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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 ㅣ 트리플 37
임솔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평점 :
어쩌면 우리들의 삶이란 상기하고 기억하고 회상하고 상상하며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속 세 편 단편들의 주인공인 지윤, 도희, 민영의 이야기들은 분명 현실 속 삶의 양상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마음속에 지각되는 느낌과 생각들이다. 아마 우리들의 말과 행위란 이러한 것들의 외형적 표현양태일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말로 진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술되지 못한 것들은 그 말들과 말들의 사이, 말의 이면 속에서 그것의 의미가 해독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들 존재하는 것들의 기억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는, 어쩌면 무의식이거나 전의식에 해방의 통로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공감과 배려의 언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의 각 단편작품들은 두 번 읽게 된다. 소설집에 실려 있는 에세이 「내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에 서술된 내용들은 각 작품들의 보충이거나 장면의 사실들, 삭제된 장면들의 기록이다. 소설의 이미지에 가닿는 하나의 짧은 단서일수도 있고, 배경과 대사의 배후적, 아니면 무의식의 연결지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에세이를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 한다는 자극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각 작품에 대한 처음의 독해가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더 깊게 문장들에 다가가는 시도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드넓은 대합실이 펼쳐진다. 지윤은 겁부터 난다. 이렇게 드넓은 장소에서 지윤은 늘 호흡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 「금빛 베드 러너」, p17
「금빛 베드 러너」의 화자인 지윤은 타자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자신의 결여를 지각함으로써 모든 관계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해야 했던 삶의 장면들을 반추한다. 그러한 장면을 더듬으며 엄마에게 봉투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곤 엄마가 폐암 4기 판정을 받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자폐스펙트럼 장애 검사 결과를 받은 지윤은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저 멀리 밀쳐놓고 암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고 말한다.
엄마에게 받았던 재사용된 듯한 흰 봉투에 쓰여있던 “힘 내세요.”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와 봉투 속 7년 전 사랑했던 연인에게 부치지 않았던 편지의 사연이 흐르고, 여행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서울 호캉스를 함께하는 계획을 실행한다.
지윤은 서울 나들이에서 엄마와 그림 전시도 둘러보며, 엄마도 좋아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엄마는 기침과 고열 증세를 보이고, 감기약을 찾아 약국을 찾지만 엄마가 말했던 ‘화이투벤’ 상표의 약이 없다. 지윤은 당혹스러움에 “두 주먹을 꼭 쥔다. 평정을 잃을 때 지윤이 조건반사처럼 하는 동작”이다. 지윤은 다시 약국을 찾아 다른 이름의 감기약을 사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에게 이러한 판단은 자신을 이겨내는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지윤이 타인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결핍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힘겨운 노력이다. 그녀의 표정에 웃음밖에 없다는 자폐스펙트럼 진단검사자의 말처럼 무감각하고 무표정해 보이는 자신으로 인해 타인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관계에 긍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적으로 오랜 동안 훈련한 표정이다. 지윤은 이윽고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자신에게 자폐스펙트럼과 관련한 증상이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마음을 충분히 잘 알고 돌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낀다.
애정을 구걸하는 지윤의 연애편지 속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네 마음을 모르겠다고. 사랑한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적혀 있었”던 구질구질한 말들이 마치 자신이 쓴 것 같았다고 말하는 엄마의 말은 지윤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마음으로 지윤에게 닿는다. 엄마는 지윤에게 이제 “안 그럴 거지?”라고 다짐하듯 묻는다. 아마 지윤은 세상의 잣대가 들이대는 것에 더는 자신을 맞추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직접 볼 리 없는 곳들을 함께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상담하는 지윤에게 자폐스펙트럼이 아니라며 자폐스펙트럼 증상을 지닌 사람들을 ‘걔’들이라고 마치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된 존재들로 치부하듯 말하는 상담사의 위장된 배려, 기만의 언어에 묻어있는 “자신의 무지에서 묻어나는 미량의 악의”를 느끼는 것처럼, 우리들은 은연중에 사람을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화하여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시선에 노출된 사람은 그 범상치 않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피로감은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지로 작동하게 된다. 지윤의 엄마가 딸 지윤에게 그러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말은 이해의 말이고 사랑의 언어이며 화해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지윤에게 평온이 깃들었을까?
“엄마가 왜 하필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갈 수 있는 곳이 그만큼 없었던 거겠지. 도희도 갈 곳을 더는 알지 못했다. 도희는 돌아갔다.”
-「도희의 시간」, p61
「도희의 한 시간」은 어린 시절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야간열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던 기억으로 시작된다. 등산 바지, 바람막이 점퍼, 기능성 옷을 입고 나선 엄마를 따라가는 낯선 여행은 아이에게 불안감을 드리운 무엇이었던 것 같다. “왜 하필 저 옷을 찾아 입고 집을 나왔을까.” 그래서 덮쳐오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아이는 꾸준히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이 타인을 해독하려는 힘겨운 노력의 장면이 겹치는 듯하다. 일출을 보고 아무것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되뇌다가, 오색 파라솔을 대여해 준 엄마의 행위에 낯설어한다, 고개를 들어 엄마의 표정을 살피는 어린 도희의 마음에 깃들었던 그 감정을 우리들은 안다.

정동진에서 엄마와 함께했던 날의 기억의 장면들은 온통 엄마 표정의 변화를 흘깃거리며 두려움과 무서움, 근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 이 열차여행의 장면은 몇 몇 수녀들이 교사를 하는 고등학교 시절, 막 개통했던 KTX를 타고 수업을 거른 채 한 시간 남짓의 여정에 외로움과 죽음이 어우러진 사연과 순간의 생각들의 장면들, 그리곤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던 시절 애인이 이별 통보를 하면 무작정 열차에 올라 서울로 향하고, 빈 백팩을 매고 마중 나오던 애인과의 반복된 여정의 시큼한 나날들, 그리곤 옆 좌석에 앉게 된 노수녀와의 짧은 대화들, 진주와 포항으로 갈라지는 지점에서 열차 칸이 분리되어 갈아타야 했을 때 칸을 바꿔 타야 하는 노수녀가 어느 순간 도희를 발견하고는 “왜 또 여기냐고” 묻는 장면은 마치 생이란 반복되는 어긋남, 두려움과 곤혹으로 이루어졌다는 상징적 장면으로 내게 다가왔다. 평론가 전청림이 해설에서 “불가사의한 바깥의 역량”, 그것의 미덕에 대한 깨달음의 장면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도희의 ‘한 시간’의 파노라마처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억의 장면들처럼 우리는 짧은 시간동안 묻혀있던 생의 엄청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길어내 현실 속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의식의 표면에 해방되어 새롭게 해석되도록 하는 것만 같다. 인간의 이러한 역동적 정신의 작용을 나는 거의 마주하지 않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것일 테다. 조금 느린 일반 열차를 이정표 없이 기억과 상상의 장면들을 떠올리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좀처럼 저 심연에 켜켜이 쌓여있는 의식하지 않았던 장면들과 이제는 마주해야 할 것만 같다. 그 시간은 아마 너그러운 화해와 이해, 사랑이라는 공감의 장면들로 이뤄질 것이다.
“살아 본적도 없는 집을 이토록 아늑하게 느낀다는 것이 이상했다. 민영은 없는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 「쉴 곳」, p80
「쉴 곳」은 세 작품 중에서 내겐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민영은 자신의 성장기를 보듬어주었던 열여덟 살 터울의 오빠 민기와 그의 아내 정화가 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촌스럽지만 층고가 높아 옹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 집(펜션)에 늦은 밤 도착한다. “정화와 민기의 집은 환했다.”, 민영을 기다리는 그들의 마음의 불빛처럼, 그래서 민영은 긴장감이 탁 풀리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정화와 민기는 극히 대조적 성향의 사람들이고, 이제 쉰 줄에 들어선 그들 내외의 관계는 서걱거린다.
오빠의 얼굴이 낯설다. 코 성형수술을 한 탓에 얼굴의 전체적 이미지가 변한 것이다. 민영은 그런 민기를 걱정한다. 민영은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면 자해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데, 어린 시절 보았던 “거울 조각들에 묻어 있던 핏자국”의 기억부터 학습지를 다 하지 않아 정화의 매보다 훨씬 약한 손바닥 매를 맞았을 때 마침 집에 들어 선 정화가 불같이 “당신이 뭔데 우리 애를 때려?”라고 대거리를 하던 정화를 떠올린다.
그렇게 정원 밭의 두더지 굴을 마구 밟아대던 민기의 폭력성의 기억, 사람들과 무던하게 지내고 싶어 나서거나 끼어들지 않는 정화의 성향, 그것을 정화가 의견이 없는 무심과 타자에 대한 배격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무시와 배제로 행동함으로써 소외된 삶이된 신산한 사연이 이어진다. 정화가 민영을 지칭하던 “우리 애”처럼, 정화는 민영의 코가 자신을 닮았음을 말하듯 민영은 그들에겐 자식과 같은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아마 민영도 이러한 표현과 감성들을 모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민영의 성향은 「금빛 베드 러너」의 지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데, “사과를 받지 못한 채 퇴사했다.”는 민영의 표현처럼, 책임 떠넘기기, 상대 모욕하기, 적반하장의 대거리처럼 세상의 태도는 정말 불가항력일 때가 많다. 민영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세상에 반응하려 하지 않지만 손 떨림이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억압된 감정, 숨기고 참아내려는 마음의 지옥은 신체의 증상으로 드러나 고통을 알린다. 민영은 떨림을 감추기 위해 손을 감추고, 떨려오는 턱을 제어하기 위해 상대와 대화하기도 전에 긴장이 몰려온다. 그녀는 아예 말을 삼가게 되고, 혼자의 삶을 선택한다.
그럴 때면 민영은 정화와 민기가 억다구니를 하며 싸우는 시끄러움 속에 졸음이 오는 그런 평온을 찾아 그들의 집을 찾는다. 그리곤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민영과 정화가 차를 몰고 나갈 때 민영과 정화의 대화는 지지해주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도의 삶을 밀고나가는 것으로서 세계와의 주도적 대면의 시도가 지닌 아름다운 장면으로 내게 남았다. 민영은 액셀을 밟기 시작한다. 마을을 빠져나와 번화가를 지나치고는 이내 멀리 갈 거라고 민영은 말한다. “좋네 멀리 가보자”,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멀리 간다는 것. 아마 두려움에 대한 적응, 그것의 돌파는 사실 누구나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본다. 이내 정화가 말한다. “민영아 천천히 가자, 언니 멀미나.” 이때 민영이 말한다. “언니 해볼래?, 자기가 운전하면 멀미가 안 나.”, 그래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실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험으로 일체가 되면 울렁거림, 두려움과 긴장이 멀리 떠나버릴 수 있다.
“안 한 지 오래됐는데.”
“그냥 해 봐, *달걀 꺼내듯이.”
긴장한 정화는 웅덩이가 나타나자 크게 휘청거리고 급브레이크 밟는다. 그녀의 손이 떨고 있다. 민영은 오빠 민기에게 배웠던 말, “걱정 마. 아무렇지 않아.”라고 말한다. ‘쉴 곳’은 이처럼 서로를 들여다보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일 테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아웅다웅하지만 그래서 그 고통과 욕망과 결점과 변화를 서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곳. 그리고 마음의 응원을 해주는 이들이 있는 곳, 그런 이들이 있는 곳은 언제든 졸음에 겨워 누울 수 있는 곳일 터이다. 민영과 정화, 민기가 있는 곳, 밤고구마를 좋아하지만 민영을 위해 물컹한 호박고구마를 따로 준비해 내놓아주는 곳, 환영하고 가끔 둥지를 떠나 멀리 낯선 곳으로 동행해 줄 이가 있는 곳 말이다. “현실에 없었던 장면, 오래오래 보고 싶어지는 장면”이어서였을까? 그래 “섬세하게 작은 세계를 가꾸어나가는 듯한 정원사의 태도”가 더없이 나의 내면을 어떤 휴식의 평온함으로 채워준 소설로 남을 것 같다. 없는 기억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공감의 언어로 생각하는 것, 아마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집은 그런 언어로 가득채워진 작품집이라 해도 될 것이다.

* 달걀 꺼내듯이: 이 문장은 정화가 닭장에서 달걀을 민영에게 꺼내보라 했을 때, 암탉이 노려보는 데 부담을 느낀 민영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정화가 민영에게 건넸던 말이다.
“얘가 날 쳐다보는데. 그냥 꺼내면 돼. 그냥 어떻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