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미니북)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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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하면 인간의 광기와 욕망의 본성, 숨겨진 악마성에 대한 집착과 같은 눈초리가 느껴진다. 또한‘인간 삶의 역사란 우연과 광기’라 정의하기도 하였듯이, 어떤 순간에 우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 광기에 휘말리게 될까? 더구나 세상 모든 것에 적대감 가득한 증오를 보내며 악의를 부려댈 상황에 이르는 데에는 어떤 우연적 사건이 개입하는 것일까?
사실 간단히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 그래서 그것을 통과하려 하지만 아무런 힘도 발휘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깊은 좌절감에 휩싸이면 아마 시쳇말로 돌아버리게 되는 순간에 직면하지 않을까.

이 단순해 보이는 상황은 우리들이 평생을 반복하는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피로와 권태, 좌절과 실의에 빠져들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모든 인간의 일상적 삶이란 거기서 거기라는 위안 때문일까? 아마 상상력이 빈곤해서일지도 모른다.  보지 못하고, 들어 보지도 못했으며,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이 뜻밖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체험한 후에 다시금 지리멸렬한 자신의 일상으로 복귀하면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광기와 악마성이 잠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려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 여직원, 크리스티네!

소설로 눈을 돌리면 초라한 시골 우체국에 우체국장이자 직원인 스물여덟의 시든 여성이 있다. 1차 대전으로 피폐해진 1926년의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이란 아마 빈곤이 넘쳐대는 남루함, 바로 그것일 것이다. 값싼 월세 다락방에 병들어 앓아누워 있는 홀어머니와 한 사람의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로 휘청거리는 삶에 누렇게 찌든 여자, ‘크리스티네’가 있다. 모든 것이 비싸다. 그녀의 삶이란 오직 생존의 문제이며, 비루함과의 싸움이다. 꿰맨 옷, 그저 발을 감싼 신발, 우체국의 유일한 직원, 종일을 일에 시달리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가면 환자인 엄마의 시중으로 시간에 쫓긴다.

이런 여자에게 생각지도 못한 편지가 날아들고, 미국에서 커다란 사업을 일궈 부호가 된 이모부와 이모의 배려로 상류계층들이 모인 알프스의 고급 휴양지인 스위스 엥가딘으로 초대 된다. 그녀의 모습은 하늘하늘한 상상도 못한 최고의 드레스와, 고가의 목걸이, 최신 유행의 구두, 우아한 머리와 세련된 화장으로 미모의 여성으로 변신한다. 고향 마을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뭇 남성들의 관심어린 시선은 그녀의 마음에 날개를 달아준다. 말끔하고 고가의 세련된 정장을 한 남성들이 가던 발길을 멈추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가하면, 계단에선 옆으로 비켜나 숙녀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그 우아한 예의는 여인의 자긍심을 한껏 부풀리는 것이다.

의기소침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던 여인은 사라지고, 충만한 행복감으로 활력을 발산하는 여인의 육체는 사교적 수다스러움이 더해져 휴양지 사교계 최고의 여인으로 칭송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잘못 발음되어 사교계의 상류층들로부터 명문 귀족의 이름인‘폰 볼렌’양으로 불리지만, 변신에 도취된 여인은 구태여 오스트리아 시골의 가난한 우체국 여직원의 신분이 드러날 자신의 이름을 시정하지 않는다. 새로이 알게 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계, 전쟁의 후유증으로 일용품조차 구입하기 어려운 서민들의 삶에서는 꿈에서 조차 그려 볼 수 없는 세상이다. 자신의 두 달 급료에 해당하는 한 끼의 식사, 황홀할 정도의 화려함과 우아함, 세련됨이 어우러진 환경과 사람들, 처음 보는 최고급 세단, 젊은 남녀들의 과감하고 관능적인 몸짓들, 그 유한계급들의 별천지에 완벽하게 도취해 자신의 진짜 삶을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 버린다.

그러나 이 도취의 시간은 시기와 질투라는 상류층 여인들의 간교로 시골마을의 보잘것없는 신분에 존재하지도 않는 추문까지 더해져 자신의 과거 신분이 들어날까 두려워 한 이모에 의해 중지된다.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고된 일상과는 어디도 닮은 데가 없는 물질의 풍요와 우아함이 넘쳐나는 세계와의 단절은 극심한 고통으로 그녀의 정신을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어떠한 노동도 없는, 죄어오는 생활의 강박도 없는 그야말로 낭만과 설렘과 쾌락만 있는 상류사회를 떠나 다시금 오스트리아 시골마을 우체국으로 돌아가는 여인의 추레한 옷차림만큼 여자의 내면은 누더기가 되어 수치와 모멸, 이상과의 괴리로 좌절과 증오로 가득 찬다.

분노와 사랑, 가난한 연인들의 광기

어디를 둘러봐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알프스휴양지에서 보았던 남자들은 없다. 그 초라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몸짓들이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삶의 의미를 앗아가 버린다. 시골에 처박힌 채 시들어가는 삶만을 기다릴 수는 없어 자신의 삶에 선물을 주고자 빈으로 달려가 알프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호텔을 예약하고는 오페라극장과 고급 상점가들을 둘러보지만 턱없이 비싼 그곳들은 여자의 발길을 허락하는 곳이 아님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결혼한 언니의 집을 방문하지만 언니는 알량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팍팍하기만 하다. 한 끼의 식사조차 인색하게 하는 전후(戰後) 서민들의 삭막한 경치가 더해져 여자의 고독과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내면화 된다.

우연히 만난 형부의 옛 친구, 전쟁의 상처를 안고 돌아온 상이용사이지만 전쟁과 부상의 상관성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지원을 거부하는 국가에 환멸과 좌절로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은 사내이다. 학업에 대한 간절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여건을 확보할 수 없는 남자는 건설 노동자의 삶으로 버텨낸다. 크리스티네는 그런 남자에 연민과 공감을 갖게 되고, 두 상처 받은 영혼은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가난하기만 한 연인은 사랑을 위해, 미래를 위해, 희망을 말하려하지만 이것이 거짓임을 둘은 모르지 않는다. 두 사람만의 밀어조차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연인, 급기야 남자는 건설회사의 파산으로 일자리마저 잃어버린다. ‘마렉 플라스코’의 소설,『제 8요일』에서 자신들만의 방을 찾아 헤매는 연인들의 쳐진 어깨와 상실과 절망 어린 눈빛이 문득 오버랩 된다.

모든 물품과 금전의 송금업무까지 맡아하는 시골 우체국, 좁아터진 우체국의 유일한 인간인 크리스티네는 이 가난한 사랑의 지속에 절망의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느낀다. 우체국에 불쑥 찾아 온 남자는 자살의 결심을 말하고 크리스티네 역시 자살계획에 동조하기로 하지만, 많은 금전 업무를 정리하는 여자를 본 순간, 남자는 횡령계획을 넌지시 비춘다. 어차피 죽을 결심까지 한, 잃어버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위험한 모험은 암흑만 기다리는 미래와 좌절한 삶으로서는 시도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치밀한 탈취와 도주 계획...

인간 소외를 만들어내는 무책임한 권력사회

어느 날 찾아 온 비루하기만 했던 일상에서의 탈출이 비극이 되어야만 하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전후의 피로감으로 지친 민중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전쟁을 기획하고 조종했던 권력층들은 사치와 향락에 여념이 없다. 남루함의 세계에서 꿈결 같은 화려함의 세계로의 도약은 한 여인을 도취에 취하게 하지만‘한바탕의 봄 꿈(一場春夢)’으로 끝나고 팽개쳐지듯이 비루한 현실로 돌려진 인생은 욕망의 메울 수 없는 틈새에 허무와 분노가 들어차 들끓게 한다. 이렇듯 여자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욕망의 소용돌이는 그 시선이 한 개인의 내부적 차원에 머물지만, 전쟁 참전으로 가족과 재산의 상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적 상흔까지 오롯이 개인이 안아야 하는 한 남자를 통해 비로소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 된다.

전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전쟁 기획자인 권력자들이 아니고 민중이며, 그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을 사는 것도 오직 민중만의 몫이다. 권력자들은 죽음과 비참함, 곤궁함을 결코 떠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민중과 그 고통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 형태는 더욱 견고해지고, 민중은 이 견고해진 체계의 경계 밖에서 노예적 삶에 시달린다. 새벽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 부지런히 출근하고 종일 일에 시달리다 늦은 밤 귀가하는 삶, 단지 생존을 위한 타성일 뿐이다. 곤궁함은 떠나지 않고 역시 모든 것은 비쌀 뿐이다. 사회는 관료화되어 개인들의 보호요구를 외면한다. 수많은 서류와 절차를 요구하고 그리곤 거절한다. 개인의 몫이라고. 국가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개인의 생존문제가 오직 개인에게만 지워진 사회, 고통은 민중의 몫이고 쾌락은 권력자의 몫이라고 이분화 된 사회에서 가난한 연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생결단의 선택만 남게 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한계적 상황, 이것이야말로 광기가 아니겠는가? 누가 만들어냈는가? 이 광기의 책임에 사회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향락과 과시의 세계만을 뿌려대며 부추기는 오늘, 우리들이 대면하는 세계를 견주게 된다. 광기가 넘쳐흐른다. 삶의 주체자로서의 자기를 잃어버리고 고통스러워하는 한 여인의 내면을 세밀하게 쫓으며, 그 욕망이란 이름의 광기를 해부하는 이 소설에서 오늘의 양극화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 어느 시대보다 인류의 진보를 이뤄냈다는 20세기의 잘난 인류 지성의 허영과 위선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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