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멤논의 딸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우종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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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눈의 복수 신화나 지고한 사랑이야기 같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내용으로 다루어졌던 전체주의 체제와 추한 권력에 모여든 파리 떼들에 대한 비판이 직설적 은유로 쓰여‘카다레’ 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작품이다. 특히 악과 몽매주의, 폭력과 공포로 시민의 심리를 옥죄고 영혼을 부숴대던 그런 시절을 겪었던 우리의 그 때와 동일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깊은 공감과 동질감을 갖게 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애절한 사랑의 테마를 기저로 하고 있고, 더구나 그리스 비극중 하나인 아가멤논의 딸인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대유(代喩)되어 인간사회가 저지르는 던적스런 역사의 반복에서 역설적이게도 체제와 지역, 시간성을 넘어서는 보편으로서의 인간성을 읽게도 된다.

소재 또한 마치 오늘의 한국사회의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연상시키는 천박성까지 빼 닮아서 거의 모든 문장을 우리식으로 몇 글자만 수정하고 가필하면 한국소설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친근하다. 화자인‘나’란 인물은 방송국 직원으로 독재정권의 악마성, 폭력성에 수치와 혐오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에게 골수 당원이나 서게 되는 국가의 최대 행사인 노동절 행사장에 예상치 못한 초대장이 날라든다. 이 뜻하지 않은 초대장은 권력의 상층부에 가까이 갔다는 상징적 의미이지만 그에게 달가울 리가 없다. 승승장구 권력의 핵심인물이 된 연인‘수잔나’의 아버지는 화자와 딸의 교재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권력 경쟁을 위해 서슬 시퍼런 감시를 놓지 않는 눈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사랑은 중단되어야 한다. 화자는 여기서 수잔나와 이피게네이아를 권력의 희생제물로서 동일시하며, ‘희생’이란 제의(祭儀)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모색한다.

희생을 요구한 권력의 진심, 그 진의를 탐사하는 관념의 여정이 독재자와 그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파렴치한 이들만이 입장 할 수 있는 행사장으로 향하는 물리적 행보와 병행하여 진행된다. 행사에 초대를 받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대중들과의 도로에서의 구별, 그리고 본 행사장에 가기까지 거치는 몇 차례의 검색지역에서 마주하는 인간들의 면면은 가히 볼만한 인간시장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검문이 철저할수록 초대장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듯이 그 차별을 즐기는 군상들, 그리고 그 권력의 상징적 공간에 새로이 진입한 인물들을 발견할 때 “저 인간은 대체 뭘 해준 대가로 초대장을 받았을까?”, “누굴 감옥에 쳐 넣었소?”라는 자기 모순적 의혹을 드러내는 표정처럼 징그러운 벌레 같은 인간들의 역겨움이 묘사된다. 동료를, 이웃을, 상사와 부하를 고발하고 음모가 난무하는 불신의 세상에서 신분상승은 타인을 짓밟고 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제로섬게임, 극한적 경쟁에서는 살아남는 자만이 승리자다. 여기에 수단의 도덕성, 수치심, 죄의식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란 없어진다. 승리하면 정당화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권력과 부의 모양새와 똑 같다.

형편없는 자들의 이야기, 천박한 인간의 완벽한 예, 저 아래 세계에서 지상의 세계로 헛되이 날려드는 이 세계의 악마적 메커니즘이 신랄한 우화와 함께 등장한다. 인간의 살코기를 주어야 날아오르는 독수리, 그 독수리의 등에 올라 비상하지만 준비한 타인의 몸이 소진되고 나면 도달하기 위해 자기의 몸을 잘라내야 한다. 이윽고 아래 쪽 세계에서 위쪽 세계로 독수리가 솟아올랐을 때 “독수리가 죽은 사람의 뼈를 싣고 올라왔어요!”라는 말만이 허공을 맴돈다.

도덕적 가치들의 훼손, 불건전한 도취감, 성취감이 오늘의 인간 정신을 사로잡고 있다. 한 번 더러워진 인간은 그 다음,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쉽게 더럽히게 된다. 이 패악스럽고 추악한 탐욕의 메커니즘이 보편화된 비천한 쾌락을 온통 세상에 내재화시켜 이를 분별해내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많은 나라들이 신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신적 피폐화와 인간 삶의 중요한 진실들을 파괴하는 이 정신적 몰락의 현실과 결별하려고 함에도 우리 사회는 자기성찰과 반성은커녕 더욱 더 집착하고 매달리는 꼴이다. “세계는 지금 몽매주의와 결별하고 있어요. 그런데 끝까지 그걸 옹호하고 있잖아요.”라는 화자가 기득 권력에게 외치는 분노의 울부짖음은 마치 우리를 향한 것만 같다.

그렇다면 수잔나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제물은 권력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이 오래된 희생제의의 고전적 본보기인 권력자 아가멤논이 행한 딸의 처형은 자신의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한, 즉 모든 병사들의 죽음을 요구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주기 위한 잔혹한 욕심이었을 것이다. 이를 대의를 위한 영웅의 탁월한 전략이라고 칭송하는 빌어먹을 인간들이 있겠지만 그 만큼 우리 인간들은 더욱 교활해지고 세련되고 잔인해졌다는 의미일 게다. 사랑하는 연인을 희생 제물로 뺏긴 화자가 이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모든 삶의 원천인‘거기’부터 재교육해야 한다는 조롱어린 외침에서 사랑을 잃은 자 그대로의 분노가 느껴진다. 전체주의 권력의 독선과 그것이 조성해내는 암울하고 황폐해진 인간성의 고발을 통해 우리들이 잃어버린 고귀한 가치들을 되돌아보고 회복하고자하는 숭고한 의지의 산물로서 이 소설은 그 몫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권력의 본질이 메타포 천재의 손길로 설득력 있게 그려진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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