인을 자신의 욕구에 종속시키려는 성향인 근본악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말했다. 낙인과 배제, 저주의 악담은 이 세계를 분열시키고 파괴한다. 우리들은 존중의 언어를 어느 샌가 잃어버렸다. 타인에게 잔인한 인간들(진상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워가고 있다. 그러한 사회를 우리는 몸서리치지 않는가? 수치심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파렴치하고 무책임한 배설된 언어가 귀중한 공동체의 에너지를 쓸모없이 낭비케 하는 작태가 이 글을 쓰게 했다. 안타까움이 여기서 그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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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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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와 인간의 반역

 

“새로운 가속된 진화 양식을 출범시켰다. 바로 비유전적 진화다. (...) 

삼차 진화 과정일 것이다. 기계 자신이 참여하는 과정이다. (...)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도 떨어져 나갈까?” 

 - P594, 「50주년 기념판 에필로그」에서

 

모든 학문 분과의 연구목적이란 무엇일까? 인류라는 종(種)의 인간상(像)이 바로 현재의 양태로 존재하는 원인과 그 원인이 야기하는 상태의 진실, 나아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과 우주의 그러함 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인간자신과 그 세계의 무수한 현상들과 미래상을 그려보고자 하는 실체적 유익(有益)일 것이다. 물론 좋은(nice) 무엇에 대한 지향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일 모든 인간학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르지 않다면 자연선택의 기준 단위가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라고 선언하는 이 위대한 진화론의 한 관점 또한 인간의 이해와 가능성 높은 인간 미래상의 이해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진화이론의 한 관점으로 여타 관점을 압도하려는 유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그 세계가 왜 그렇게 형성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진실을 추정하고 해석,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인간 개체들과 그 집단이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든다섯 살이 된 노학자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저술이 50년이 되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진화론과 유전학 분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가운데 어제의 관점이 시대에 뒤떨어져 그 진실성을 잃고 철회, 폐기되기 일쑤임에도 이 저술은 “당장 사과하거나 철회할 것이 없다”고, 나아가 앞으로 50년 뒤(2076년)에도 여전히 통용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탄탄한 이론적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저술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략 30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때의 관심은 아직 인간과 인간사회의 형상 이유와 같은 본질적 사안에 미치지 못하고 ‘이기적’이라는 인격적 형용이 붙은 유전자 명명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V.C 윈-에드워즈의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대립하는 새로운 관점을 알고자 하는 순전히 지식에 대한 욕구였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지금, 이 저술은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현실적 앎의 이해로 읽게 되었다. 또한 새롭게 시선에 들어 온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반역 가능성의 물음’이 AI로 인한 당면 문제들과 어울려 낯선 긴장을 몰고 왔다.

 

1. 유전자의 생존 논리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단순히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생물학적 명제로만 읽는다면, 이 책이 던지는 사유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게 된다. 오히려 이 책의 급진성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는 데 있다. 개체가 유전자를 위해 존재하는가, 유전자가 개체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단위를 유전자라는 복제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이타주의, 협력, 도덕, 문화, 나아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편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사회적 존재들은 서로 협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러한 익숙한 세계를 뒤집는다. 생명체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여 살아가는 주체라기보다, 훨씬 오래되고 안정적인 어떤 존재, 즉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라는 것이다. 몸은 유전자가 세대를 넘어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탈것이며, 뇌와 행동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돕도록 형성되어 왔다.

 

이 주장은 인간을 모욕하기 위한 선언이라기보다 자연선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에 가깝다. 도킨스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반드시 개체나 집단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G. C. 윌리엄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그는 장기간 존속하면서 복제될 수 있는 안정된 단위, 즉 유전자를 선택의 핵심 단위로 본다. 복제자는 장수하고, 많이 복제하며, 높은 정확도로 자신을 복제할수록 유리하다. 그러나 완벽한 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류가 발생하고 변이가 생긴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완전성이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는 완벽한 자기복제의 역사가 아니라, 복제와 오류와 선택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특정한 복제자가 다른 복제자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온 역사인 셈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신체에 대한 시선도 달라진다. 몸은 더 이상 생명의 궁극적 주체가 아니다. 몸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된 구조이며, 유전자는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면서 훨씬 긴 시간 동안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복제자며 우리는 생존기계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섬뜩하다.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체의 생애는 장구한 복제 과정 속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다. 개체는 탄생하고 늙고 죽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건너뛰며 살아남는다. 도킨스가 유전자를 ‘불멸자’에 가까운 존재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의식적인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우선 심리적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행동의 효과에 관한 개념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은 행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이타적이다. 일벌이 침을 쏘고 죽는 행동이나 포식자를 둥지에서 멀리 유인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새의 행동이 그러하다. 표면적으로는 자기희생이지만, 그 행동이 자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유전자의 사본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면 유전자 수준에서는 오히려 이기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 지점에서 도킨스는 ‘종의 보존’을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처럼 설명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이타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집단선택설은, 그 집단 안에 단 한 명의 배신자가 들어오는 순간 흔들릴 수 있다. 다른 구성원들이 희생하는 동안 그 희생의 혜택을 자신만 취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면, 자연선택은 그 배신자의 형질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다. 순수한 이타주의 집단은 내부의 이기적 개체에 의해 쉽게 잠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이 곧바로 진화의 원리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2. 이타주의와 협력의 역설 : ESS(진화적 안정 전략)

 

오히려 도킨스가 보여주는 것은 더욱 기묘하다. 이기주의는 때때로 이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타인을 돕는 행동이 자신의 유전적 이익과 일치할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의 놀라운 자기희생도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일벌은 자신의 자식을 직접 남기지 않으면서도 형제자매를 돌봄으로써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겉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집단이 아니라 유전적 복제의 지속이 중심에 있다.

 

그렇다고 도킨스가 인간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려고 애쓰자”고 말한다. 생물학적 본성이 곧 윤리적 명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이 이기적 복제자의 확산을 설명한다고 해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설명과 규범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오히려 인간의 과제는 자연적 경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거슬러 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개체들이 서로 공격하고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인 공격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비용이 따르고, 상대의 반격으로 자신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공격하라. 달아나면 뒤쫓아라. 반격한다면 달아나라”와 같은 조건부 전략이 특정 환경에서는 안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액설로드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서 등장하는 '팃포탯(Tit for Tat)'은 첫 번째에는 협력하고 이후에는 상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선행이나 무조건적인 배신과 다르다. 먼저 배신하지 않지만 배신을 용인하지 않고,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용서한다.

 

여기서 인간의 도덕은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협력은 반드시 순수한 선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 기대, 반복되는 관계, 상호 보상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때 협력은 이기적인 개체들 사이에서도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도킨스의 세계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다. 이기적 복제자의 논리 속에서도 협력과 신뢰가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협력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기꾼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사기꾼과 호구’, ‘갚는 자’의 관계가 보여주듯 이타적 체계는 언제든 착취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도덕적 교육이 필요하다.

 

3. 밈(Meme)이라는 새로운 복제자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사유가 가장 멀리 나아가는 지점은 문화 전달 단위인 밈(meme)의 등장이다. 유전자만이 유일한 복제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 개념, 사상, 표어, 유행, 예술적 형식과 같은 문화적 단위 역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고 복제된다. 이때 뇌는 밈의 탈것이 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면 밈은 인간의 기억과 언어와 문화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

 

이 발상은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마저 흔든다. 한 인간의 유전자는 세대를 거치면서 희석되고 결국 개별적인 ‘나’의 유전적 흔적은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나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는 흩어졌지만 그의 사상과 이름은 여전히 문화 속에서 복제되고 있다. 『시학』이나 『국가』 역시 그것을 쓴 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간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이 만든 복제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다시 두려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유전자 기계에서 벗어나 밈 기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복제자의 숙주가 된 것인가. 도킨스는 밈 역시 장수, 다산성, 복제 정확도라는 선택압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세계인 동시에 인간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는 또 다른 진화의 장(場)이 된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밈에 의해 배양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문화적 복제자에게 다시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된다.

 

4. 확장된 표현형

 

그리고 『확장된 표현형』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이 문제를 더욱 먼 곳까지 밀어붙인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더 이상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몸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버의 댐이나 새의 둥지처럼 몸 바깥에 만들어진 구조물 역시 특정 유전자의 생존에 기여한다면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기술과 인공지능도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AI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외부 세계에 확장시키는 도구라면, 그것 역시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AGI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도킨스의 마지막 질문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적 본성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체와 뇌를 넘어서는 새로운 복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에 이어 문화적 진화가 나타났다면, 이제 실리콘 기반의 인공물이 새로운 진화의 매개체가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도킨스가 말한 ‘비유전적 진화’가 단순한 문화적 은유를 넘어 기술적 현실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5. 결어 : 인간의 반역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 선택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도킨스의 사유를 단순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의 역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은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모사하고, 단기적인 생존 이익과 다른 장기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 능력이 도킨스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한 가능성이다. 자연의 역사에서는 이타주의가 언제나 유전자 수준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기적 유전자』의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 인간의 몸도 떨어져 나갈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로 읽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 만들어지고 밈 기계로 배양되지만 우리의 창조자들에게 맞설 힘을 갖고 있다”는 앞선 선언처럼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인간은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유전자를 사유할 수 있고, 밈의 운반자이지만 밈을 비판할 수 있으며, 기술의 창조자이면서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질문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유전자가 이기적인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자기복제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출발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을 거슬러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몸은 유전자의 탈것일 수 있다. 문화는 밈의 탈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AI 역시 새로운 복제와 진화의 탈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유전자의 독재에서 벗어난 인간이 다시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의식과 선견지명이라는 능력을 이용해 그 진화의 방향 자체를 질문할 것인가. 『이기적 유전자』가 오늘날에도 불편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진화생물학의 고전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명적, 철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걸작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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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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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는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함께 아베 고보의 1960년대 대표작 중 하나로 작가의 문학적 전성기를 보여주는 실존주의 문학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타인의 얼굴』과 『모래의 여자』와 같이 정체성의 상실과 실존적 불안이라는 인간이라 믿고 있는 존재의 의미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규범이나 지위 등이 사실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공통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판박이』는 이들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보이고 있는데, 바로 ‘화성인의 지구 침투’라는 본격적 SF적 발상을 토대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궤변과 논리적 말싸움(舌戰)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차별화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이 진정 ’나‘인가?”, 그리고 ’나를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증명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즉 이 작품은 두 작품이 말하는 실존적 불안의 변주를 뛰어넘어 인간을 하나의 논리적, 언어적 구성물로 해체해보는 실험실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궁극적으로 『인간 판박이』는 인간 정체성 상실의 소설을 더 깊이 파내려가 인간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증명의 체계’를 해체하는 소설이라고.

 

『타인의 얼굴』이 시각적 단절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하고 있다면 『모래의 여자』는 사회적 고립을 통해 묻고 있음에 비해, 『인간 판박이』는 지성마저 가짜일 수 있다는 가장 극단적 의심에 도달해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뒤흔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그 원형을 1951년 발표된 그의 단편 「S. 카르마씨의 범죄」에서 발견한다. 소설의 주인공 S.카르마가 존재를 박탈당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인간‘으로 인식되지 못하며,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당하는 일련의 장면이 떠오른다. 즉 인간 정체성과 실존의 물음은 아베 고보가 일생 천착하던 중심 주제임을 새삼 확인케 하는 작품이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판박이』는 이러한 물음의 극단인 ’인간‘이란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심까지 제기하고 있기에)

 

S.카르마는 인간이 사회적 기호(이름, 명함, 얼굴 등)를 잃었을 때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정체성 상실과 실존의 그 질긴 관계성을 묻는다. 사람으로서의 환대라는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자리의 마련을 말하던 인류학자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의 목소리 중 한 측면에서 좀 더 밀어붙인, 다시 말해 사회적 승인보다 더 심층의 물음인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는 정말 자명한가?’ 라는 물음일 것이다. 즉 『인간 판박이』 에서는 외형만 인간인 화성인이 진짜 인간의 자리를 위협함으로써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붕괴시킴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존재 우위론의 허상을 박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라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정체성이란, 사회 시스템에 길들여져 그 안에서 자기 실존성을 인식하거나, 얼굴, 소위 외피(가죽)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 결과로서의 정체성에 불과하거나, 진짜와 모방의 경계나, 공통상식과 망상의 경계의 흐릿함을 들추어냄으로써 인간성 혹은 인간이란 것 자체에 대한 확신을 허물어뜨린다.

 

사실 우리들이 같은 종으로서의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아니 김현경의 말처럼 인간 상호간의 질서에 따라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체하는 것에 대한 상호 믿음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인간의 이름인 ‘사람’에 가까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들의 현실 세계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려는 고약한 규제 규칙들을 가지고 사람의 자리를 박탈함으로써 인간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로써 한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자유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인간성 자체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언어에 씌워진 정체성이란 환상이거나 진짜 없는 짝퉁처럼 그 실체기반의 취약함, 그 조작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소설 『인간 판박이』의 기묘한 핵심은 바로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존재의 논리로서, 평론 풍 사회극인 <안녕하세요 화성인>이라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의 각본가인 주인공과의 논쟁이며, 그 핵심 질문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기 확신이 사실상 증명된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전제 위에 세워진 약속이라는 사실에 불과하고, 결국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명제가 아니라 공리(公理), 즉 너무 당연하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화성인이 등장하면서 이 증명하지 않았던 것에 문제가 발생한다. 네가 화성인이라는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거는? 이 증명 책임에 인간이 제시하는 근거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타인의 얼굴』에서는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문제가 발생하지만 『인간 판박이』에서는 얼굴이 너무 완벽하게 같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타인의 얼굴』은 얼굴이 사라짐으로써 나는 누구인가라고 한결 쉽게 물을 수 있었지만, 『인간 판박이』는 완전히 같기에 얼굴만으로 인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지점에 도달한다. 즉 정체성이 얼굴의 상실에 의해서 흔들린 『타인의 얼굴』과 달리 완벽한 동일성이 정체성을 흔든다. 제목 『人間そっくり』, ‘인간과 똑같다.’ 라는 표현처럼 ‘인간’과 ‘인간과 닮은 것’ 사이에 차이가 없어지는 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더욱 모호한 영역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화성인은 주인공의 말을 반박하는 논쟁 상대라기보다 상대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그것을 한 단계 더 밀어붙여 정말의 사유를 촉구하는 존재에 가까워 보인다.

 

"당신은 인간처럼 보인다.

그렇습니다. 인간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처럼 보이는 존재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이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전제가 전제를 의심하는 무한회귀에 빠져드는 논리의 미로에 갇히고 만다. 자신이 믿고 있던 전제에 의심을 품게 됨으로써 인간이라 믿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임이 흔들리게 된다. 이 대화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까지 뒤집히며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인간언어의 의미가 인간 사회의 약속이라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제 소설은 그야말로 이들 대화 속에 작가의 말이 작품의 현실을 침범함으로써 인간 정체성을 다루는 SF를 초월하여 소설가와 이야기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기에 이른다.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세요 화성인>을 쓰는 각본가에게 실제로 갑자기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옴으로써 화성인을 만들어내는 사람, 즉 허구를 만드는 사람에게 허구가 현실로 침입하고, 작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되어버린다.

 

소설을 읽고 있던 독자는 갑작스레 내가 지금 누구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게 한다. 주인공이 쓴 이야기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쓴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베 고보가 쓴 것인가, 아니면 화성인이 주인공에게 쓰게 만든 이야기인가? 진정 이야기의 저자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까지 건드리며 소위 메타픽션(Metafiction)적 층위를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허구성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된다. 이 메타픽션의 층위는 인간 존재 증명의 문제와 뒤엉켜 존재자의 믿음에 근본적 구멍을 뚫어버린다. 어쩌면 이것은 아베 고보가 장식처럼 도입한 위상수학(topology)에 그 답이 있는 것 같다.

 

모양이 겉으로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보다 관계와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위상수학 기능의 하나이다. 도넛과 손잡이달린 컵이 모양은 다르지만 구멍이 하나라는 위상적 구조가 같기에 같은 종류로 볼 수 있듯, 인간과 화성인의 외형이 같다면 둘은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과 화성인의 관계 구조가 같다면 둘을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정상인과 미친 사람, 현실과 허구, 나와 타자 사이의 경계도 위상적 관계처럼 변형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게 만든다. 따라서 소설은 누가 진짜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어떤 관계 구조 속에서 누가 누구로 규정되고 있는가라는 물음, 즉 김현경의 절대 환대의 문제와 유사하게 회귀하는 것 같다.

 

이러한 인간 존재 증명의 물음에 휩싸여 인간 정체성에 대한 의심의 문제로부터 나는 오늘의 트랜스휴머니즘, 즉 인간 신체의 변화를 도모하는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간 찬양문제를 떠올렸다.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를 인간 존재의 최종적 경계로 보지 않고, 유전자 편집과 인공지능, 신체 증강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등을 통해 인간이 새로운 존재형태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현실적인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의 논의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증강하는 것을 넘어 장기적으로 새로운 종의 출현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 판박이』가 오늘날의 포스트휴먼 사유와 만나는 더욱 근본적인 지점은 ‘새로운 인간’을 상상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묻는 데 있다. 소설 속 화성인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고 인간과 똑같이 말하며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외형은 인간의 충분조건이 될 수 있는가? 반대로 인간의 기억과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인간임을 보장한다면, 그것들이 인공적으로 복제되거나 변형되었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간 판박이』는 포스트휴먼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무엇인지부터 증명해야 한다’는 역설을 앞당겨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이라는 기존의 종을 변형하여 새로운 종의 탄생을 말하지만, 『인간 판박이』는 오히려 ‘기존의 인간이라는 종이 정말 그렇게 명확하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음으로써 오늘의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의 무지를 책망하는 듯하다. 이제 최근의 가장 첨예하고 날카로운 문제인 AI와 이미지의 문제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의 얼굴을 만들고, 언어를 생성하고, 문체를 모방하고, 그림을 그리고, 인간처럼 대화한다면 이 인간처럼 보이는 AI는 인간과 다른가? 이 질문은 『인간 판박이』의 제목이자 물음과 정확하게 겹친다.

 

‘인간처럼 보이는 것(Human-like)’과 ‘인간(Human)’을 어떻게,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에 따라 둘의 차이는 극히 모호해진다. 인간과 똑같이 말하고, 기억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인간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 오늘의 AI를 ‘너는 인간이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곤혹감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AI 시대의 존재론적 질문을 선취한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베 고보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인간능력을 새로이 확장하는 방향의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와 거의 대척에 놓여있는 질문을 한다. 당신들은 개선하려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라고 ‘인간’이라는 말을 먼저 의심한다. 아베 고보는 이렇듯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기반 자체를 해체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을 특별한 것으로 지정하기 위해 명명한 행위일 수 있다고 말이다.

 

자, 이제 소설의 물음을 돌고 돌아 ‘인간 판박이’가 ‘인간’에게 돌아온다. 화성인이 인간 판박이인가? 아니면 인간이 사실상 인간 판박이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고 말이다. 즉 판박이가 화성인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속성이 되고, 인간이라는 이름을 받고, 행동 양식을 배우고, 규범에 적응하며 인간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을 반복하는 자신들을 인간이라고 믿는 것 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이 소설 ‘人間そっくり’는 정말 무서운 의미로 와 닿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라고 자신들이 정의한 것을 닮은 존재일 뿐이라는 역설로 뒤집혀 버린다. 인간이라고 믿었던 근거가 사회적 약속, 기억, 외모, 이름, 가족, 정상성, 언어, 이성이라는 불안정한 토대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는 이 작품 앞에서 그저 인간이라고 믿는 인간의 형식을 반복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 판박이에 불과함에 당혹감과 그 불의하게 보이는 진술에 발끈할지도 모른다.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어쩌면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인간윤리에 대한 다른 질문일지도 모른다. 정상과 비정상, 인간과 비인간, 허구와 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게 되는 이 위대하고 선취적인 논리의 미로를 거닐어보는 것은 당면한 오늘의 세계에 시의적인 독서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은 당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텐가? 인간의 언어라는 그 허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인간이란 범주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인간과 닮은 AI와 인간인 자신이 같지 않은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이 선구적 작품을 읽어보시라! 논리의 미로에서 허우적대다보면 우리들은 인간이라는 정체의 그 허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허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이 위대한 논리게임과 위상학적 주제와 형식 속에서 우리들의 잘 난 인식론은 허물어질 것이다. 타자와 사회라는 환경의 영향 속에서만 만들어질 뿐인 인간이라는 존재, 그것을 독자적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 증명의 체계로 세워들 보시라, 아베 고보의 인간 증명체계의 해체에 도전하시는 독자는 아마 AI의 도전에서도 승리를 얻어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 가을을 시작하는 멋진 독서가 되어 줄 걸작 중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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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최근 글로벌 AI기업 앤트로픽의 수장인 다리오 아모데이의 인간 이해와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AI의 재귀적 자기개선 기능에 대한 위험 경고는 공포로 가득했다. 기술 자본들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촉발된 가속화된 AI경쟁은 그 어떤 윤리적 물음조차 건너뛰었다. 그가 근심스럽게 외친 향후 10년 내 인류 종말 가능성은 아베 고보가 말하는 인간 증명에 대한 부실함과 불완전성에 기초한 자기 원인에 대한 무지의 필연적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류의 실존적 위험 앞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발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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