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물든 방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0
앤절라 카터 지음, 이귀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구의 구전민담은 물론 문자화된 동화의 원작에 대한 지원이 없을 경우 다소 당혹스러운 작품이 될 수 도 있을 것 같다. 내용 자체에서 읽히는 페미니즘이나 젠더(Gender)를 부인하는 성적평등의 요소, 혹은 「마왕」과 같은 몇몇 작품의 환상적일정도로 우아한 문장에의 도취만으로는 작품의 뭔가를 읽어내지 못했다는 결핍의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책,『피로 물든 방(原題: The Bloody Chamber)』을 구성하고 있는 10개의 변형된 이야기들이 각기 18세기 유명 작가인‘샤를 페로’나, ‘그림 형제’가 쓴 동화에 기초하고 있고, 바로 이들 작품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틀을 전복하고 있다는 배경적 요인을 지니고 있어서이다.

 

사실 구전되는 민간의 이야기란 우리나라의 전통 민담에서 보여 지듯이 당대의 소외된 약자들로서 현실 세계인 사대부,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처녀 귀신으로 분한 여성들이 이승에서 비로소 직간접적으로 해소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서구의 민간에 전승되던 이야기들도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초의 내용이 문자화되면서 남성 작가들에 의해 왜곡, 변형되었다는 점에 작가는 주목했던 것 같다.

 

결국 작가의 작품 집필 의도나 취지가 이 책만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로서 표제작인 「피로 물든 방」은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수록된 「푸른 수염」을, 「리용 씨의 구혼 이야기」는「미녀와 야수」를, 「눈의 아이」는「백설 공주」를, 「사랑의 집에 사는 귀부인」은「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염두에 두었을 경우에 그 차이에 대한 이해로 작품이 더욱 선명해진다는 점이다.

 

수록된 각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소녀가 되었든, 귀부인이 되었든, 자신의 신체나 욕망을 은폐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즉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가 내장하고 있는 차별화된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성(性:sex)'이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구분 없이 분명하고 노골적이 된다.

여성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간주하는「피로 물든 방」의 백작을 비롯해 수록된 거의 전편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권위와 야수성을 고유의 특성으로 하고 있으며, 여자들은 수동적이며 남성권력에 순응하는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 여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주체적 본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남성이라는 사회의 고정된 우월적 권력을 전복시키거나 혹은 남성과 여성의 분별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상황으로 전환 시킨다.

 

「사랑의 집에 사는 귀부인」의 갇혀 지내는 여인이 남편의 눈을 피해 젊은 남자와 적극적인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가하면, 「피로 물든 방」의 여인 또한 자신의 성적 반응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마왕」의 소녀나, 동화 「빨간 모자」를 변용한「늑대-앨리스」등 늑대 연작의 소녀들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기성의 동화가 그려내는 늑대나 남성의 희생양으로서가 아닌 대등한 권력관계로 전환된 여성상이 그려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여성 스스로가 가부장적 문화에 종속되어있다는 인식적 한계에 대한 각성이 포함되어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여성’이라고 하는 젠더가 발산하는 피동적이고 수줍으며 의타적이고 가냘픈 전통적 여성상의 파괴를 통해 내재된 억압과 차별의식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과감하게 숨겨진 여성의 성적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가부장 사회가 억압해 온 성 모럴의 왜곡을 시정하고자 하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 지향하는 귀결은 동일 지점에 모이겠지만 외설적이고 폭력적이며 권위적인 남자들의 야수성이 극대화 된 인물들을 통해 고착화된 사회문화적 남성성의 이미지를 비틀고 조롱하기도 한다. 부와 권력을 장악했지만 야수는 더없이 정염에 취약하고, 늑대는 나체의 소녀를 잡아먹지 않으며, 오히려 오쟁이 지고 죽음에 내몰린다. 이 역시 젠더관계를 여지없이 파괴해버리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일면 음흉하고, 잔혹하며, 외설적이다. 아마 기성의 지배적 사회와 문화 관념의 전복이 가져오는 불편함, 거북함, 낯섦이 가져오는 느낌 탓일 게다. 그럼에도 음울한 고딕적 어둠, 노골적인 에로티즘과 극단적으로 대비될 만큼 아름다운 서정적 문장들은 더욱 기괴한 매력에 빠지게 한다. 혹독한 남성 신화의 해체, 분별이 없어진 성의 나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