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는 자들의 밤
빅터 라발 지음, 배지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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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원제인  'The Changeling(바꿔친 아이)'을 대신해  엿보는 자들의 밤이라 한글번역 제목을 한 것은 소설의 제재를 은폐하려는 편집자의 의지와 함께 수많은 익명자들의 엿보는 시선이 있는 오늘의 소셜 네트워크가 지닌 부패성의 부정적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 것 같다. 이 작품은 꽤나 다채로운 장르가 어우러진 독특한 구성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동화와 아기 공양(供養)의 전설, 스마트폰과 컴퓨터 속 사진, 사생활의 고백이 넘쳐나는 소셜 네트워크가 야기하는 공포의 전율이 얽혀 이 세계의 음울한 정경을 풀어낸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세상은 외벌이로 한 가족의 삶이 지탱되지 않는 세계가 되어 아이의 양육은 하나의 사회적 중대 의제가 되었다. 이야기는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한 우간다를 떠나 자본주의 첨병인 도시 뉴욕으로 이주한 여성 릴리안으로 시작된다. 여인은 백인 남성 브라이언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아들 아폴로를 낳는다.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결혼 생활은 4년차에 이르렀을 때 흔적도 없이 떠나버린 브라이언으로 인해 모자에게 불가피한 결핍을 남긴다. 토요일 반나절의 시간은 누구에게도 아이를 맡길 수가 없었던 릴리안은 네 살 박이 아이 아폴로를 집에 홀로 남겨두고 일을 하게 되고, 아이에게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되자 릴리안은 이러한 상태를 지속한다.

 

어느 날 아이는 꿈속을 헤매듯 아버지가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나버렸다고 호소한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에 대한 고통,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집안에 가득했던 안개와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상자와 동화책, 그리곤 자신의 손을 놓고 같이 갈 수 없다며 자신을 두고 떠났다고 엄마에게 그 아픈 순간을 말한다. 이것은 성장한 아폴로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그가 결혼한 에마와의 사이에 낳은 아기 브라이언에 대한 사랑의 과잉의식으로 표출된다.

 

두 흑인이 꾸린 가정, 서적상(書籍商)으로서 불규칙한 아폴로의 수입은 에마의 도서관 사서 일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아폴로는 아기를 가슴에 안고 출근하여 도서관 재고정리나 유품 정리 세일 장소를 찾아가 버리듯 내놓은 먼지 수북한 책 더미를 뒤지며 보석같은 책들을 건져내는 일을 지속한다. 그는 아이를 양육하는 아빠로서 자신의 기꺼운 행위에 기쁨을 느끼고, 장소가 바뀌거나 아기의 해맑은 미소를 볼 때마다 연속으로 사진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다. 이를 우연히 본 익명의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호응한다.

 

아폴로의 이 행위에는 수천 명의 이방인이 보내는 찬사가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애정을 보상해 줄 것처럼, 박수를 애걸하는 모습이 어렴풋 비친다. 이 궁핍한 행위가 어떠한 상황을 초래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폴로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아기를 연사(連寫)로 찍은 사진을 올린다. 소설에는 두 권의 책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는 유괴된 아기에 대한 어둡고 슬픈 이야기인 모리스 샌닥이 쓴 동화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작품 속에서는 저 바깥에라는 원제로 번역됨)이고, 다른 하나는 피부색이 가져오는 오래된 편견의 불모성을 말하는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이다.

 

특히 저 바깥에는 반복적으로 아폴로의 의식을 지배하며, 플롯들을 연결하는 핵심적 소재로서 서사의 흐름을 횡단한다. 익명성의 세계, 그것은 다른 말로 엿보는 자들의 감시세계이기도 하다. 아폴로가 찍지 않은 그와 아기의 사진이 에마의 스마트폰에 전송되고, 바닥에 눕혀있는 전송된 아기의 사진은 에마를 불쾌하게 한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 온 아폴로에게 에마는 아기 브라이언을 바닥에 눕혀놓은 처사에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는 사진의 출처에 대한 의혹을 보내고, 그 메시지를 보자고 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다. 아폴로는 에마의 신경과민을 지적하며 아내의 말에 의심을 보낸다.

 


소설 도입부의 빠른 속도와 경쾌한 문장은 어둡고 호흡이 긴 문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불신은 긴장으로 고조되고, 이윽고 거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깜박 졸음에 빠진 사이에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깨어난 아폴로는 끔찍하게 변한 살풍경을 직면한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검은 물체, 그리고 안와골이 부서지는 몽둥이의 타격으로 실신하고 만다. 아기는 죽었다, 그리고 에마는 사라졌다. 이 사건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소셜 네트워크에는 근거없는 이야기들로 들끓는다.

 

이런 일은 흑인 가정에서는 깜짝 놀랄 만큼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은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흑인들은요, 그러니 악마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흑인들은 애초부터 나쁜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며, 맞벌이 부부라는 것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라는 이야기 등으로 각종 음모론과 함께 일면식도,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악의를 뿜어낸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유품으로 내놓은 어느 집 지하 창고의 케케묵은 상자에서 아폴로가 발견한 핍(트루먼 커포티)을 위한 사인 초판본의 발견과 더불어 이 흔한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끔찍함이 소설의 한 축임을 은밀하게 주장하는 듯하다. 그리고 하퍼 리의 초판본은 또 하나의 주요 플롯 연결 소재로 작동하며 사건의 진행을 돕는 역할을 한다. 아무튼 작가 빅터 라발은 이렇게 재치있는 모티프의 활용으로 주제의식의 이해를 위한 길잡이로 독자를 안내한다.

 

자신의 끔찍한 사랑의 대상인 아기 브라이언의 죽음과 아내 에마의 돌연한 사라짐은 분노와 증오에 휩싸이게 한다. 주택 관리인의 발견과 어머니 릴리안의 도움으로 부서진 안와골을 맞춰 회복한 아폴로는 에마를 찾아 죽일 결심을 하게 한다. 도시의 골목길마다 설치된 CCTV, 인터넷 망으로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로 무작위하게 연결된 감시망은 에마의 흔적을 찾아내고 은거지로 추정되는 뉴욕 해안가에 흩어진 아홉 개 섬을 지목한다. 한 때 천연두 환자 치료시설로, 그리곤 2차 대전 후에는 참전용사들의 수용시설로 이용되었으나 폐쇄되고 버려져 자연으로 돌아간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 문명과 격리된 노스브러더 섬으로 아폴로를 이끈다. 악의가 도처로 연결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세계를 피해 여인들과 아이들만이 자신들의 세상을 구성하는 세계다.

 

상륙한 아폴로는 돌연 나타난 여전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현대판 아마존의 리더인 칼을 통해 그녀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칼이 아폴로에게 들려주는 라푼젤 동화의 이야기는 환상에 현혹되어 황폐함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오늘의 세계를 가득채운 망상을 일깨운다. 인간세계를 장악한 오래된 마법, 그 주술에서 깨어나야 함을, 아마 아폴로는 이쯤에서 에마에 대한 증오와 자신들의 아기 브라이언의 죽음이 거짓된 환상이었음을,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조차 진실이 은폐된 무엇이었음을 인식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는 아폴로는 칼의 신뢰를 얻게되고 공동체의 어린 소녀 게일과 아이의 엄마로부터도 탈취자가 아닌 보호자로서 수용된다. 이야기는 여성 공동체의 이상향으로, 그리고 노르웨이 이주자들의 전설을 누비며 아이의 양육. 오늘의 세계에서 그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것인지를 줄기차게 비유하고 설득한다.

 

어둠 속 거인, 아이들을 빼앗아 가고 아이를 대체하는 기만으로서의 대용물이 남겨지는 현대판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환유(換喩)는 인종과 성() 차별의 적절한 도구로 소설의 구성을 풍성하고 다의적 의미로 가득하게 해주는 듯하다. 소설은 마침내 환상적 공간으로 독자를 이끌어대는데, 아이를 공양으로 삼는 거인 트롤의 전설이 현실의 경계와 마주한다.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위험한 모험까지 감수하는 여인들, 아폴로의 어머니 릴리안, 아폴로의 아내이자 그들의 아이 브라이언을 지켜내려 한 에마의 고난의 현장을 마주하는 것이다. 소설은 여느 동화책처럼  그 후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사실 이 말이 동화 속 이야기의 이후 이야기들을 말 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부정성을 차단하는 의도이듯, 이 소설 또한 오늘의 세계에 경계(警戒), 그 위협의 요소들이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현실에 있을 것이다.

 

기관사없는 기차를 모든 사람이 운전하는 꼴이 된 페이스 북의 페이지들, 이들은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에 글을 포스팅한다는 건 현관문을 열어놓고 아무나 우리 집에 들어오십사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라는 문장도 있다. 걸쇠 없는 창문이며 문 없는 집으로의 낯선 자들의 초대와 같은 무수한 익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SNS에 무심코 올리는 사진과 사생활의 기록들. 그리곤 아이의 양육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소비 경제사회가 부추기는 이기적 욕망들, 여전히 곤란을 겪는 여성에게 지워지는 양육의 경사진 부과, 각종 차별이 지닌 불모성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이 세계의 부패성은 삶의 조건을 더욱 어둡고 두렵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실 공포의 실체를 마주토록하기 위해 저 어두운 지하 동굴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슴 저미는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아이를 지켜내는 것은 곧 인류를 지켜내는 것일 게다. 이제 이 과업은 두 남녀의 몫으로 방관하기에는 이 세계가 어제와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다. 사회 공동체이자 국가 공동체가 더욱 직접적으로 양육의 몫을 나누어져야 하는 세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인간을 쓴 흑인작가 랠프 앨리슨의 문제의식과 평이한 문체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과 비현실 세계를 막힘없이 이동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하나로 합친다면 바로 빅터 라발이라 했던 앤서니 도어의 말은 이 작품을 말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해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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