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진술에서 질(質)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심코 어떤 대상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을 투사하고는 마치 그 대상의 본질자체를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양 말하고는 한다. 때문에 ‘이 사람은 질이 좋다.’라든가, ‘이 천은 질이 나쁘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그 말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그 ‘질(質)’이라는 것이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분리되어 독립된 정의를 지니는 자의적 판단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만일 질이 대상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판단가치에 따른 구분이라면 그 말은 단지 말하는 자의 내면 투사에 불과할 뿐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질을 주관적 표현이라고 보편성의 가치를 그저 폄하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1. 사회적 가치 판단으로서 질(質)이란 대체 무엇인가?

 

왜냐하면 이 문제는 몇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어떤 대상이 지닌 특성이나 성질이라는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서의 질’이 있고, 그 대상이 어떤 기준에서 더 낫거나 우수하다는 판단인 ‘평가로서의 질’이 있으며, 그 대상이 추구할 만한 가치나 목적 적합성 여부에 관한 판단인 ‘가치로서의 질’로 구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두 개의 의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튼튼하고 다른 하나는 아름답다. 어느 의자가 질이 좋은가? 내구성 기준으로는 전자가, 예술적 감상이나 실내공간의 미적 조화 측면에서는 후자가 질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즉 내구성이나 미적 속성이 곧바로 종합적 질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을 판정하려면 대상의 속성뿐 아니라 그 속성을 평가하는 목적과 기준도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질을 단순히 대상 안에 들어 있는 독립적 속성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대상의 속성, 평가 목적, 판단 기준 사이의 관계를 함께 살펴야 비로소 어느 만큼의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일상에서 이러한 살핌을 등한시하고는 대상을 마구 재단하고 판단하곤 한다.

 


질이 대상 자체에 완전히 내재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올바른 방법만 발견하면 객관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말 할 것이다. 이와 달리 질은 대상과 분리된 외부의 가치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의적인, 개인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앞서 세 가지 층위를 언급했듯 실제로 질은 이처럼 무 자르듯 단순한 관계가 아닌 복잡한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질’이라고 말할 때 질은 내구성, 정확도, 안전성, 처리 속도와 같이 일정한 조건 아래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하기도 하고, 무엇을 위해 이용(사용)하는 가에 따라 중요성을 달리하는 ‘목적과 맥락’의 측면에서 말하기도 하며, 효율성, 공정성, 아름다움, 지속 가능성 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와 ‘가치의 우선순위’에 따른 평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빠른 자동차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의자가 항상 가치 우선을 갖는 것도 아니듯 말이다.

 

결국 측정의 객관성이 가치 판단의 객관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대상의 모든 특성을 종합하여 좋은 질을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의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은 칼은 잘 자르는 칼이고, 좋은 연주자는 연주라는 활동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의 질은 대상을 목적과 기능에 대한 적합성으로만 설명한다. 이는 인간의 삶처럼 목적 자체가 논쟁적인 대상에게는 대체 무엇이 탁월성인지를 다시 물어야하는 극히 지엽적인 설명에 머물고 만다. 칸트는 판단을 증명할 수 있는 명확한 개념이나 규칙을 제시하기 어렵다며, 보편적 동의를 요구하는 판단일지언정 객관적 측정 기준을 갖는 것은 아니라며 미적 판단의 보편성 문제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라 해서 이보다 나은 설명을 한 것은 아닌데, 대상을 오직 성능(능력)과 유용성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모든 대상을 어떤 공통된 척도로 비교하려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자, 제기한 질문, 대상과 분리된 질이란 무엇인지 다시 물을 때가 되었다.

 

질이 대상과 분리된 독립된 실체라면 우리는 그 질이 무엇인지 대상과 무관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음, 우수함, 탁월함과 같은 말은 대개 무엇이 좋은지, 어떤 점에서 우수한지, 무엇을 위해 탁월한지 물을 때에만 비로소 구체적 의미를 얻는데 불과하다. 그럼 질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한 것일까? 질은 개별적 속성을 넘어 여러 속성을 종합하고, 그것을 목적이나 가치에 비추어 평가하는 개념이라 이해 할 수 있다. 일례로, ‘좋은 소설’이라는 판단은 문장의 아름다움, 서사의 완결성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 기존의 관습을 변형하는 힘, 언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정도 등 서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차원이 관여하는 것이다. 이들을 정리하면 질을 이렇게 잠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질이란 대상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일한 우수성의 실체라기보다, 대상이 지닌 여러 특성이 특정한 목적과 가치의 지평에서 평가되고 서로 비교되는 관계적 개념이라고 말이다.

 

2. 질 판단 기준이 대상의 전체 특성이 되는 기이한 역설

 

이제 본론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늘의 질은 흔히 점수, 순위(서열), 지표, 인증, 생산성 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수단은 복잡한 대상을 비교하기 쉽게 해주지만 동시에 매우 큰 위험을 갖는다. 측정 할 수 있는 특성이 질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질을 취업률과 논문 수로, 노동의 질을 생산량으로, 예술의 질을 관객 수와 시장 가격으로 평가한다고 해보자, 이 지표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 지표가 평가의 일부로 그치지 않고 대상의 전체로 규정하며 바뀌는 순간이다. 이때 질은 더 이상 대상에 관해 질문하는 개념이 아니라, 대상을 특정한 질서에 편입시키는 규범으로 작동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로버트 M. 피어시그는 그의 자전적 저술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몬태나주립대학 영문과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학과장이 그에게 “선생께서 학생들에게 질을 교육했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에요.”라고 말하는 그 요구이다.

 

우리는 대상의 질을 판단하기 위해 기준을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곧 질이 되어버리고, 마침내 기준에 포착되지 않는 대상의 특성을 질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는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영문학 학과장은 피어시그에게 질을 교육하라고, 규범, 즉 정해진 속성이 곧 본질이니 그것을 엄수하고 그 외의 것은 배제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측정하고 관리 가능한 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 중요한 것이 측정, 관리 가능한 것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표준화가 부당한 것은 아니다, 정확성이나 안전처럼 공통 기준이 반드시 필요한 영역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적에 유용한 기준을 모든 대상과 가치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질인가를 묻기 전에 왜 그것에 질이라는 판단을 갖다 대야 하는가? 라는 것이다.

 

어떤 기준이 대상의 특성을 잘 측정하는가와 그 기준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는 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질을 판단하는 권한과 기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질을 정의하는 작업은 나음(우수성)의 속성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대상의 특성, 평가의 목적, 가치의 위계가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이때 근본적 의문이 생긴다. 질을 ‘더 나은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나음은 질과 별도로 정의 될 수 있는가? 만일 나음을 정의하기 위해 다시 다른 질적 기준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끝도 없이 정의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래서 피어시그는 질에 대한 이 물음의 상자에 갇혀 끝없이 맴돈다. 여기 그 문장을 인용해 둔다.

 

"질을 함유하고 있는 대상과 분리해서 질이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질은 거품처럼 꺼져버리고 만다, 이야기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만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모든 실용적 용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실용적 용도를 위해 그것은 정말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달리 무엇에 근거하여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분명히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보다 낫다....하지만 낫다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15장, p332

 

이 인용절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이미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그리고 질을 가치판단으로 설명하려면 그 가치판단의 근거를 다시 설명해야 하므로 질(質)의 본질은 끝없이 유예된다. 가 될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질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독립적 본질을 지시하지도 않으면서, 마치 그러한 본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능하는 언어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한다. 그렇다면 질은 대상을 기술(記述)하는 말인가, 대상을 평가하는 말인가?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이 천은 부드럽다 → 이 천은 내구성이 높다 → 이 천은 질이 좋다> 촉각 특성에서 시험 비교할 수 있는 특성으로,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앞선 특징들을 종합할 수 있고, 그 밖의 다른 가치를 포함할 수도 있는 특정 가치의 관점에서 종합하고 승인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질은 기술적 개념에서 평가적 개념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질이 좋다’라고 우리들이 말할 때 반드시 그 평가의 근거를 명시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은 단순한 개인적 감상 이상의 의미를 주장하는 듯하다. 마치 대상 차체에 좋은 질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곳을 짚는다. 질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질에 관한 판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순간적 역전 현상을 맞이하게 되는데, 대상에서 질을 발견했다고 말 할 때 실제로는 이미 어떤 기준에 따라 대상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고, 그 평가의 결과를 대상 자체의 속성으로 돌려놓는 순간 평가의 기준은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사회가 노동의 질을 성실성, 생산성, 효율성으로 평가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노동의 질이란 본래 그러한 속성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왜 성실성과 생산성이 좋은 노동의 기준이 된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노동을 조직하는 경제체제의 필요가 그러한 기준을 강화한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생산성이 노동의 질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일 수 있다. 문제는 이 특정한 가치가 형성된 역사적 과정을 지워버리고 그 가치를 대상의 자연적 본질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질이 좋다는 표현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특정한 가치 체계를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언어가 된다.

 

여기서 이런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질이 대상에 내재한 본질이라면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모순이다. 반대로 질이 평가 기준에 의해 구성된다면 왜 그 기준을 대상 자체의 속성인 것처럼 말하는 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질의 본질이란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질을 찾는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좋은 소설’, ‘좋은 칼’, ‘좋은 교사’, ‘좋은 사회’>, 이 네 가지에서 ‘좋음’은 동일한 속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의 독립된 ‘좋음’을 발견할 수 없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런데 각각의 맥락에서 적절성, 목적의 성취, 가치 있는 결과들을 판단한다는 유사성이 있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적 실천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이 적절한 이해일 것이다.

 

피어시그는 질의 본질을 사유하는 가운데 오리무중에 빠져 끝없이 순환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 사로잡힌다. 피어시그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그가 애초에 서로 다른 평가의 맥락을 관통하는 하나의 독립적 실체가 있다고 질을 가정한 것이 문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질을 정의하기 위해 더 근본적인 질을 찾아가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수행하는지 살펴보지 못했던 까닭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목소리로 말한다면 질은 “본질을 가치 대상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판단을 조직하는 언어적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가 남는다. 질을 단지 언어의 사용이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다.

 

3. 질은 객관주의 언어인가, 아니면 상대주의 언어인가?

 

우리는 어떤 대상의 질을 평가할 때 단순히 사회적 관습의 가치나 취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해당 대상의 물리적, 생물학적 조건과 인간의 경우 생명이라는 가치가 판단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에 관해 판단할 때 적어도 세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대상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라는 대상의 실제 특성, 그리고 어떤 성질을 중요하게 여기는가라는 평가의 기준, 마지막으로 왜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판단의 정당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적용하면 질의 문제를 전적으로 객관주의나 상대주의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종합하면 질은 대상과 완전히 분리된 실체도 아니고 순전히 주관적인 감정도 아니다. 질에 대한 판단은 대상의 특성과 평가 기준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 기준 자체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앞서 제기한 문제를 재구성해보자. 우리는 질이라는 개념을 통해 대상에 가치판단을 부여하곤 한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을 정당화하려면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을 정당화하려면 다시 그 기준이 지향하는 가치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정당화하려면 또 다른 기준을 요구하게 되는 순환 논리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질은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제공하지 못하는 개념처럼 보인다. 만일 이 말이 진실이라면 질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독립적인 본질을 가리키지 않으며, 평가와 정당화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본질을 계속 찾아가는 작업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질의 본질을 찾는 대신 질이라는 말이 어떤 가치를 승인하고 어떤 대상을 배제하는지, 그 기준은 누구에게 유리하며 무엇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으로 물음의 본질을 바꿔놓는다. 질의 정의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을 요구하는 사회의 조건을 묻는 것으로 이동해야 함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애초의 물음인 ‘질이 좋다’고 말 할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포함될 수 있음을 간과했던 실수도 있다. 대상에는 실제로 더 우수하게 만드는 어떤 성질(능력)이 있다는 ‘존재론적 주장’과 특정한 목적과 가치에 비추어 그 대상을 더 우수하다고 판단하려는 ‘규범적 주장’을 구별하지 않고 뒤섞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혼란을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상적 언어 습관에서 이 둘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다보니 전혀 다른 주장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오류다. 규범적 판단을 마치 존재론적 사실인 것처럼 말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거나 감추고 있는지를 은폐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인식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의식적 혼용 때문이거나, 이에대한 식별 불능의 무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피어시그는 질이라는 사회적 가치판단에 저항한다. 그는 가치판단의 정당성을 얻는 조건 자체로서 질을 묻는 것인데, 가치 우선순위가 들어있는 질이 좋다는 판단에서 가치 선택과정이 생략되었을 경우, 부여한 우수성이 마치 대상 안에 본래부터 존재했던 객관적 속성인 듯 보이는 그 판단 전체에 의심을 가졌던 까닭이다. 존재론과 규범의 혼용 문제는 근대 사회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효율성이나 성과, 피어시그의 말을 빌면 합리적 이성의 가면을 쓴 근대 과학적 이성을 객관적 가치 기준으로 내세우는 현상의 비판적 검토일 것이다. 과연 가치판단의 객관적 정당성은 어떻게 획득되는 것인가? 그것이 대체 인간의 정의에 가당키나 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계속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질’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과 사회적 취향이 충돌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판단은 언제 사회적 규범에 대한 복종으로 변질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런데 명확하게 분리하여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좋다’라고 판단하는 것과 그 대상의 좋음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두 판단은 실제 삶에서 뒤섞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거나, 반대로 사회적 기준을 거부하는 것 자체를 좋은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두 인식은 실제 우리들 사회와 사람들에게 훨씬 복잡한 양상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사회의 기준에 순응하면서 자기 판단을 잃기도 하고, 그 기준에 저항하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또는 자기 판단만을 믿고 그 밖의 모든 가치 판단을 부정함으로써 광기로 치닫기도 한다.

 

4. 질에 저항하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

 

아마 허먼 멜빌이 창조한 인물, 사회적 가치에 단순한 불복종을 넘어, 타인이 정해놓은 일련의 판단기준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는 바틀비는 이 질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한 대표적 인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피어시그는 이 말을 하지 못함으로써 지독한 분열증으로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사회는 질이라는 단어를 이용해서 어떤 행동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유용하고 무용한지,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지들 판정한다. 그런데 바틀비는 이러한 판정에 논박으로 맞서지 않고 판정의 요구자체를 무력화한다. 피어시그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대상의 질을 판단하는 충분한 근거인가?라고 묻는다. 이다. 물론 바틀비의 거부, 그의 침묵은 저항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거부는 해석불가능의 지점에 내려놓는다. 질을 말하는 인간사회에 대한 짙은 혐오를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사회가 기대하는 가치 판단에 동의하지 않으며 거부의 의지를 보이는 문학작품들은 수두룩하다. < “Aujourd'hui, maman est morte. Ou peut-être hier, je ne sais pas.”(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회의 관습적 요구인 슬픔을 표현하지 않거나, 재판을 받으면서도 법정에서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 문제가 되는 뫼르소처럼. 그는 사회가 특정한 상황에 요구하는 감정과 표현을 자연스레 수행하지 않는다. 그 결과 사회는 그의 행동 뿐 아니라 인격 전체를 의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 인간 사회의 논리적 부조리를 목격하게 된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를 판단하는 우리들의 인식을 생각해보자. 그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고 후회하는가? 그리고는 이 판단을 통해 그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인격에 대한 판단을 하고, 마침내 이 판단을 근거로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끌어들인다. 규범적 측면을 끌어들여 그 사실만으로 인간 존재 전체나 도덕적 성격을 확정하려는 것인데, 우리들은 이러한 질의 광범위한 무법지대가 결코 타당한 것이 아님을 뫼르소에게서 발견한다. 여기에 사회적 유용성의 기준에서 배제된 그레고르 잠자도 한 예로 추가해도 될 것이다.

 

이들 문학 작품 속 인물들과 더불어 사회적 기준에 순응하는 사람,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그 기준을 내면화한 사람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곤경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문학들로 이 세계가 가득 채워져 있다. 그만큼 질의 문제는 우리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요청하는 중대하면서도 모호한 개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실을 추구하는 주체가 치르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없이 써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어시그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사회적으로 승인된 지식과 판단의 틀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자신의 사유와 사회적 삶 사이의 간극은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급기야 정신 분열에 시달린다. 실존철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R. D. 랭은 『분열된 자아; 정상성의 세계에서 자아가 입는 상처((The Divided Self)』,(1960)에서 이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세계가 외부의 정상성 기준에 비추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랭은 한 인간이 자기 경험의 진실성을 지키려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및 공동의 세계를 유지해야한다면 그 사이의 긴장은 감당키 어려운 것임을 시사한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부정해야 한다면, 그 인정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과 개인의 내적 경험 사이의 균열을 이해하려는 랭의 관점은 질의 문제를 사회병리학으로 예리하게 관찰토록 해준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교정(Correction)』 (1975)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로이타머는 건축가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질서를 실현하려는 강렬한 의지의 인물로 자신이 구상한 완벽한 원뿔형 건축물을 만드는데 몰두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현실 속의 타인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수록 실현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를 추구하는 그의 사유자체가 그를 압박한다. 피어시그는 질에 관한 문제를 기존의 철학적 범주로 설명할 수 없는데서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지만, 로이타머는 생각하는 질서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행위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두 인물 모두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유가 사회보다 우월하다거나 그들의 파국이 반드시 진실 추구의 대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5. 맺음말 : 질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다!

 

피어시그는 말한다. “Those are society’s standards, they aren’t my standards.” 그것들은 사회의 기준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라는 이 말은 사회기준을 거부하는 개인의 독립선언처럼 읽을 수도 있지만, 그의 글을 읽은 자로서 그보다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타협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었다는 아픈 감각의 표현에 가까움을 안다. 우리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때론 강한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때론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융화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믿는 질과 실제로 사회가 요구하는 질 사이에서 그 관계를 물으며 충돌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깊은 내상을 입어 혹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상이 결코 나쁜 질인 것은 아니다.

 

이제 맺어야 할 것 같다. 질이 사회적 합의로 환원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질을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질을 지키면서도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피어시그를 비롯한 많은 저술들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질서를 어떻게 끝까지 추구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완벽한 질서와 판단의 확실성은 결코 견고한 본래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이 때론 파괴되기도 하지만, 그 가치 판단의 확실성이라는 질 또한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로 그 질을 대체하기도 한다. 대상에 그 어떤 절대적 가치판단을 주장할 때 인간 세계는 대단한 충돌에 직면하게 된다. 대상이 가치판단을 양적으로 넘어설 때 그 세계는 새로운 질서의 인간으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때의 진통은 곤혹스러운 혼란이겠지만, 그를 이겨내면 그 변화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수시로 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질은 절대적 속성의 언어가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여기에 절대적 진실의 의미를 씌워놓으면 독단과 폭력이 자라난다. 사회적 합의는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질은 이러한 임시 합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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