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조짐 패러독스 7
보이지 않는 위원회 지음, 성귀수 옮김 / 여름언덕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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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따라 불온 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철학적 인식을 가미하면 ‘존재’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비로소 볼 수 있게 하는 횡단적인 조치라고도 할 수 있다. 애써 외면하거나 회피해서 보이지 않기도 하며, 그로인해 인식자체에서 지워져버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권력을, 부(富)를 독점적으로 유지하고 지속시키려는 부류에게는 이들의 자기 영역내 침입이 불온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습격해오는 알 수 없는 불안함으로 때려잡고 싶은 충동,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을 참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진단하고 그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에게는 이 ‘보이지 않는 위원회’의 젊은이들의 분노를 포용하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조언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가 평온하게 안주하는 영역에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 밀고 들어오면 즉각 방어기제가 살아나 적대로 날을 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경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 논의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발전하고 완전한 진리로 다가설 수 있다. 이 엄연한 삶의 공리를 실천하는 것은 간단하고 수월한 일이다. 허나 기득권자들은 자기의 능력 이상을 가지기 위해 무조건 공격적 모드에 돌입한다. 여기엔 무한한 소모전과 후퇴의 손실만 기다릴 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첫 부분은 오늘의 선진경제 체제를 가진, 아니 지구촌 모두라 해도 별다른 왜곡은 없을 것이다. 세계화를 외친 신자유주의가 어디 휩쓸지 않은 곳이 없는 만큼, 지옥처럼 변해버린 지구촌 전체에 내재된 공통된 현상 - 개인화, 인간관계의 소멸, 노동의 허구성, 도시화의 냉소주의, 경제, 환경, 문명의 쇠퇴 - 을 진단하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서는 이처럼 황폐화되고 잔혹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한 실천 매뉴얼로서 그야말로 반란을 위한 행동 단계별 세부 지침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에릭 호퍼’의 대중운동의 시작과 성공을 위한 과정별 가이드를 완결하는 세부 행동요강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선 ‘나는 나’라는 마치 개성을 추켜세우는 듯한 지금 이 세상을 휩쓰는 표어를 들여다보자. 이 대중의 개인화는 생활, 노동, 불행의 모든 조건이 개별화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개인들의 분열증은 확산되고 편집증적 미세입자로 핵분열한다. 내가 나이고 싶을수록 공허감은 깊어지고 자신을 표현하려면 할수록 고갈되어간다. 결국 세상은 이렇게 분할된 자아를 만들어 낼수록 손쉽게 개인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이 기획은 실로 오랫동안 축적된 개념의 개가이다. 권력이 이 상황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국민을 조사, 비교, 훈육, 분리하는 교육에 나섬으로써 체제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분쇄하는데 학교 중심의 구조를 통해 유용한 질서를 확보해왔다. 각 개인의 시민권만 남게 만들려는 혹독한 개체화 작업은 성공했다. 프랑스 등 서구 국가들은 이를 위해 수백 년이란 노력을 해왔으니, 20세기 들어서야 근대화를 시작하고 그나마 독립국가로서는 수십 년에 불과한 한국의 그 압축적 강도로 인한 민의 시련은 가히 혹독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화와 인간관계 해체 작업은 자본주의 지배질서가 축적한 놀라운 책략이다. 게다가 오늘의 노동현실은 노동의 두 가지 모순인 착취와 참여라는 양면적 감정을 교활하게 사용하는 자본가와 그들의 원숭이들이 제공하는 기만적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 여가활동이란 그럴듯한 언어는 결국 노동력 강화라는 기본전제를 통해 태어났으며, 숭배할 대상으로 노동을 치켜세움으로써 인간들의 고유한 근거인 친숙함, 혈연관계, 동네, 장소와 사람들, 애착 등을 박탈하고 황폐화 시키고 고립시켜왔다.

또한 일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품을 만든다는 경제적 필요성보다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만들고, 어떻게든 노동질서를 보존한다는 정치적 필요성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지워짐에 따라 생산활동이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리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그럴듯하게 빚어내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나’라는 개성화의 술책에 함몰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고용되려면 고용주가 내세우는 획일적 기준에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 동원 될 수 있으려면 살짝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이탈, 그로 인한 소외상태는 자아가 노동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력이 아닌 자가 자신을 팔아먹어야 생존대열에서 낙오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화의 새로운‘매춘적’규범이 고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은 이제 상품 그자체이고 분열되어 권력이 용이하게 종속시킬 수 있는 물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인간적 연민이니 나아가 공동체 정신과 나눔이란 복지가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착취로 쌓은 부로 점령한 언론 재벌들은 미디어를 조작하여 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강북과 강남이라는 계층의 대결, 변두리 지역과 국가의 대결이라는 악질적 구조까지 만들어내면서 광분하고 있다. 극렬한 구분짓기, 자기 영역을 철옹성처럼 공고하게 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제 이번 정부가 재벌 컨소시엄들에게 베푼 종편방송의 개국으로 더욱 극성맞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 - 청년, 노동자, 실업자, 소수자, 약자, 장애자, 빈곤층, 이주자... - 을 지워버리고 대중의 개인화에 열을 올릴 것이다. 분열된 개체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 그저 개처럼 끌려가면서 뒤늦게 속았음을 후회할 것이다. 점점 회생의 가망성이 없는 지옥의 나래로 떨어져가는 형국이다.

소상인, 영세기업주, 하급공무원, 중견사원, 교수, 기자 등‘프티부르주아(petit bourgeois:소시민) ’들은 항상 역사의 과정에서 한 발 물러서서 자신들의 개인적 삶에만 연민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계층간의 전쟁에 대해 눈 딱 감고 모른 척 한다. 이들 비계급적 집단만큼 양심을 속이는데 능한 인간들도 없다. 자신들은 매춘 노예가 마치 아니란 듯이.
이와 같이 ‘일곱 개의 동심원’이라는 첫 장은 이 세상을 지옥, 바로 그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지옥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으로 뒤집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두 번 째 장은 그래서‘반란’이다. 이 반란의 장을 일일이 묘파(描破)하는 것은 일종의 게릴라행동 지침요강을 약술하는 우스운 모양이 되지만 일관된 목소리는 하나이다. 내부의 결집력, 그 밀도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코뮌의 구성에 대한 외침이다. 모든 경제적 의존관계와 정치적 예속을 청산하고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영역인 코뮌을 만들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대중운동의 고전적 매뉴얼이라 하는 것들에 무수히 등장하는 내용이기에 그리 참신하고 이해하여야 할 지혜는 아니다. 물론 이것을 써 먹어야 한다거나 실천 기술에 참조해야 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겠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녹색자본주의의 허상, 종교가 된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화 현상 등, 병적 상태에 빠진 현실의 비판이 질주하듯 씌어있다. 공통의 언어를 상실한 세상, 그러하다보니 언어를 공유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부와 권력의 비대칭성의 심화, 사회 공감대의 증발을 부채질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보수 언론의 몽매함, 부와 권력을 지배하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꼭두각시들에 환멸을 느낀 대중들이 이들보다 훨씬 현명하고 성숙했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야인인 시민을 시장에 당선시키지 않았던가. 다소 급진적이고 단선적인 언어로 거칠게 써진 책이지만 세계의 청년들과 좌절한 자들이 작금의 세상을 얼마나 위기로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하기에 충분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 자들에게만 불온할 뿐이다. 결코 대중에게는 불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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