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베시 헤드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서구 합리주의의 폭격을 받은 문명은 한결같이 의식의 오만한 권위에 올라타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정서나 감성은 이성에 의해 취약하고 불안한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매사를 이익인가 손실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계산대에 들이민다. 그래서 무엇이든 구분하고, 범주화하여 구별짓기를 하고, 분리한다. 분리된 것들은 의미화되어 차별되거나 배제된다. 인종(人種)이란 것 역시 이러한 차별을 위한 구별짓기이다. 백인은 유색인종을, 황인은 흑인을, 흑인은 또다시 자신들을 범주화하여 생김새와 흑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에 따라 차별을 한다. 여기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 오직 의식이라는 것만 존재한다. 합리주의 이성의 세례는 이처럼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의식의 세계만 떠오르고 정서와 감성, 내면의 깊은 목소리인 무의식, 즉 인간의 몸에 태곳적부터 새겨진 지혜와 소통의 고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완전히 소통의 고리를 상실하지 않은 인류가 있다는 것을, 여전히 토템이 살아있고, 인류 의식의 원형인 미신과 신화가 숨 쉬고 있는 아프리카(africa)는 축복의 땅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물질문명의 교만한 시각에서 아프리카는 누추(陋醜)와 비루함이겠지만 손상되지 않은 정신의 세계, 의식과 무의식의 교통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의 풍요로운 영혼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 생각은 땅 속 깊은 어딘가에 줄을 대고 있다가 하나의 해답을 얻어 다시 그의 심장으로 돌아왔다.” 이 같은 소설의 제목인 족장 ‘마루’의 생각은 바로 이것의 존재함을 보여준다. 온전한 전체의 사고를 할 수 있는 자, 그를 족장이요, 왕이며, 신이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자신들의 원형을 잃어버렸을 때 그 대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어찌 신비롭고 경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은 바로 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감각과 감성의 분리지대를 흐른다. ‘마사르와’라 불리는 부시먼에 씌운 주류 흑인들의 편견과 차별의 인종분리 언어,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또 다른 흑인종에게 부여한 노예, 일종의 불가촉천민이란 굴레의 언어이다. 주류 인종인 보츠와나족들에게 마사르와 여인의 주검은 자신들 가축의 죽음보다 못하다. 방치된 사체와 그 옆에 꼬물거리는 어린 여아는 백인 목사의 부인에 의해 거두어진다. ‘마거릿 캐드모어’, 이 여인은 환경결정론, 인간은 본디 빈 서판(blank slate)으로 태어나 주변 환경(교육 등)의 여하에 따라 다양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을 어미를 잃은 어린 마사르와 소녀에게 투사한다. 오만한 이성의 논리로.

 

소녀는 자신을 양육한 마거릿 캐드모어란 이름을 물려받고,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두어 한 지방의 교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마사르와란 천민, 보츠와나인의 가축과 같은 노예가 선생이란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세계이다. 편협과 이기심으로 무장한 교장, 장학사 등은 그녀를 조롱하고 멸시하며 쫓아낼 궁리를 하지만 마을의 족장 후계자이자 토템 가문의 여식인 동료 교사 ‘디켈레디’의 호의 속에 자리를 지탱한다. 영국 유학까지 하고 온 재원인 여성, 디켈레디와 마르사와인 마거릿은 이렇게 교우(交友)한다. 귀족과 노예의 우의, 하늘과 대지의 만남, 둘은 서로를 닮아간다. 균형, 그 소통의 연결로 복원으로.

 

그러나 두 여인이 사랑하는 이는 마을의 난봉꾼 ‘몰레카’이다. 디켈레디는 몰레카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만, 마사르와인 마거릿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있는 인종차별의 지대에서 마음속 연인으로 담고 있을 뿐이다. 한편 마거릿을 대면한 몰레카는 어떤 여인으로부터도 느낄 수 없었던 지고한 여성성에 매료되어 그녀의 정복을 호시탐탐 노리고, 디켈레디의 오빠인 마을의 지도자인 ‘마루’ 역시 그녀를 영혼의 동반자,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의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반려자로 삼기위한 내밀한 작업에 들어간다.

 

마루와 몰레카, 오랜 친교를 쌓아온 친구지만 한 여인을 두고 갈등은 증폭된다. 마사르와라는 편협한 차별의식에 고착된 사람들의 세계를 진정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편견과 맞서 고통스러운 투쟁을 지속시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자, 저 어두운 심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과 소통의 결과를 의식의 세계에서 실현 할 수 있는 온전한 정신의 세계를 지닌 자가 마거릿의 진정한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거릿의 꿈과 상상이 펼쳐진 그림들, 끊임없이 마음의 음성을 주의 기울여 듣고, 마음이 대지와 지상을 부양하는 형상 등 무의식의 세계와 소통하는 문장들은 이제 이것에 다가가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그 잃어버린 지대의 복원이 지니는 의미에 다가가게 한다. 정서와 감성이 이성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세계, 타자가 배제된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네가 공존하는 세계, 의식이 무의식과 교호하는 세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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