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시
아모스 오즈 지음, 김한영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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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에 달라붙은 ‘~시(詩)’에 현혹되면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혼란이 있게 된다. 작가의 감수에 의해 영역(英譯)된 제목을 보면 ‘Rhyming Life and Death’, 즉 이치 혹은 까닭이 있는 삶과 죽음, 또는 운율이 있는 삶과 죽음 정도로 직역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은 바로 그 조화의 질서를 탐색하는 것이지 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고나면 소설을 읽어나가는데 저항감이 사라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익명의‘저자’이다. 그는 왜 글을 쓰는가? 왜 그런 글을 쓰는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가? 당신의 책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의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자기 검열과 세상을 향한 겸허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주인공 저자는 소설 속에서 소설을 씀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 바로 삶과 죽음의 얘기를 들려준다. 글 쓰는 것의 실천 양상(樣相)을, 글이 궁극에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만들어 보이는 작업을 통해 인생의 본질을 들려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신작에 대해 독자들과 대화하는 문학의 밤에 가는 길이다. 시작 시간이 남아 카페에 들르고 웨이트리스의 스커트에 밀착되어 드러난 속옷의 비대칭 윤곽에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이내 그녀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풋볼 선수와 사귀고 이내 헤어지고 남자는 또 다른 여자와 동일한 휴양지 호텔에서 사랑을 나눈다. 소설은 이처럼 보잘 것 없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들과 소재들이 상상 속에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현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직조해내는 되돌이표 있는 악보이다.

 

문학의 밤 주체자인 문학부장, 작품 낭독자인 여성, 문학 평론가인 남자, 비아냥대는 듯한 어느 남자 청중, 문학에 관심이라곤 없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소년과 아이의 엄마, 그들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가공의 인물들이 생성되면서 어느덧 삶과 죽음의 모습들이 하나의 완결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소설에는 하나의 중심 플롯이 있는데, ‘체파니아 베이트할라크미’란 시인의 『삶과 죽음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인 조차도 저자의 짧은 현실의 시공에서 마주한 인물들, 그가 상상의 공간에서 만들어 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 합류시켜버린다.

 

그런데 이 상상의 얘기가 문학의 밤을 마치고 어둠이 내린 쓸쓸한 도시의 늦은 밤과 새벽을 거니는 저자의 현실세계와 수없이 교차하여 그 경계가 흐릿해져 버린다. 현실이 곧 허구로 연결되고, 허구는 어느덧 현실에 와 닿는다. 자신의 작품을 낭독한 여성과의 산책, 그녀와의 하룻밤 기묘한 정사, 그러나 남성의 실패와 여인의 자격지심이 교묘히 얽히는 장면들, 복권에 당첨되어 잘나가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에 둔 채 병원에 누워있고, 어머니의 용변을 받아내야 하는 임시직을 전전긍긍하는 남자 등등 끊임없이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전개된다.

 

이들 얘기는 살아있음에 대한 실제의 비루함으로 그득하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증거 하는 것으로 관능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것도 아마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피부로 그녀의 호흡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과 그녀의 살갗에 이는 잔물결들을 감지하고,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이하 생략)”처럼 그 능숙하고 기막힌 관능의 포착은 작가의 소설적 기교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있는지에 대한 목격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성의 이해는 “유성 생식이 출현했을 때 비로소 노쇠와 죽음이 출현했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함께 태어난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성과 죽음일 것이다.”에서 정점에 이른다.

 

삶이 있었고 죽음과 성은 나중에 생긴 것이니 죽음의 불가피성은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러기 위해서 성을 제거하면 영생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흥미로운 주장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몇 차례 모습을 바꾸어 반복 등장하는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듯한 젊은 여자의 손길을 느끼는 환상으로 내비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죽음의 파트너는 성이란 것이니, 일견 낭만적이고 희극(喜劇)적이라고 까지 할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내일도 무덥고 축축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내일은 오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삶의 보잘 것 없음에 더욱 쓸쓸함을 더한다. 그저 이따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불을 켜는 것 말고는 별로 기대할 것 없는 것이 삶이란 말일 게다. 그러고 보면 결국 남는 것이 없다. 바로 무(無)! 그것의 깨달음 말고는..., 아니면 유성 생식과 죽음이란 그 영원한 반복, 영생의 이치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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