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을 거닐며 역사를 읽다
홍기원 지음 / 살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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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존재는 물론 성곽에 대해 이렇다 할 인식조차 없었던 내게 이 저작이 주는 학습 효과는 솔직히 충격이고 부끄럼이며, 감사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를 지나 대한제국과 일제치하, 그리고 한국전쟁과 군부개발독재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을 한 나라의 도읍지로 위세를 지켜온 서울의 역사는 곧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거울이라 할 것이다.

조선의 도읍 한양을 에워싸고 있던‘성곽’, 분주히 거니는 도심에서 성곽을 볼 수도 없거니와 설혹 보았다 해도 한 낱 축대나 돌덩이 이상의 무슨 감흥을 가졌겠는가? 도로 옆으로 밀려난 조선조 여느 축조물이겠거니 하고 지나버린 문(門)들이나, 남산, 북악을 오르면서 무심히 지나버린 그나마 남겨진 성곽조차도 어떤 의미로 새겨 본 적이 없으니 내 역사의 인식이란 정말 보잘것없었다는 생각에 이른다. 서울 성곽의 길이는 18.12Km이고,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 저술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그 파괴되어 없어지고 옮겨진 문과 성곽들마다 서려있는 굴곡의 사연들에서 이제야 그 사라진 쓰라린 곡절들을 접하게 되었으니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이 새롭다.

화마(火魔)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는 숭례문(남대문)을 무참히 바라보던 일이 어제 일만 같은데, 좌우에 성곽이 이어져 있는 1904년의 숭례문 사진은 그야말로 감개무량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흥도 순간에 머물게 되는데, 1907년 일본 황태자 환영도로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일제가 한양도성 중 가장 먼저 헐어버린 곳이라는 설명에 그만 내 고장, 내 나라 역사의 무지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이후 일제의 근대화라는 각종 명분과 조선의 얼을 훼손하기 위해 파괴하고 없애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한양을 보듬고 있는 사내산(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의 성곽들조차 군부독재시대의 무식한 전시(展示)개발 행위로 모두 파괴되어버렸으니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좌절감마저 몰려든다.

개발 독재시대가 지나고 나서, 문화재 복원차원에서 성곽 복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시멘트로 복원한 곳, 표지조차 없는 옹색한 복원 흉내를 낸 곳, 문화유적 앞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소나무를 식재하여 생태적 변화에 대한 고려도 없는 무분별함, 본래의 의미는 아랑곳하지 않은 제멋대로의 복원은 물론, 역사적 의미와 유래를 안고 있는 서울시장공관과 같은 장소와 건축물에 대한 공공재로서의 환원에 대한 제안 등은 역사유적의 복원에 대해 시민으로서의 참여와 관심을 자극한다.

이 저술이 제공하는 관점은 이와 같은 문화재 복원행정과 같은 제언은 물론, 역사사회학적 시선으로 시민(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라호텔 부지와 같이 문화유산을 사적 소유물로 둔갑시킨 독재정권과 재벌의 야합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물론, “뿌리없이 브랜드만 찾는” 신자유주의 교육의 산물인 서울과학고(예전 보성중고)에 내준 성곽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 서울 성곽을 파괴하여 호텔과 반공센터의 축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남산 정상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이승만이나, 어린이회관을 세우고, 국회의사당 건립계획을 세우는 등 무지몽매하고 안하무인의 무소불위 권력과 탐욕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잠자던 정신을 퍼뜩 뜨이게 한다.

한편 4대문과 4소문에 대한 최초의 축성과 중수, 복원 등에 얽힌 사적(史的) 지식은 물론, 저마다의 특징에서부터 이름의 유래, 얽힌 속설 등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리 것에 대한 앎의 지평을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공고히 심어준다. 경복궁의 오른팔인 인왕산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서쪽 문의 위치를 두고 고심하여 8개 문 중 유일하게 두 번씩이나 옮긴 끝에 자리를 잡았다는 돈의문의 얘기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 일명 숙청문(肅淸門)이‘수(水)’에 해당하여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닫아놓았으나 기우제를 할 때면 열어 놓았다는 설명은 미련한 내게 확실히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유일하게 평지 성문인 동대문(흥인지문)은 지반의 연약함과 평지라는 성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옹성을 가졌다는 것과,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내사산 중 가장 기운이 허한 낙산을 보호하는 의미라는 것은 선조들의 유산 어느 것 하나 예사로움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깊이 있게 느끼게 한다.  

자하문 일명 창의문에서, 실질적 북문 역할을 했던 혜화문, 일명 동소문, 그리고 시신이 통과 할 수 있는 두 개의 문인 서소문과 광희문까지, 게다가 사라진 성곽의 터에서 복원 된 성곽이나, 남아있는 성곽에 맺힌 사연들이 촘촘히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자취와 함께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서울 성곽이나 서울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환상적인 장소들도 알려주는데, “성곽 탐방로 조성의 모범 답안”이라고 저자가 칭찬하는 장충단 서울 성곽 구간은 꼭 들러 보아야 할 것 같다. 많은 구간에서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1916년 매일신보에 실린 성곽을 한 바퀴 도는데 하루해가 걸렸다는‘순성(巡城)놀이’를 서울 시민들이 함께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기회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600여년 역사의 장면들이 화보들과 수려한 글이 어울려 알찬 성곽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서울 역사 기행의 역작(力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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