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프랑스 작가‘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첫 발표한 작품 『그로 칼랭(Gros-Calin)』을 접하자, 우연히도‘니콜라 파르그’의 작품에서 지적 아름다움의 비유로 인용된‘진 세버그(Jean Seberg)'를 발견하게 되었고, 한동안 미루어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다. 1962년 결혼한 로맹가리와 진세버그의 관계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로맹가리의 작품에서 진세버그의 영향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자살이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하는 것들...
1914년5월8일 러시아에서 출생한 로맹가리와 1938년11월13일 미국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무려 24년의 연령 차이를 둔 이들에 대한 궁금증은 두 사람의 명성만큼이나 적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인지는 정황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진세버그의 데뷔작인 <성 잔다르크>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슬픔이여 안녕』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세실’역으로 출연하면서, 당시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로맹가리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자의 배우자가 있던 두 사람으로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위해서 이혼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60년 6월 진세버그는 첫 번째 남편인‘프랑스와 모레이유’와 서둘러 이혼한다. 그러나 가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그의 외교적 업적을 가능케 했던 아내‘레슬리’와의 이혼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슬픔이여 안녕>이 상영된 1958년 이후부터 서로를 동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0년 프랑스‘장 뤽 고다르’감독의 발탁으로 일약 세계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 그녀의 출세작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1960년) 이미 프랑스의 유명작가이자 고위 외교관이었던 로맹 가리의 어떤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호감과 영향의 행사는 두 사람을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1961년 봄부터 이 두 사람은 동거에 돌입하고, 레슬리와의 이혼이 매듭지어지는 1962년10월16일 결혼식을 올린다.
진 세버그의 영화촬영이 있는 날이면 로맹가리가 항시 동행하여 격려하는 모습이 행복해보였다고 증언하는 것이나 1963년 이들의 아들인 디에고의 출생이 있었던 사실로 보면 두 사람은 성격이나 사상적으로 상당한 일체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눈부신 외모와 밤톨을 깍아놓은 듯한 단단하고 새침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극히 내성적이고 자신을 꾸미는데 인색하며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진세버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고통 받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이 민감한 프랑스 작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닐 수 없게 하였던 모양이다. 나긋하고 순종적이며 헌신적인 여인, 그래서인지 괴팍하기만 했던 가리의 성격이 다 변할 정도였다니 진세버그의 현명함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가 진 세버그의 영화 촬영장에 따라다녔다는 것은 그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촬영 장소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몇 개월 간의 체류에서 외교관 시절 딱 한 번 가본 경험이 있는 페루의 해변으로 이어진 것이다는 작가의 설명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들 부부에게는 그리 훌륭한 것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맹 가리는 이 작품으로 영화를 제작 감독하게 되는데, 아내인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면서 심한 균열이 발생한다. 환상적이고 적나라한 촬영을 요구하여 극한의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정신적 상처를 주기에 이르는데, 아마 이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되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고 미국에서 X등급 판정이 내려질 정도였으니 아내로서 진세버그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편, 진 세버그의 타인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사회활동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조명하는 것도 이후 그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은 실체를 추측케 하는 유용한 성찰이 된다.‘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가입해 인권운동을 하고, 흑인자경단‘블랙펜더(Black Panther)'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등 민권운동가로 활약하는데, 이는 미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 결국 당시 FBI국장‘존 에드거 후버’의 지휘 하에 매스컴을 동원한 입체공작을 통해 진 세버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1970년 그녀의 실명까지 공개하며 진세버그가 불법시위를 주동하고 마약에 빠져있으며, 흑인과격단체 중 한명과 추잡한 섹스를 하여 임신까지 하고 있다고 악질적이고 근거 없는 추문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잔인한 공격을 지속한다. 남편과의 정신적 갈등에 더해 정치적 음모로 한 여인을 무차별로 공격해대는 광적인 공작으로 진 세버그는 가리와의 사이에 잉태한 두 번째 자녀인 딸‘니나’를 조산하게 되고, 니나는 이틀 만에 사망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처럼 사악한 정치권력의 폭력은 한 여자의 삶을 완전히 몰락시켜 버리고, 급기야는 1979년 9월 8일 그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추측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것이다에서 FBI의 살해다라고 분분하지만 이 역시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도 남을 이야기다.
이에 분노한 로맹가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사회에 분노하며, 한 고귀한 생명에 대해 가해진 FBI의 끔찍한 공작이‘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발하기에 이른다. 로맹 가리는 1970년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겪던 진 세버그의 요청으로 이혼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대략 1년 후인 1980년 12월 1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로맹가리가 죽기 8개월 전에 작성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텍스트가 몰고 온 세상에의 파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라는 고백이다.
자살하면서 가리가 남긴 <결전의 날>이라고 쓴 한 쪽의 유언 또한 그야말로 의문투성이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 할 것이다 ; La Nuit sera calm』라는 내 자서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자신의 자살은 이혼한 아내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으니 부질없는 추측은 하지 말라는 얘기이며, 상심한 마음이나 신경쇠약의 문제는 아니라고 못 박는다.
다만 자살이란 죽음이 자신의 문학 작업을 완성하는 수단이며, 궁극에는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완성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 대단한 작가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위대한 작가와 은막의 대스타의 결합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기치 않은 탐색을 다하여 보았다. 대작가인‘F.스콧 피츠제럴드’와 혹독한 정신병으로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렀던 그의 아내‘젤다 세이어’가 오버랩 된다. 닮은꼴의 커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