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 리시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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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 무수히 생산되고 있다. 기계화 시대라는 표현처럼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을 말하는가하면,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서로 질서를 지배하는 패권을 가지려고 다투는 시대이기도 하며, 압도적 불평등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갈등과 충돌을 상징하는 언어들이다. 결국 세계는 혐오와 적대의 발화가 만연한 곳이 되고, 사랑, 연민, 동정심, 배려 등의 말을 쏟아내며,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이젠 지겹기 짝이 없는 도덕의 가면을 쓴 공허한 문장만이 울려대고 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은 이처럼 타자와 함께 하는데 지쳤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타자라는 말 또한 시비꺼리가 된다. 타자관()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저마다의 이데올로기를 발하며 갈등 촉발의 언어가 될 지경이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관광객이란 바로 이 타자라는 이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채택된 궁여지책의 언어이다. 그러니 이 저술은 이방의 지역을 놀러 다니며 일회적 시선을 즐기는 사람들을 분석 통찰하는 것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논고이며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저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게이오, 와세다등지에서 문화비평, 과학철학 교수를 지낸 젊은 학자이다. 그가 개념어까지 바꾸면서 철학을 논하려는 까닭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내면화된 인간관이 새로운 세계를 사는 인간관이나 사회관과는 동떨어진 낡은 것,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출발된 것이다. 인간관을 새롭게 갱신하여 연대, 공존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겠다는 것이다.

 

관광객이란 누구인가?

 

관광객을 정의하기 전에 관광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할 터이다. UN세계관광기구는 일상 생활권 밖에서 여행을 하거하거나 체류하는 사람의 활동으로, 방문지에서 보수를 받는 활동을 하는 것과는 무관한 모든 활동이라 정의하고 있다. 한편 관광학 교과서들은 즐기기 위한 여행이라고 어떠한 사유도 자극하지 못하는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이 행락같은 쓸데없는 현상이라는 인식처럼 관광에 대한 지적 경시를 암시한다. 이렇듯 관광이란 말에 대한 경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불필요성의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관점이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관광은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다.” -36

 

발터 벤야민이 주목한 19세기 파리의 파사주를 거니는 산책자의 시선이나, 18세기 영국 런던 만국박람회의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수정궁을 들뜬(우연성) 마음으로 산책하는 관광객의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관광객이란 이처럼 산업과 기술 지원을 받은 새로운 계급이 모이는 새로운 소비공간을 산책하는 들뜬 기분의 사람들이라는 점에 착안하면 바로 이점에 그 한계와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진지함과 경박함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의 첨예한 구분선을 불식시키는 그러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이의 대척점으로 테러리스트를 예시하고 있는데, 마치 이들은 진지함을 대표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테러리스트가 어떤 명료한 정치적 분파의 이데올로기를 지녔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오늘의 테러리스트라는 존재는 조직적 배경 없이 고독하게 범죄를 준비하는 외로운 늑대((lone wolf), 혹은 홈그로운 테러리스트(homegrown terrorist)’에 가깝다. 사실 이들의 동기를 진지하게고찰하면 헛돌 수밖에 없다는 지적처럼, 동기를 파고들면 그 천박함과 진지함 없음에 당혹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어쩌면 관광객에 가까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소비하고 가는 무책임함, 방문 장소의 모든 사물이 단지 상품이고 전시물이며, 중립적이고 무위적인, 즉 우연히 시선에 들어 온 대상일 뿐이다. 즉 관광객은 벤야민의 산책자와 많이 닮아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들어오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 관광지(공간, 장소).

 

관광객은 관광지의 실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만을 오려 담는다. 관광지의 주인인 본래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관광객의 무책임성에 화를 내고 미워하지만 어느 새 그들이 없으면 삶의 영위가 곤란해지는 경우에 처해지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관광객과 주민들은 본래 교류하려는 의지도 없으며,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도 없었지만 두 영역은 상호교호하는 관계에 이미 빠져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경박함이 진지함과 그 경계도 없이 이루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전례없는 메커니즘을 보이는 SNS의 특정 피드에 좋아요가 폭증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제 개발되는 모든 장소는 SNS의 피드처럼 관광객의 시선을 내면화한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타자가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근대적(20세기) 인간관

 

설혹 고통과 슬픔이 있더라도 모두 의미가 있다며, 삶의 현실 그자체야말로 최선(가장 좋은 것)이라 주장했던 라이프니츠를 비판하기 위해 집필된, , 인간, 이성, 문명에 대한 유럽의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최초의 상상적 여행을 통해 사고(思考) 실험을 감행한 볼테르의 캉디드로부터 시작하여,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경유하여 헤겔과 코제브, 칼 슈미트,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근대의 인간관을 성찰한다.

 

여기서 대립되는 두 유형의 인간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동물화를 지적한 코제브의 성찰이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소위 포스트 역사의 시대라는 오늘의 세계를 사는 현대인에 내재된 인간관으로 정크 푸드와 오락에 둘러싸여 정치도 예술도 필요로 하지 않고 쉼 없이 제공되는 신상품이 주는 쾌락에 자족하는 소비자라는 인간의 동물화를 설명한다. 이와 대척으로 인간의 당위를 설명하는 인물들로 슈미트와 아렌트가 각각 내세운 인간의 조건을 살펴본다. 슈미트는 정치적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이항 대립관계로 바라보았으며, 이는 헤겔의 인간관을 계승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사람은 국가에 속해 국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특수성과 보편성을 통합하는 정신사적 존재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성숙은 공동체에 속할 때 타자와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성숙과 미성숙이라는 구별이 있고, 곧 배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또한 타자에 대한 관용은 중요하나 그 관용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태도도 성숙해야 한다는 타자론을 주장했기에 나와 너라는 포함과 배제의 명료한 구별짓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렌트 역시 인간의 조건에서 행위자의 고유성이 사라진 노동으로 인간의 활동이 대체됨으로써 활동의 본질인 공공의식, 타자를 상실한 인간으로 현대인을 바라본다. 우익의 슈미트나 좌익의 아렌트 모두 대립의 이데올로기를 말한 듯했지만 이 둘이 궁극에는 놀랍게도 같은 인간관을 말했음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이것이 20세기의 인문학, 오늘의 우리들에 내재한 인간관이다. 문제는 이들의 인간관은 항상 내부와 외부로 분할하는 이항 대립이 해체되지 못했고, 여전히 인간의 삶과 의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새로운 인간관에 대해서

 

칸트와 헤겔은 정치적 의식이 경제적 의식을 억제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인류의 삶에 옳은 모습이라 했다. 다시 말해 글로벌리즘, 경제적 교류와 욕망의 이동은 억압되어야 하는 것(물론 조건적으로 관용을 내세우긴 했지만 말이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시민의 욕망이 국경을 넘어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동물적 욕망이 들끓는 탈정치화된 지구화의 욕망과 사유의 장소, 성숙한 인간의 공동체인 국가로서의 내셔널리즘이 반목하는 두 이질적인 원리가 공존하는 갈등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다.

 

이를 ‘2층 구조의 시대라 부른다. 인간의 층과 인간 아닌 것의 층, 두 층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로서. 인간으로서 독립성을 잃고 하나로 연결된 신체위에 다른 얼굴만 있는 기이한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욕망은 연결되어 있으나 사고는 분리된 시대로 말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헤겔과 슈미트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이는 대단히 모순적인 것이 하나의 신체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치기하며, 동물적 욕망의 소비자가 하나의 몸체를 이룬 괴물로서 자유지상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기형아들의 평행적 갈등과 적대를 통합하려는 사유를 아즈마 히로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제국을 통해 다중이라는 새로운 인간관을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네그리가 다중의 활동을 직접 주권과 접목시킬 메커니즘을 고작 에테르라는 신비로운 요인에 맡겨버렸다고 비판한다. 아름답지만 아무런 전략도 없는 낭만주의적 타령에 불과하다고. 그러면서 비판 계승한다. 우편적 다중!’, 우편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다중이다. 배달의 실패라는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함축한 어떤 물건의 지정한 곳을 향한 배달시스템으로서의 의미를 통해 연대없이 소통하고 사적인 욕망에서 공적인 공간을 연결,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상정하는 것이다.

 

오늘, 현대인을 통찰하는 저자의 시선은 신선하고 다각적이다. 정보산업이라는 새로운 프론티어로서 자본주의 플랫폼을 바라보는데,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의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고, 이것이 인간 주체를 분열시키는 현대 사회의 본질임을 지적한다. 인간이 가상공간으로 분신(分身; 아바타)이 되어 들어가서 가상의 공간에 독을 쏟아낸다. 그리곤 섬뜩한 존재가 되어 본인에게 달라붙고 소통의 본질까지 변질 시켜 혐오와 가짜가 일상의 경험이 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 오늘의 정보사회의 주체는 이처럼 섬뜩함에 둘러싸인 주체라는 것이다. 새롭게 이중화된 현대적 주체인 오늘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개인과 사회의 연결 - 상상적 가족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에 대한 역설적 독해는 왜 관광객을 사유해야 하는지를 발견케 한다.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현실에서 사회를 만든다. 달리 말해 누구도 공공성 따위를 갖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공공성을 갖는다.” 루소의 이 역설은 모든 인문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식이다. 이는 관광객은 사회 따위를 만들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만들고 마는 존재라는 저자의 이해를 관통한다.

 

항상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갈등이,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관계의 악화가 억제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성숙과도 무관하며 외교적 의지와도 무관하게 단지 관광객 자신의 이기심과 여행업자의 상업정신에 이끌려 오가는 것, 이것이 당사자들의 평화조건이 되는 것이다. 관광객의 일반의지, 우편적 연대라는 우연적 소통이 빚어내는 평화와 약한 연결의 모습이다.

 

아마 저자가 인유(引喩)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을 통한 상상적 가족, 일종의 의사(擬似)가족(결사)을 새로운 인간관과 인간사회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이 분열된 인간 정신을 연결하고 연대를 사고하는 출발지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어떤 사회를 꿈꾸는지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상상력, 반성적 사유(성찰)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사회를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없을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속 화자는 세계의 위선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자기 학대의 쾌락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마조히스트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악령의 지시를 내리지만 정작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사람들의 욕망을 조정하는 테러리스트 스타브로긴은 자기가 없는 전형적인 사디스트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를 뛰어넘는 세계의 필연밖에 없는 텅 빈 자아의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타자가 없다.

 

이것은 지금의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타자 원리가 없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오늘의 세계에는 타자에게 관용을 지탱할 철학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자그대로의 관광객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의 본질을 우리의 인식적 주체로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미완의 작품으로 남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엡스키가 완결로서 속편를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제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알료샤 만세를 외치는 어린 콜랴의 외침이 상징하는 것이다. 이들의 가족으로서의 결합, 그 우연성과 확장성을 내재한 우편적 연대, 관광객인 가족, 아이들로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한다. 가족의 이념성과 그 가능성을 철학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저자의 제언은 기나긴 근대의 인간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과 사회는 어떠해야 할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 저작의 주장에 모두 동의 할 수 없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 네그리의 비판이나, 헤겔 철학에 대한 시선은 많은 반박 가능한 여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주체에 대한 이원화를 통합하려는 철학적 야망이 저자가 처음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즈마 히로키의 인류 연대와 평화를 향한 사상적 연결의 시도는 탁월한 지적 성찰과 탐구의 노력이 배어있는 역작임을 폄하할 수 없다. 인간사회는 어쩌면 들뢰즈의 지적처럼 두 개의 상이한 권력체제를 항시적으로 생성하는 불평등의 체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불평등의 체계를 당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저 방치한다면 극단적 불평등의 세계로 이행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곧 인류 자멸의 길일지도 모른다. 난삽한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며, 익히 잘 알려진 문학 작품들을 통해 독자 대중에게 함께 사유할 것을 제안하듯이 친근한 글로 쓰인 노작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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