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의 요리책
카를로스 발마세다 지음, 김수진 옮김 / 비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요리, 섹스, 살인”, 이 세 단어만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어휘도 없을 것이다. 이 낱말들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본성에는 허기진 무언가를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적절히 통제되거나 금지되지 않으면 사악해지고 마는 것. 그러나 교활한 인간은 우아하고 세련된 감각으로 이것들을 고상한 무엇으로 바꾸어버렸다.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오늘의 매스미디어가 뿜어내는 프로그램의 구성이나 그 내용만으로도 요리와 섹스가 얼마나 넘쳐나는지, 그러나 짐짓 점잖은 채, 혹은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는 은폐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본질을 외면하고 포장하여 추악한 욕망을 감추는 위선에 몰입한다.
작금의 요리와 섹스의 과잉, 그 과도함은 아마도 광신적이라 해도 부족한 표현일 것이다. 이 과잉의 추구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몬다. 가히 폭력적이다. 이것은 관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이어진다. 자신들의 욕망을 가로막는 장애, 그것이 제도가 되었든, 윤리의식이 되었든, 사람이나 사물이 되었든, 그 어떠한 유무형의 실재가 되었든 제거 대상이 된다. 이를 부채질하는 자본가와 정치권력, 그리고 하수인 노릇을 하는 우매한 작자들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형상이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카를로스 발마세다’는 이것들이 발산하는 광기에서 권력의 사악한 본질과의 ‘유사성’을 보았던 모양이다. 또한 허영심으로 뭉쳐진 인간들의 그칠 줄 모르며, 제어되지 않는 충동으로서의 욕망, 그 역겨움을 지적인 독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위태로운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소름끼치게 재밌는 악마적 매혹의 이야기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최상의 요리, 미각과 향미로 이루어내는 무한 마법, 그 절정의 쾌락이 섬뜩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져 있다. ‘마르텔 플라타’라는 남부해안도시에 위치한 레스토랑 ‘알마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배경으로 70 여년 4대에 걸쳐 펼쳐진 비극적인 가족사에 권력과 계급적 도약에 탐닉하는 야만적이고 비열한 탐욕과 그 잔인성, 천박성이 경박하지 않은 진지한 풍자와 은유로 버무려진 매혹적 이야기다.

어미의 젖을 물고 있던 아기, 어미의 젖꼭지를 뜯어내어 입속에 오물거리며 그 식감을 헤아리는 첫 장면의 잔혹한 풍경은 아기의‘입’, ‘피와 미각’에 담긴 풍부한 다의성으로 가히 예술적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주며, 독자를 압도한다. 아기의 입은 ‘들뢰즈’가 말한 다양체를 떠오르게 한다. 젖을 채취하는 입이자, 성애의 입, 그리고 미각과 폭력성이 일탈과 통합의 복합체로서 하나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물자체를 조명하게 하는 것이다. 세상, 현상, 인간, 사물의 협소한 인식을 넘어 그 본질, 본체라는 전체적이고도 고유한 남김 없는 이해를 가질 것을 제안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미의 몸을 뜯어먹고 산 아이, 술주정뱅이로 권력의 아첨꾼 장례행렬을 들이박고 황당하게도 강력한 테러리스트 도당으로 변질되어 죽은 아비로 인해 고아가 되어버린 ‘세사르 롬브로소’는 어미의 사촌여동생 부부에 의해 양육된다. 화려하고 찬란한 요리, 시대와 가족사의 형식을 그대로 대변하는 매개체로서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은 소설전체를 관통한다. 이것은 가문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체이다. 알마센의 부흥을 이루어낸, 사람들의 미각을 사로잡았던 레시피의 기록물이지만 그것이 이룩한 성공, 즉 권력자들의 사랑은 정권의 교체마다 참혹한 나락이 된다. ‘단절과 연결’이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롬브로소 가문의 유일한 명맥인 세사르 롬브로소, “피가 질러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절한 절규”, 그것은 롬브로소 가문의 증거인 <남부 해안지역 요리책> 이기도 하다. 세사르의 이 레시피에 대한 광적 탐닉은 온통 인육 맛, 인간의 피 맛을 본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아르헨티나 정국의 악마적 육식문화, 오늘의 우리사회와 닮아있다. “머리보다 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명료하게 이야기”해준다는 조롱처럼, 뱃속의 탐욕만큼 인간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을 것이란 말이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한 세사르의 관능을 자극하는 이모, ‘베티나 페리’의 비도덕적 정염, 그것은 “오물과 고름으로 가득 찬 병적인 사랑”으로 치닫는다. 두 사람의 은밀한 정사, 그 열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베티나의 남편은 살해되어 세사르의 민활한 칼질에 의해 고기로 저며진다. 레스토랑 알마센에 걸린 특별메뉴를 찾아 날아든 손님들의 면면은 정치최고위원, 의원들, 졸부들, 고위공직자, 야심을 불태우는 권력의 조력자, 방송국 임원들...영혼을 팔아버린‘도리언 그레이’ 같은 인간들이다. 게다가 이 인육의 향연은 살인의 은폐를 위해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고, 그야말로 최고의 코미디가 벌어진다. 인간을 먹어대면서 “성부의 은혜로 모여 음식을 나눈 이들의 영혼을 정결케 해달라고 간구”하는 신부와 정치가의 끓어오르는 감동의 연설을 뱉어내는 장면은 이보다 희극적 일 수 없는 것이다. 채식주의자의 탈을 쓴 흡혈귀들, 범죄자가 순교자가 되며, 영혼을 짓밟은 인간들이 성자가 되고, 권력의 하수인이 미화되는 이 세상의 잔혹한 일면이다.

부패하고 몰염치한 권력의 “문둥병과도 같은 경박함에” 국민전체가 물들어 버린, 신자유주의 물질만능에 대한 광적 숭배에 물든 소비지상의 우리사회, 아니 이 세상의 역겹고 추악함의 우아한 동화이다. 썩은 권력과 결탁한 자본가가 열심히 재촉하는 상식의 파괴와 영혼의 상실이 요리와 섹스에 어둡게 내려 앉아있다. 모두를 죽음의 그 어두운 심연, 공멸의 시공을 앞당기기 위해. 감각의 극한을 넘어서는 지고한 예술의 경지, 최고의 창조적 상상력이 빚어낸 아찔하고 감미로운 이야기 속에 무진장한 비판적 사색이 담긴 절대 걸작이다. 그리고 한 편의 거대한 인간의 욕망사(慾望史)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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