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 현대의 문학 이론 46
피터 브룩스 지음, 박인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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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학작품을, 소설을 읽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타인의 지리멸렬한 삶의 이야기에 불과한 그것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게되는 것일까? 아마 이러한 원론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우리는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정신분석이 창조적인 텍스트가 지닌 풍부함을 흔해빠진 범주에 가두고, 상투적인 옛 이야기만을 발견하게 되는 환원적인 조작이라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적 층위를 파악하는 역할 또한 부인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피터 브룩스는 첫 장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비평의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한 개념의 설명에 할애하면서 눈에 번쩍 뜨이는 문학 텍스트의 미학적 형식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의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모두(冒頭)의 세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사람들은 불쾌해지거나 싫증이 나는 데 비해, 작가가 창조한 몽상은 어째서 쾌락을 주는가? 에 대한 예술적 성취의 비밀이랄 수 있다. 그것은 미학적인 쾌락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전쾌락이라는 장치라는 것이다.

 

1. 텍스트 미학의 중추; 사전쾌락

 

사전쾌락(일종의 前戲:foreplay)이란 목적이나 결과를 향해 전진하는 움직임과, 목적이나 결말로부터 후퇴하는 움직임, 그러한 유희의 형식적 영역을 포괄하는 수사학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텍스트 역학에 있어서 지연과 전진을 오가며 형식과 욕망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과정 내내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혹은 향긋한 향기만이 가득한 듯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곧 발생할 사전의 신호로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의 세부사항, 부속물, 대상, 인물, 장소, 플롯의 점진적인 창조과정에 지배당하고, 잘못된 예측을 유도하는 지연, 속임수, 수수께끼를 경유하면서 의미에 도달해간다. 이같이 피터 브룩스는 이것을 페티시즘과 관련하여 노출증과 관음증이 문학 텍스트와 독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확신한다.

 

결국 이같은 앎을 향한 충동’, 혹은 지식 애호증에는 성애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롤랑 바르트S/Z에서 이것을 지연 공간(dilatory space)’으로 부르면서 텍스트의 중간본질이라 하기도 했는데, 도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지연시키거나 후퇴시킴으로써 지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단지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텍스트를 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동(情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무엇들, 즉 사전쾌락은 소설의 미학적 형식의 중추라는 것이다. 인용되고 있는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로돌프가 엠마를 최초의 성관계로 유도하는 한 장면은 명쾌한 사례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녀의 옷이 너무 길어서 옷자락을 뒤쪽으로 들어 올리고 

걸어도 여전히 거치적거렸다.

그래서 로돌프는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그 까만 나사 옷자락과 

까만 반장화 사이로 엿보이는

우아한 흰 양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그녀의 나체를 

연상시키는 느낌이었다.” (P 55)

 

이 짧은 페티시즘적 문장은 소설의 독해과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데, 엠마 보바리는 한 인간이라는 통일체가 아닌 물신화된 부속물, 조각난 응시와 의식의 매혹적인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엠마가 하나의 통일체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전체성이 없는 존재이며 비논리적인 욕망 덩어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텍스트의 결말을 향해가려는 독자를 채근하며, 소설의 알레고리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임을 우리는 읽어 내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강렬한 섹시함을 느꼈던 이언 매큐언의 『넛셸』이 떠오르는데 ' 마치 영원한 전희(前戱)만 있는 쾌락의 정원 같기만 하다.'고 감상을 썼던 기억이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전쾌락이 형식주의적 미학의 기능을 함의하고 있음은 지식의 탐구가, 그리고 허구적 이야기의 직조가 실제로 관음증적인 동시에 지식애호증적이라는 인간 욕망의 본질이 투영되고 있음의 무의식적이거나 불가결한 반영일 것이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힘일 것이다.

 


2. 전이(轉移)와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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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와 내러티브는 이 저술, 정신분석을 토대로 하는 문학비평의 중심을 관통하는 내용일 듯하다. “정신분석은 내러티브에 대한 학문이라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문학 작품의 텍스트란 환자와 분석가가 주고받는 대화의 진척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결되어가는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어떤 결말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이야기의 여정은 마치 비틀리고, 기억의 단락이 있으며, 연대기적 진행의 불가해한 모순, 억압된 소재를 비밀리에 보존하는 은폐된 기억으로 가득한 정신분석 피분석자의 비일관적인 내러티브를 반복, 심화시켜가며 일관성을 지닌 완전함으로 가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있는 무수한 분석사례에는 환자의 기억을 구조화하고, 불완전한 것을 다시 반복 요청함으로써 완전한 내러티브로 재현해 나가는 의사와 환자, 청자와 화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있다. 이때 의사, 청자 혹은 독자는 자신이 점유한 장소를 텅 빈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화자 또는 발화된 내러티브의 욕망이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우리는 책읽기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자의 욕망을 우리들의 욕망으로 현실화 시키곤 한다. 즉 인식의 변화, 확장, 삶의 충일함을 더하게 된다.

 

그런데 전이는 텍스트와 독자, 텍스트내 서술자와 수신자 사이의 대화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텍스트 구성의 주도권 장악, 또는 이를 통제하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우선 독자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전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거나, 혹은 실패한다면 그 독자는 언제나 동일한 텍스트만을 읽게 되거나, 독아론적인 해석만을 실천하는 데 그칠 것이다. 구태여 소설을 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책을 읽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욕망의 되먹임도, 변화의 움직임도 없는, 아무런 전이도 없는 그런 독서 행위가 경계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한편 텍스트 내 화자와 청자, 서술자와 수신자 사이의 관계에서 전이가 발생시키는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목격 할 수 있는데, 발자크의 소설 아듀처럼 청자가 개입하여 화자의 과거를 재현하여 현재의 결과를 고쳐 쓰려 할 경우 발생하는 재앙적 효과의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가하면,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같은 내러티브에 전이의 반복적 상호 되먹임의 복잡한 작동 방식을 통해 별도의 이야기(액자 이야기)에 품고 있는 욕망의 전형을 발견하게도 한다.

 

3. : 기억과 욕망

 

이야기, 내러티브란 일관성과 이해를 원하는 본질적인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정신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소설의 창작과 그것을 읽는 행위는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내러티브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점이다.

 

내 소박한 기억의 일화도 어쩌면 내러티브 충동의 일면에 닿는 것 같아 그 이야기의 한 토막도 맞춤일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마주하는 일인데, 하나의 책이 또 하나의 책으로 이어지게 하는 책 읽기의 연상작용을 생각하던 끝에 불현 듯 열네 살 소년이었던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종로 2가에 있던 대형서점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향하던 내 어린 모습과 책을 사려고 차비를 아끼며 모은 돈으로 벼르고 별렀던 책을 사던 전경이다.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옛 기억이지만 당시에 이 과정을 잠시 기록으로 옮겨놓았었는데, 그 내용이 온통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호기심과 소유와 인정의 욕망들이 빼곡했다. 이것은 백일몽, 회상 또는 환상이 지닌 재현 행위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꿰뚫고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상황임을 지적하는 정신분석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었다는 발견이랄 수 있다. 아마 아래의 인용문장은 이처럼 인간의 기억, 정신에 내재된 것의 성찰(정신 분석)이란 것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이해를 선사하는지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정신분석은 문학 분석에 이용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유난히 스스로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상호 텍스트다.

정신분석은 두 가지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 사고함에 따라, 정신이 현실을 

다시금 형식화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거나, 욕망을 가지거나, 해석을 하거나,

무엇보다 자기를 인간 주체로서 구성할 때 필요한 허구를 만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이와같은 이해의 토대를 견고하게 하면서도 복잡화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P 71)

 

정신분석은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적 층위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문학의 구조 역시 정신의 구조라는 말처럼 문학작품이 심리적 장치로서 정신의 경제적, 역동적인 조직을 설계하는 구조화 과정임을 이해할 때 정신분석 비평은 당위성을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비평이 무엇을 발견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 설명이자 또한 문학비평이기도 하다. 즉 정신분석적 지식을 갖춘 문학비평이 인간주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특히 문학 텍스트의 형식과 욕망의 상호작용, 내러티브의 구성과 재현 방식에 내재된 욕망의 힘에 대한 이해, 이야기로서의 문학작품이 지닌 삶의 경험 전달과 변화를 유인하는 역할의 설명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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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문고판)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이종숭 옮김 / 예경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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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E.H. 곰브리치서양 미술사(The story of art)를 읽으려 한 의도는 미술 작품에 대한 감상자로서의 이해력을 갖추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획득하게 될 지식 쪼가리를 비축해 보려는 천박한 기대 또한 있었다고 해야겠다. 무려 '413개의 도판'과 함께하는 선사 및 원시부족 사회의 그림과 조각으로부터 현대 추상표현주의와 '옵 아트(Op Art)', '팝 아트(Pop Art), ‘데이비드 호크니의 카메라 영상작품에 이르기까지 400여(화가,조각가,건축가)미술가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는 미술의 성대한 기록은 이러한 욕구를 만끽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곰브리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라며 미술 작품을 대하는 그릇된 태도를 지적한다. 게다가 어쭙잖은 도식화된 설명의 기억을 과시하고자 미술에 관해서 똑떨어지고 재치있는 발언을 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 어중이떠중이들의 허영을 점잖게 꾸짖기도 한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라는 것이다.

 

미술 작품의 감상은 조화에 대한 올바른 균형, 가장 조화로운 전체를 구성하는 올바른 관계, 바로 그 감각을 발전시킴으로써 삶의 조화로움이 보다 풍부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며, “미술가의 체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노력함으로써 감상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라 조언한다. 미술가가 소위 제대로 했다!’라고 느끼는 자기완성으로써의 결과물과 공감하려는 마음상태의 상상과 추측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출발점에서 위대한 예술 작품의 면면을 연대기별로, 과연 하나하나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뿌리에서 시대적 요청의 산물로서, 혹은 그 기법과 작가적 고뇌까지 역사의 위치를 설정하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따라서 구태여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읽어나갈 필요의 긴장을 해제시킨다. 그저 곰브리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와 함께 미술 작품을 음미하는 초보 감식가가 된 듯 미술가가 해당 작품을 그리고, 조각할 때의 마음을 상상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라는 그림에 얽힌 일화는 그림을 대하는 인습과 편견이 예술작품의 감상을 방해하는 맞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였던 마태오에 어울리는 천사와의 조우를 마침내 그리고 성당에 제출했으나 위대한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거절되었다는 것이다.

     

[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 거절본 ]

 

카라바조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형화된 그림을 납품했다. 전해지는 그 두 그림은 정직하고 생생한 하나와 불성실해 보이는 하나의 그림으로 보인다. 아마 친숙하게 알고 있는 주제를 뜻밖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대했을 때 우리에게 그것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고 매도하는 그러한 태도가 당시 성당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지닌 아름다움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교훈일 것이다.

    

[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 승인본 ]

 

깨알 같은 글자로 텍스트만 장장 500여 페이지(413 개 도판포함 1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미술사의 서술은 하나의 미술 작품마다에 숨겨진 조화와 암시를 포착하고 감응하려는 참신한 감상자의 마음가짐을 숙성시키는 여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의지와 마음 속 원시적인 무엇에 대한 사색, 세상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생각과 요구들이라는 예술의 역사성, 시대성에 대한 이해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주의 창시자들의 작품에서 이집트인의 회화가 지녔던 - 사물이 잘 드러나는 각도에 그린 것 - 원칙을 발견하게 되고, 그네들의 작품 소재가 왜 사람들의 생활에 익숙한 것들을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복잡하게 흩어진 묘사들을 감상자와 함께 맞추어 보자고 유혹하는 초청임을 알게 되는 것이나, 표현추상주의 화가로 불리는 잭슨 폴록의 물감을 마구 흘리고 뿌려댄 듯한 작품들이 중국화가들의 시를 휘갈겨 쓰듯 필획마다 충만해야 하는 달인의 느낌과 영감의 경지에서 비롯된 붓놀림의 기법임을, 낙서같은 단순하고 자발적인 동경과 순수회화가 부딪친 고답성의 탈출구였음을 엿보게도 된다. 시대와 전통의 연결, 당대의 미술적 긴장과 갈등, 각종 요구의 분출 등이 곧 미술 작품의 반영이었음을 발견하게도 된다.

    

[ 파블로 피카소 <바이올린과 포도>, 1912년 ]

 

 

미술 감상자로서의 태도를 배우며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토대로서 훌륭한 기반이 되어주는 책이라 할 수 있으며, 많은 미술 입문자들에게는 미술가의 노고와 고뇌가 감내하는 역할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진주같은 저술이라 할 것이다.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기대하는 말, 정말 제대로된 책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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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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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Das Schloss에서 인용된 그러면 차라리 기다리면서 만나지 못하렵니다.”라는 아주 영묘()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간결하고 지적인 문장에 이야기 전체의 의미가 함유되어있음을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불현 듯 깨닫게 된다. 결코 기다리는 구원의 존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그 환상에 매여 사는 사람들에게 우주의 이치를 깨우쳐 주려는 듯 말이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블라디미르가 기다리는 고도(Godot)처럼.

 

이 헝가리 작가의 소설이 발표된 해가 1985년이다 보니 마침 동구 공산권이 붕괴된 1989년에 비추어 몰락의 끝에 선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잔인성과 황폐함, 그 기만성과 무기력의 세계를 지펴냈다는 해설이 따라붙곤 한다. 하지만 작품은 모든 인간사회에 내재한 실존적 불안에 대한 사색으로서 이렇게 제한된 텍스트로 읽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가상의 공간에 빠져드는 무력감과 소외가 지배하는 사회인 현재에 가까운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은 대낮의 빛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추적추적 내리는 보슬비와 쏟아붓는 폭우의 빗소리, 안개 자욱한 시월의 밤이라는 어둠의 배경이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이 지배하고, 기이한 종소리에 한 남자(후터키)가 이웃 여자(슈미트 부인)의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농장 사람들이 8개월간 죽도록 일한 품삯을 받으러 떠났던 여자의 남편(슈미트)은 혼자 돈을 차지하고 도주할 생각으로 예정보다 빨리 집에 도착하지만, 낌새를 챈 후터키에 의해 좌절된다. 소설은 똑 같이 닮은 절망으로 마주한 얼굴이라고 두 인물을 묘사한다. 사실 이들은 너절하게 쓰레기 더미만 남은 해체된 집단농장이지만 머물러 살 용기도 떠날 용기도 없는, 모든 가능성을 상실한 인간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또 다른 이웃인 여자(헐리치 부인)가 농장을 떠난 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그네들의 옛 리더였던 이리미아시가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죽은 자의 부활’, 그는 절망의 덫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인식되고, 도주와 탈출의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기다림의 시간으로, 새로운 삶의 기대로 바뀐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러한 기대가 허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소설의 구성이 시간적 흐름의 배치가 아니라, ‘되돌아 본’, 혹은 다른 방향에서 본것과 같은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의 상황이나 관점에 의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미아시와 파트너인 페트리너는 정부의 말단 정보 끄나풀인 파렴치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임무에 대해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 소위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 소환되어 다시금 정보제공의 압박을 받는다. 이때 이리미아시 발길의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은 이 인물의 목적은 물론 농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도사린 심리를 선명하게 들려준다. “여전히 주인 잃은 뼛속까지 노예일 뿐인 사람들의 어리석은 자기기만적 기다림의 확신이 집단농장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전체적인 틀을 거머쥐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2개의 장()으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는 소설의 구조에서 2개의 장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의사의 시점이다. 황폐하게 해체된 농장의 인간 군상들과 동일 집단에 포함되어있음에도 철저한 국외자로서 자신을 격리시키고, 은둔한 실내의 바깥을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다. 이 인물이 토해내는 언어들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물론 이야기의 구조적 틀까지 장악하고 있는 은유와 상징과 암시로 그득 차있다.

    

주변의 외적인 몰락에 맞서 자신의 기억력을 지켜내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음험한 몰락에 자신의 기억으로 맞서기 위해 (P 87)”

 

사람들, 그곳의 모든 곳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의 역할이 부여되고 있다. 이 인물이 읽는 것으로 벤더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지질학서와 전쟁지역 르포사진이 실린 잡지가 등장하는데, 전자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현재 시제로 쓰고 때로는 과거 시제로 쓴 어설픈 서술 때문에 혼란이 와서, ....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인류가 멸망한 이후의 예언적 묘사인지 아니면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지구의 지질 역사에 관한 과학적 기술인지 알 수 가 없었다.(P 92)”

 

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 인물이 쓰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관찰 기록이,  소설 자체의 예언적, 혹은 현재적 모호성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또한 후자는 잡지사진 왼쪽 구석에 모습을 드러낸 군사용 감시 장비를 보면서 탁월한 인간적 추적 관찰이라 하며 매혹되는 장면으로 전체주의의 주도면밀한 자기방어 체계가 지닌 은밀성과 폭력성의 은유일 것이다.

 

이러한 은유는 소설 전체에 흩어져 교활하게 빛을 내고 있는데, 쓰레기같은 마을을 더욱 추하게 만드는 매춘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어린 딸의 학대와 방치다.

 

문 가까이에 있으면서 어디 멀리 가 있는 일을 소녀는 할 수 없었다.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따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아무도 살 수 없는 나라에서 사는 셈이었다.(P 161)”

 

어린 소녀 에슈티케의 입을 빌어 불가능한 삶의 세계를 발설케 하는가 하면, 소녀가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인간의 승리에 대한 욕망은 물론, 패배할 가능성이 없는 싸움의 승리에 도사린 수치 또한 발견케 함으로써 전체주의의 본성을 다시금 공박하기도 한다.

 

아마 소설 중 재미의 요소라면 막장 드라마에 근접한 장면, 그야말로 소설 제목인 사탄 탱고가 동적으로 표현되는, 이리미아시를 맞이하기 위해 모여든 술집의 전경이라 하겠다. 이곳은 가히 이미 종말에 다다른 인간들, 더 이상은 패배도 가능치 않은 인간들의 퇴화된 결말의 증거라 할 것이다. 마비의 적나라한 모습으로서. 도발적인 추파, 이웃집 여자의 육체에 대한 갈망, 그 관능적 욕망만이 넘실대고, 끊임없는 술과 탱고의 향락이 땀과 열기로 끈적이는 소돔의 현장이 펼쳐진다. 이러한 시간에 소녀 에슈티케는 악의 종자랄 수 있는 오빠(서니)가 알려준 천사들에게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쥐약을 먹음으로써 자살하고 만다.

    

 

소녀의 죽음은 마을에 도착한 이리미아시의 저열한 목적의 도구가 되어 연설에 이용된다. 자신에게 궁핍과 절망으로부터의 구제를 기대하는 무기력한 인간들의 시선을 인식하며, 그네들의 허약함과 비겁함, 무기력을 질타하고,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리곤 일격을 가하는데, “현재보다 합당한 여러분의 미래를 위한 희생자운운하며, 미래의 전망을, 희망,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하고, 이 기만의 덫, 환상에 젖은 인간들은 죽도록 일해 받은 돈을 내놓는다. 이리미아시가 드디어 자신들에게 새롭게 도약하는 길을 찾아주었음에 감사하며.

 

결국, 술집에, 의사가 은둔하는 실내에, 매춘장소인 마을창고에,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이들의 집 도처에 처진 거미줄’, 그 덫에 의사의 신랄한 묘사처럼 너절하고 무능한 무지렁이(yokels)은 자신들의 삶을 담보한다. 그리곤 살던 가재도구와 창틀과 문짝을 부수고 이리미아시와 약속한 장소로 떠난다. 하지만 희망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 줄 목자가 아니라는 것은 이들의 마음속에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이리미아시가 모는,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에 앉아 ....갈림길이 나와도

어디로 갈지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고, 덜컹거리며 달리는 낡은 트럭이

자신의 생을 결정짓는 것을 다만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했다.(P 355)”

 

전제주의 정부의 거미줄같은 정보 끄나풀의 한 지점이 되어 이들은 아무런 재산도 기약도 없이 전국으로 뿔뿔이 흩뿌려진다. 이리미아시가 군()정보당국에 제출한 정보원들의 삶에 관한 보고서의 소개로 이루어진 하나의 장()은 정말 가관이다. 너무 허접해서 다시 작성해야 하는 정보부서 기록자들의 목소리로 들려지는데, 일반적인 지적 수준의 저하에 관한 한 예라 한탄한다. 무지렁이들의 구원자인 이리미아시의 실체, 그 한계인 하찮음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리미아시가 기술한 사람들 면면에 대한 서술은 늙어빠진 창녀, 씻지 않아서 더러운 험담쟁이, 알코올에 절은 난쟁이, 바닥없는 난폭한 어둠의 구덩이에 교차하는 원시적인 둔감함과.....,, 열등한 지적 능력과 강한 자에게만 비굴한 태도....” 와 같이 애초에 그들에게 티끌만큼의 연민이나 동정, 도움의 의지라는 것은 존재치 않았음을 확인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하지만 예견 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가능성을 도둑맞고 하나의 덫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덫에 걸릴 것만 같은 예감이 없었던 것도 아니며, 썩은 문틀에서 온전한 나무 부분을 찾는 일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항상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며, 체념을 인생에 도입할 수가 없다. 설혹 그것이 부질없는 것, 기만이고 환상인 줄 알지라도 말이다. 그들에겐 떠날 용기를 부추길, 단지 하나의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소설은 가히 발칙한 상태에 도달한다. 모두가 떠난 마을에 의사는 기록을 되살피고 새로이 적어나간다. 그런데 종소리가 들려온다. 독자들은 소설의 첫 페이지에 기이한 종소리에 잠을 깨는 후터키를 기억한다. 의사 역시 지난번 종소리를 들은 기록을 찾지만 찾지 못한다. 작가의 술책이다. 아마도 기록하기를 잊었거나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고 의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지만, 이건 거짓이다. 그는 주도면밀한 관찰과 기록을 하는 과도하고 병적인 질서 강박증에 있는 사람이다. 사실은 기록은 이제 시작된다는 의미의 선언일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시작임을 알리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사)내가 정신을 어느 정도 집중하기만 하면 마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쓰기만 하면 일이 일어난다니.”라고 자신이 소유한 능력을 묘사하고, 어느 한도까지는 혼란스러운 사건들 배후의 메커니즘에도 간섭할 수 있었다! (P 387)”고 말한다. 그리곤 시작 페이지에 등장했던 완전히 똑같은 후터키의 독백이 써지기 시작한다.

 

마치 시간이 움직임 없는 영원의 원() 속에서 유희를 벌이고 혼돈의 와중에 귀신이

재주를 피우듯 기상천외한 망상을 진짜로 믿게 하려는 것 같았다. (P 14 P 396)”

 

끊임없이 현실의 탈출을 꿈꾸지만 이것의 벗어남은 어쩜 살아있는 자는 결코 알지 못하는 저 두려운 작별일지 모르며, 늪같은 삶의 구덩이에서 헤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유혹이라는 도망은 환상, 아니 망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또한 제아무리 혼란스러운 세계일지라도 의미가 분명 있으리라 믿지만 결국 마주하는 것은 자신의 면상일 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남긴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Life is a malicious tale, told by cosmic idiocy,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는 에피그램이 진실인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의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이 닫힌 구조의 이야기는 몰락의 닫힌 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몰락의 상태에 갇혀끊임없이 헤매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성경에 계시된 시대가 도래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만 차마 발설하지 못하는, 광신자인 헐리치 부인이 결연히 중얼거리는 어째서 불속에 이 모든 것을 처넣을 최후의 심판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지라며 계시록을 뒤적이는 손길, 그 분노와 우려와 증오의 눈길이 더욱 매섭게 파고든다. 내겐 완성되어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폐쇄되어 있는 세계, 그 한정된 세계의 직시를 요청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망상을 버려라. 결국 세계의 질서는 지질의 변동처럼 들고 날 뿐 이다. 돌고 돈다. 그 밖에 아무런 뜻도 없다. 새로운 시작은 단지 거기서 시작될 수 있을 뿐이라고. 요한 계시록주석집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끝)

 

 

P.S. 또 다른 결론을 생각해보며 : 가능성의 새로운 시작

 

만일 의사에게 종소리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시작과 끝이 맞닿는 이 해괴한 기록의 문장은 과거가 사라지게 하며, 이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농장 사람들의 삶의 세계, 즉 허무와 무력감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상황들이 타원형으로 서로에게 흘러들어가면서, 오래 전에 빼앗겼던 결과의 개방성을 다시 획득하게 될 터이고, 이제 완전히 새로운 결합을 제시하며 삶의 여분의 가능성이 되돌아 올 것임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닥 희망의 가능성, 새로운 세계의 도래에 대한 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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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르러 오늘의 약탈적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사회에 대한 구상들이 곳곳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인 착취 및 약탈 대상의 현저한 축소와 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경제 성장이 거의 멈추는 선진국들, 즉 기존의 산업국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착취대상인 국가와 영토의 식민화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채굴을 비롯해서 수요와 시장 확보가 여의치 않아졌으며, 신흥공업국들의 도약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혀 새로운 가치관을 지닌 정부들을 탄생시켰는데, 바로 도널드 트럼프가 이끄는 민족주의적 신자유주의라는 것이다. 안으로는 국가의 안보불안, 인종적 갈등을 부채질하며 애국주의의 결집을 호소하며 보호무역의 벽을 두르고, 밖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외치며 자신들의 획일화된 경제정책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강제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같은 현상이 하나의 상대국으로서 한국이라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일 뿐 아니라, 작금의 자본주의가 처해있는 현실의 적나라한 반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는 점이다. 유엔 볼리비아 대사와 대외무역장관을 지낸 파블로 솔론이 마치 이 같은 상황을 예견한 듯이 지적한 말이 있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미국의 경우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계획된 분쟁을 일으켜 개입하고,

든든하지 않은 동맹국들의 의지를 실험하기 위해 빈번하게 흔들어대는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통해 상실된 성장의 자원을 충당하여야 하는 압박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한의 핵문제는 한계에 이른 미국의 자본에게 안성맞춤의 레버리지로서의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물질적 토대와 단절된 성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끝없이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성장 없이는 자기실현을 할 수 없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결국 자본 자신을 위해 인간에 대한 착취, 무제한적인 자원의 발굴과 생산주의의 강화가 요구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에따라 트럼프 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것이다. 즉 자유무역협정의 재협상이나 상대국의 무역정책에 직접적 간섭(관세부과 등)을 통해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자본 팽창을 위한 투기시장의 확대 및 금융화를 촉진시키는 방법이다. 둘째는 케케묵은 군사주의적 세계주의를 부활하는 것이다. 즉 군산복합체(軍産複合体)를 통한 성장축을 확보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 대상국이 필요하다. 불꽃놀이 비용을 충당할 자원이 있는 한국의 경제력과 북한의 자원은 성장이라는 자본의 물적 토대를 조달하는데 최고의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슨한 동맹국인 한국의 입장으로 인해 미국이 과거처럼 강행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클 것이다. 차선책은 다양한 정치 군사 외교적 수단 - 협박, 위협, 유화 등 - 을 통한 무혈입성으로 새로운 자원식민지를 확보하는 방안이다. 따라서 지금 진행되는 많은 장애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나 미국의 대북 협상은 필연적인 방향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북한과 미국, 중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지는 요동치는 정황은 자본주의가 지닌 태생적 내재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행성 지구의 자원은 유한하다. 무한한 성장이라는 물적 토대가 없는 자본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자본은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길목에 서있다. 탄소배출권처럼 자연을 서비스화하고 상품화하는 소위 녹색주의까지 동원하여 자본의 순환로를 만들어내야 하고, 급기야는 합성생물학, 로봇공학,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 신생기술을 동원한 기술진보를 이용하여 물적 성장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도 무한한 부조리와 불평등과 부패와 부당함과 황폐와 파괴, 멸종이라는 비가역적인 양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 모든 것을 자본주의 위기의 만성화라 부른다. 일자리는 점진적으로 감소하며, 자연의 약탈과 착취는 최후까지 지속될 태세다. 인간은 소외되고 생태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지며,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는 새로운 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예고하며, 권위주의의 부상과 민주주의의 퇴행을 재촉한다. 자본주의를 비롯한 인간중심주의, 가부장제, 생산주의, 금권정치, 채굴주의 등 오늘의 우리들을 지배하는 이러한 논리는 지구 시스템의 위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마침 자본주의는 물론 인류의 삶을 옥죄는 양식들을 극복하기 위한 포스트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시선을 끈다. ‘탈성장’, ‘탈세계화’, ‘여성생태주의어머니 지구의 관리’, ‘커먼즈’, ‘비비르 비엔탈자본주의를 위한 이념들과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방안이라는 새로운 가치체계에 대한 탐색과 논의의 저술이 현재의 우리들에 체화된 가치의 전환을 모색케 한다. 자본의 야만성을 떨치고, 자연의 순환을 존중하고, 인간 개체와 공동체와 자연이 공존하는 전체로서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생각게 한다. 또한 권력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는 자율적인 대항 권력으로서의 공동의 자기관리 조직인 커먼즈(Commons)와 재생산과 돌봄의 주체인 여성과 자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자극하며 각 전망들의 사안들을 폭넓게 사유하는 터전을 제공한다.

 

이와는 달리 메뚜기와 꿀벌이라는 약탈과 창조의 은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성찰하는 저술은 자본주의의 극복이 아닌 인간친화적인, 인간의 삶을 중심에 둔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에는 녹색산업이라는 소위 자연의 상품화를 자본주의의 미래적 대안 요소라 설명하는가 하면, ‘성장개념을 효율성이나 기업가 정신을 통해 인류를 위해 더 나은 창조적 모색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아마 효율성이란 말처럼 허망한 말도 없을 것이다. 생산과 소비 효율성이 증가하면 총생산 규모가 순식간에 증가해서 자원의 소비는 바로 상쇄되고 만다. 이건 이미 19세기 경제학자 제본스리바운드 효과(rebound effect)'로 입증된 것이며, 오늘날 실제로 자동차의 에너지 효율 향상이 전체 생산력 증가로 너무도 빠른 시간 내에 상쇄되어 버리고 있음이 증명하고 있다. 질적 성장이라고 하는 기술진보에 의한 자원의 무한한 조달이 가능하다는 망상에 입각한 공상적 유토피아가 아닌가 의심이 든다. 아무튼 자본주의의 내적 속성인 파괴약탈적 측면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미래 구상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 저작이라 하겠다. 우리들 모두 조화롭고 안온한 삶을 꿈꾼다. 자원의 절제, 소박함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의 돌봄자로써 새로운 가치를 위한 대안 건설을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 도서*

(1)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파블로 솔론 外 共著 (2018, 착한책가게 )

(2)메뚜기와 꿀벌, 제프 멀건 (2018, 세종서적 )

(3)권력의 포르노그래피 테러, 안보 그리고 거짓말, 로버트 쉬어 (2009, 책보세 )

(4)노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오미 클레인 (2018, 열린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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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잠을 찾아서 - 세상의 모든 달콤하고 괴로운 잠 이야기
마이클 맥거 지음, 임현경 옮김 / 현암사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불을 끄면 침대의 반이 세상의 전부다. 마침내 우리는 항복한다. 내일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고 잠이 드는 순간, 세계는 다시 무한히 확장된다.”  (P 291 에서)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잠의 가치를 폄훼하는 커다란 사회의 목소리들이 잠이 부족해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잠으로부터 멀어질 것을 은근히 종용하기까지 한다. 마치 잠자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는 통제력을 지닌 인간만이 삶의 질을 향유할 수 있다는 듯이. 반면에 사람들은 과도한 각종 소음에 불가항력적으로 노출된 현실, 상실이나 슬픔, 깊은 마음의 상처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대낮처럼 빛나는 도시의 밤이 호시탐탐 인간의 잠을 암살하고,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부족한 잠으로 잃는지도 모르는 체 기억의 능력이 쪼그라든다.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 잠이 인간에게 주는 긍정의 역할을 발견하려는 목적이랄 수 있다. ‘왜 자야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으로서의 잠에 대한 근거로서. 또한 언젠가부터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에 대한 위로의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굉장한 사회학적, 혹은 의학적, 철학적 담론의 발견이 아니라 그저 이와 같은 소박한 의도를 부분적이라도 해갈시켜주는 그런 것이면 족하다는 생각에서.

 

마침 저자 마이클 맥거는 오랜 수면무호흡증에 시달린 전직 신부요, 현직 교사로서 자신의 경험과 겸허한 식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언어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피로와 사회적 의미, 그리고 소소한 문학적 기반을 통해 잠의 역할을 정말 소박하게 설명하고 있어 정신의 과도한 소비 없이 이완된 상태에서 읽어 나갈 수 있게 하여준다.

책은 토막잠을 자며 수면 부족은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며 밤을 환하게 밝힌 전구 발명자인 에디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신경쇠약으로 사망했다. 맥베스처럼 잠을 살해하려했지만 사람을 죽였을 뿐이다. 그가 아니어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터이다. 잠을 멸시하는 자의 욕심이 인간에게서 빼앗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잠의 존중과 폄하는 그리스와 로마, 문화와 법률의 차이로 구별되는 오디세이아아이네이스』,  두 작품으로  그 차이를 들려주는데, 전자가 집, 안식처로 돌아오는 이야기인 반면에 후자는 집을 떠나는 이야기란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사회는 아이네이스처럼 사람을 밖으로 떠미는 문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 동기 찾기를 독려하며, 집이라는 균형과 조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자신의 침대와, 크고 넓은 세상에서 삶의 목적을 찾아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침대를 벗어나는 것의 가치 투쟁이랄 수도 있겠다. 과연 무엇이 인간적 진실일까?

    

 

 

수천 년 동안 자란 올리브나무 그루터기를 그 자리에서 깎아 만든 오디세우스의 부동의 침대인가, 아니면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어버리는 아이네이스가 떠난 침대인가? 인간이 지향하는 것은 안식인가? 영원한 안식이란 없다는 것인가? 21세기 오늘, 우리들의 가치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대립은 잠을 늦게까지 자던 르네 데카르트와 멸시하던 데이비드 흄의 철학에까지 이어지는데, 비몽사몽의 데카르트가 아직도 자신이 자고 있는 건 아닌가해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깨어있음의 증명이 연유했다는 우스개에서, 수천 번의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해서 곧 인과관계가 함의한다고 추론할 수 없다며,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고 확실성에 대한 의심론을 전개한 흄을 보면서, 잠이란 삶에 대한 피해갈 수 없는 철학적 주제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게도 된다.

 

그럼에도 저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조건들에 회의적인 시선에 무게를 두는 듯, 수면 부족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무수한 변화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발을 신고자는 아이, 한 밤중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로부터 그네들 삶의 이면에는 항시 혼란스러운 잠자리가 있었다는 교사로서의 증언에서 시작되어, 수면 부족이 감정적 결핍을 동반하는 중독이라는 나쁜 친구와 어울리는 경향에 대해서, 환자가 죽기를 바라는 수면부족의 만성적 피로에 시달리는 외과의사의 고백에 배어있는 도덕성의 약화를, 변덕과 예민함을 증가시키고, 기억력 손상과 반응속도를 현저히 늦추며 인지장애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일화와 사례들을 역사적 사건이나 문학 작품들을 곁들여 보여준다.

 

어쩌면 가장 주목할 대목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내부 생체시계인 24시간 주기 리듬인 서캐디언 리듬(Circadian rhythm)’이란 것이다. 이것은 교대제 노동자들의 고통을 우선 떠올리게 한다. 낮과 밤을 뜬 눈으로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꿈도 꾸지 못할 사치임에도 장거리 여행의 시차에서 느끼는 몽롱한 효과에 매양 젖어 있게 만든다. 인간을 기계적 도구화한 현대사회의 가장 잔인한 생태계로 빈번하게 지적되는 지점이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들, 그래서 불면증으로 고통을 겪는 것이 이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화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며, 수면제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제약 산업들이 휘파람을 불고, 잠 못 자고 거리로 밤거리를 헤매며 소비하는 사람들을 자본은 더욱 즐긴다. 밤이 실종된 사회를 강권하는 자본의 세계.

 

이제 사람들은 잠을 너무 자지 않아 돈키호테처럼 뇌가 바짝 마르고 싱싱함을 잃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고자기 내면의 빛을 차단한다. 그래서 언어와 기억을 빼앗긴 세상의 이야기인 조지 오웰1984는 다시금 우리 현재에 대한 보고(報告)로 소환된다. 기억능력과 언어 능력은 자는 동안 형성된다고 한다.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는 문화는 어휘를 잃게 하고 빈약한 소통만을 남긴다. 또한 인간의 예술인 기억은 사라지고 경영기술의 한 형태인 보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람들은 잡다한 자극에 지치고 정작 자신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기울일 힘을 상실해간다.

 

나는 두 시간 이상을 지속하여 잠들지 못하고 있다. 불면증이다. 서너 차례 깨다 잠들다를 반복하는 매일 당면하는 두려움과 짜증이 고통스럽다. 새벽빛이 부옇게 밝아오면 각성을 위해 카페인을 찾는다. 이런 흥분제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사회에 포섭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 우울한 일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커피 속 카페인은 뇌에게 속도를 늦추고 잠잘 준비를 하라고 말해주는 억제성 신경전달 물질인 아데노신을 통제하고 피로는 그대로 둔 채 그저 브레이크 장치만 잘라버린다고 한다. 증상을 잠시 숨긴다는 것이다. 이제 태평양과 대서양의 물고기들도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카페인이 하수구에 배출되고 있을 만큼 오늘 우리는 정신의 마비 속, 환상의 세계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의 불빛, 책 속의 까만 잉크를 읽는 것은 뇌에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한다고 한다. 전자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생성시키는 반면에 후자는 서캐니언 리듬을 통제하고 중추 신경계의 과부하를 막도록 돕는 멜라토닌을 생성시킨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것과 스마트폰을 보는 것은 신체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이란 것이다. 잠을 쫓아내려는 사회, 아이네이스의 등 떠미는 사회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한 내 발버둥은 이처럼 독서에서도 계속되어지는 모양이다. 제대로 깨어있다는 것, 제대로 잠을 잔다는 것이 올바른 세상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우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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