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 정신분석과 문학 무의식의 저널 Umbr(a)
알렌카 주판치치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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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르는 어떤 것으로의 통로이며, 주이상스를

기록하는 증상, 실재의 귀환을 위한 공간을 기록하고 열어주는 행위이다."

- 59쪽에서

 

 

이 책은 글쓰기가 불가피하게 노정하는 틈새, 그 결여를 통해 드러나는 '분리된 주체'로 맺어지는 "쓰기와 정신분석을 연결시키는 개념의 길을 닦는 개간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글 혹은 문학의 문자가 재현해 내지 못하는 무엇이 있다. 바로 그 무엇이 봉합되지 못한 분리된 주체이며, 이것을 읽어내는 것이 정신분석이고, 이를 통해 실재와 조우를 가능케 하여 충실한 삶의 이해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담론이라 하겠다.

 

사실 이러한 연결 노력이 아니더라도 글쓰기, 특히 문학 작품이란 어떤 일관성과 이해를 원하는 본질적인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정신과정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정신분석적 독해''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무의식적 환상, 원초적 장면, 어린 시절 기억 등등',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서 풀어내는 "완전한 예상 가능성을 함축하는 지루하고 이론적으로 빈약한 환원적이고, 고작 정신분석 진리를 확증하는 데 이용될 뿐(110~111, 축약 발췌 인용)"이라고 비판되기도 한다. 이 책 라이팅: 정신분석과 문학에 대한 내 읽기는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아마 이러한 비판에 대한 가장 치열한 논의가 진행된 글은 '-미셸 라바테'가 쓴 문학해석에 저항하는 문자: 라깡의 문학비평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분석적 해석은 "텍스트의 고유성을 교조적으로 공식에 환원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 '데리다'"상식의 심리에 기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텍스트에서 반복되는 기표들, 그 언어학적 결절점에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라깡의 서로 다른 견해이다. -미셸은 우리가 텍스트를 읽는 가능한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데리다를 반박한다. "아무도 일정한 텍스트의 요소들로 환원시키거나 번역하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읽을 수 없"으며, "텍스트의 풍요로움이라는 순수성은 언제나 주제, 구조, 플롯이나 서사등과 같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델, 사례와 개념적 도구들이 필요한 것은 불가피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주장한다. 물론 기원과 가정의 결과처럼 환원적인 해석이 아닌 정신분석적 이해를 가지고서.

 

"문학은 구멍과 삭제로 만들어졌다." -126쪽에서

 

핵심은 이것일 것이다. 정신분석과 글쓰기 혹은 문학과의 연결지점, 즉 문자, 써진 글에서 읽어 낼 것이 무엇인가? 가 될 것 같다. 라깡은 "텍스트의 표면에 명시된 의도들의 핵심을 거스르면서 가능한 문자적으로 충실하게 읽"어야 한다고 했다. '캐서린 밀로'가 쓴 왜 작가인가는 이 사안의 적절한 답변으로 보인다. 드러나서는 안 될 자신의 욕망이 노출될 두려움으로 라깡에게 보내지 못한 엽서의 일화로 시작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V. 스타인의 황홀경의 첫 장면, 이른바 '원초적 장면'이라 부를 수 있는 롤 스타인의 모습에서 일종의 근본적 부재를 읽어낸다. 그리곤 "그것은 부재 언어, 구멍 언어"라고, 다른 말들이 그 안에 묻혀 있는 구멍, 여기서 분리된 주체의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그 욕망의 근원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재현 불가능한 '실재', 상징계와 상상계를 잇는 구멍과 삭제이지 않을까? 문학은 이처럼 정신분석과 이어진다는 것일 게다.

 

이 책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트레이시 맥널티'제약의 작동: 상징적 삶의 미학을 향하여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매력적으로 다가 온 첫 번째 이유는 성문법, 혹은 쓰기가 상징계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가설의 치밀한 입증 여정 때문이다. "모세의 일신종교-유대인의 십계명-가 근본적 부재와 결여를 도입했다."는 것, 즉 이전의 토템구조와 같은 상상적 권위와 동일시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아닌, 즉 대타자의 결여된 중심을 통과해가야 할 것을 규정해 놓은 상징계의 제도로 나아갔다는 증명이다.

 

희생거부, 신성의 육화현신 금지와 같은 이 율령이 전능한 아버지, 즉 초자아적 성격을 비워 냄으로써 대타자의 논리적 장소를 텅 비게 했다는 것이며, 이는 욕망의 주체가 등장하는 공간을 열었다는 것이다. 신이 뒤로 물러남으로써 인간 주체의 충만한 등장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이 쓰기와 연결되어야 하는 필연적 성취가 아니겠는가라는 결정적 수긍의 지점이라 하겠다. 이것은 칸트의 '무한의 부정적 전시'로서의 쓰기에 닿아, 성문법(쓰기)이 상상계의 유혹에 저항하고 그 유혹이 권장하는 권력에의 복종을 거부하는, 이성적 능력의 자유로운 행사의 길을 열었음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우리는 쓰기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스스로 고양시키는 초월 능력의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매혹의 둘째 이유는 실험 문학집단 울리포(잠재적 문학의 작업실)의 형식적 강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쓰기를 통해, "엄격하게 형식적인 (실험적)강제가 갖는 해방적 잠재성"의 차원에 대한 발굴로서, "문자의 실천에 내포된 창조적 강제와의 투쟁 속에서 모색하고 유지되는 주체의 출현"에 대한 발견이라 하겠다. 결국 욕망과 자유의 행사 속에서 주체를 유지시키려는 이 야심적 실험에서 인간 삶의 충만한 다양성을 헤아릴 수 있음의 새로운 이해의 획득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도 수동적 저항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특이하고 기묘한 문장 하나를 통해 "가시적이고 실감나게 묘사 가능한 아무것도 없지만 뭔가가 일어난" , 그것 본원의 줄기를 따라감으로써, 이 불확정성과 미결정성의 문자가 야기하는 제3의 영역, 그 상징적 공간을 열어 의미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알렌카 주판치치'가 쓴 바틀비의 자리는 정신분석과 문학의 연결을 총합적으로 아우르는 정신분석비평의 멋진 보기라 해도 될 것 같다.

 

우리 인간들은 글을 통해 실재를 쫓으려하지만, 이 재현은 필연적으로 결여를 낳는다. 바로 이 결여, 틈새가 잔여물로 남겨진 실재를, 상징계를 통해 발굴하게 한다. 정신분석은 문학, 그 무의식의 주체인 실재를, 주체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틈새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현전을 환기시키고 발언 불가능한 그 실재를. 정신분석을 통해 우리는 문학의 공간, 언어의 순수성을 약속하는 공간을 배우게 된다. 두고두고 참조할 문학 비평서이자 정신분석이론의 실천적 기능을 다원적으로 이해케 하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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