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멜바이스 / Y 교수와의 인터뷰 제안들 13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김예령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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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독특한 이력 못지않게 소설 제멜바이스는 본명 루이페르디낭 데투슈(Louis-Ferdinand Destouches, 1894~1961)’, 필명 셀린1924년 의학 박사학위 논문이다. 그런데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필리프 솔레르스(Philippe Sollers; 1936~ )’셀린의 탄생이라는 글에서 서사시풍의 문체로 작성된 이 희한한 논문이라 표현하였듯이 엄중한 학위 심사를 위한 의학논문이라 보기에는 여간 수상쩍은 것이 아니다.

 

또한 셀린은 1936년 재판본 서문을 시작하며 이것은 제멜바이스의 삶에 관한 참혹한 전기이다.(29)”라고 선언한다. 어쨌든 이 글은 희한한 학위 논문이며, 참혹한 전기이자 서사시이기도 하다. 사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이 논문을 그저 실화소설로 읽으련다. 그래서 작품이라는 예술에 붙이는 명사로 호칭하기로 한다.

 

이 작품은 인습과 위선, 태만한 이성이 인간의 상식으로 굳어진 상상의 고집이 되어 얼마나 집요하게 진실을 외면하며, 맹목적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동반하는지 감염 예방의학의 선구를 연 헝가리 출신의 의사 필리프 이그나즈 제멜바이스의 일대기를 통해 그 멍청하고 심술궂기까지 한 인간들과 그 사회를 냉소적이고 강렬한 문장들로 쏟아 놓는다.

 

비단 이 책은 외롭게 고군분투하다 가장 낮은 죽음으로 허물어진 한 의사와 의학계만의 실상을 더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참화가 계속됨에도 한 치의 진전도 없는, 그러나 끈덕지게 계속되고 있는 인간 정신의 절대적 게으름에 대한 신랄한 비평이다. 상식이라는 전통에 얽매여 정신의 감미로운 무력함과 행복한 지각의 감옥(133)”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대체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광인이 시작되는 곳에서 인간은 끝난다.” -139

 

제멜바이스의 박사학위 논문 또한 작가 셀린의 그것처럼 음악적 영감과 가치를 띤 식물들의 삶이라는 시적 열정 넘치는 독특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심사 주재교수이던 스코다는 애제자를 위해 “‘의약과 감정이라는 미묘한 주제에 대해 치밀한 논증을 하라고 요청(65)”했을 뿐 1844년 봄, 심사 당일 의학박사 학위를 승인했다. 이후 그는 병리해부학 교수인 카를 폰 로키탄스키(1804~1878)’와 진단학에 공로를 세운 체코출신의 의학교수 조셉 스코다(1805~1881)’의 옹호 하에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외과의들의 지적 태만과 허영심에 대해 제멜스키의 회의(懷疑)가 보여주는 다음의 문장은 그네들이 얼마나 의료적 진정성에 무심했는지의 일례라 할 수 있다. 아니 인간 사회 전반의 실상이라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감염을 둘러싸고 외과의들은 “‘아주 걸쭉한 농포’, ‘양질의 농포’....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는 재주 자랑 놀이에 빠져, 단지 거창한 말을 입은 숙명주의요, 무력감의 반향일 따름이었다. (...) 하나같이 진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69)”고 말하는 것이다.

 

환자가 왜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인지 원인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수술만 계속하며 의학 용어만을 주절거리는 그 허위의 정신들에 혐오감만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반응은 곧 진실이라는 빛의 길로 들어섰음을 작가는 읽어낸다. 18461월 마침내 제멜바이스는 스코다의 추천에 의해 산부인과 교수가 되어 조정(朝廷)에 강력한 끈을 가지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탐욕과 권위를 유지하던 클린이라는 인물의 조교수로 배치된다.


 



자만심만 가득하고 수하 조교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무능한 권위주의자인 클린은 제멜바이스에게 온갖 종류의 질투와 집결된 어리석음으로 위험한 갈등을 지속적으로 촉발한다. 당시 산부인과 병동은 산욕열로 사망하는 임산부의 비율이 폭발적인 상황이었으며, 오히려 병동에 입원하지 못해 거리에서 분만하는 산모들이 훨씬 안전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 클린의 산부인과 병동은 장례의 문장들로 이루어진 육중한 장막이라는 은유 바로 그것이었음이다. 산부인과 의료진들 -인습에 길들여진 경건하고 비굴한 자들 - 의 의식이란 산욕열이 서민층 아낙네들이 모성의 삶에 들어오면서 종종 치러야 했던 일종의 고통스런 조공이라 여기(77)”는데 만족하고 있었으니, 임산부들의 출산은 곧 죽음과 동의어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기서 셀린은 지적한다. 숙명이라 불리는 이 주변 환경의 강박 한가운데 버티어 서고, 무엇인가를 감행하고, 그러면서 자신을 휩쓸어가려는 공동의 운명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힘을 제 안에서 발견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79)” 는 것이다. 좀처럼 이 인습적 타성, 시대를 휘감아 도는 상식이라는 숙명을 넘어서려는 자는 오히려 주변의 돌팔매를 얻어맞기 일쑤인 것이 인간 사회라는 말이다.

 

최고의 지성이란 자들이 제멜바이스의 발견을 인정하고 적용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 이들은 만장일치로 증오심에 사로잡혀 제공된 이 거대한 진보를 거부했다.“ -103

 

제멜바이스는 시신 해부실습 중 메스에 찔려 그 여파로 동료 의사가 사망하자 이를 추적 하여 산모들의 사망 원인이 되었던 산욕열과 이 병이 일치함을 느낀다. 시체로부터의 감염이 산욕열의 병인이라는 가설이다. 당시 조직학의 수준은 현미경 수준 포착 염색법을 알지 못했기에 세균을 보지 못하였으니, 논리적 추론에 의한 병인의 확인 이상은 불가능했기에 이를 입증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산모들을 수술하는 모든 의료진에게 손을 씻은 후 접촉할 것을 요구하지만 클린은 질투와 무지로 그를 반박하고 급기야 내치기까지 한다. 이 작품은 제멜바이스의 이러한 감염 예방을 위한 병인 규명과 당대 의료 지성들의 거친 위선과 몰이해, 진실 경멸이라는 어리석음과 공격성과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자칭 전문가라 하는 이들, 본연의 학문에서 이처럼 맹목적이고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기도 하지만, 이 같은 맹목성에 더해 거짓말과 멍청함, 비열함까지 갖추었음을 보는 것은 사실 인간에 대한 수치스러움이다. 셀린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갖 질투와 허영이 고삐 풀린 듯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온다.(...) 훗날 인간 과오의 역사를 작성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보다 막강한 과실의 예는 찾기 힘들 것(107)”이라고.

 

제멜바이스는 이런 배타적 시련 속에 고향 헝가리로 돌아오지만 그에게 가해지는 고립과 폭력 속에서 그의 불은 사그라들고 만다. 마지막까지 그를 도우려 했던 동료는 당시 프랑스 산부인과 계를 지배하던 난공불락의 권위자인 뒤부아를 찾아가지만 그는 세균 감염, 즉 감염 예방을 위한 의료진의 손 소독은 이미 폐기된 것이라며 적대감마저 보인다. 세상은 권위에 복종하고 인간의 정신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만다.

 

알량한 이성이라는 사슬의 관습에 얌전히 용접된 채 주의 깊게 앉아있는 어린이 모양처럼 인습과 권위에 복종하면서 진실에는 사납게 달려들어 두드려 팬다. 작가는 다시 반복한다. 우리 인류의 운명에 적합한 양상을 선택할 줄 모르는 이에게 수치를!(130)”이라고. 마치 선량한 시민에게 폭력과 죽음을 휘두르던 어제의 살인자들이 오늘은 모럴리스트가 되어 뻔한 참회의 헛소리를 지껄이고는 다시금 끈덕지게 예전의 짓거리를 계속하는 작금의 한국 사회처럼 말이다. 여기에 교태어린 인간들은 과장된 아부의 헛소리를 읊어대며 죽음과의 협약에 공모한다. 이 뻔하디뻔한 공허한 노래를 반복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언제 그치려나? 지상 표면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지하철에 담아 비스듬한 레일을 급속으로 달려가도록 하는 것이 감응(affects;情動)’의 문체임을 역설하던 셀린의 비굴하고 무관심하며 무기력하기만한 인간과 인간 세계에 대한 이 신랄한 비평은 인간의 비속성, 그 실체를 음울하게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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