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 엘리트 북스 홍신 엘리트 북스 121
톨스토이 지음, 최원준 옮김 / 홍신문화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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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에 발표된 이 소설은 장황한 불륜 스토리와 더불어 농촌 귀족 레빈과 그 주변 인물들로 표상되는 문명적 전환기를 마주한 인간들의 사상적 혼란과 이러한 환경 속에서 겪게 되는 혐오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구원과 속죄의 여정으로 읽게 된다.  (*이 감상 글은  1,2권 통합 리뷰입니다.) 





1. 불륜의 탐사 (1~4)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사유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시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1850년대의 러시아는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사회적 전환기에 휩쓸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전환기에 야기되는 가치관, 이념, 제도와 체제의 혼란이 등장인물들의 삶의 실체적 모습에 투영되어 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귀족 중심 사회의 점진적 쇠퇴, 여성 지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 전근대적 농노제에서 자유농의 부상,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태동 등 당대의 분위기가 작품의 저변에 흐르며, 이러한 변화를 맞이하는 인간들의 고통과 환희를 사랑과 증오, 유대와 혐오의 언어로 그려내고 있다.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진부하다 할 만큼 평이한 소설의 첫 문장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한 가정의 저마다 다른 이유를 탐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요한 한 축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동기는 분명 다르다. 인간의 인지 능력, 지식의 축적 정도에서부터 취향이나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일 것이다. 도입부는 오블론스키로 불리는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외도로 위기에 내몰린 가정을 다루고 있다. 아내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돌리)는 이혼을 결심하지만 시누이 안나 카레니나의 위로와 중재로 이 가정의 균열은 봉합되고 위태로운 안정상태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작가 톨스토이가 남자의 외도에 관대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이 점은 시대성을 넘어서지 못한 톨스토이의 한계라고 정리하는 것으로 족하겠다. 다만, 톨스토이의 변명은 안나의 입을 빌려 올케 돌리를 설득하는 다음의 문장 이라 할 것이다. 안나는 오빠 오블론스키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정한 짓을 할지언정 자기의 가정이나 아내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고. ...

그런 사람들은 그런 류의 여자들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 대해선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에요.

그런 남자들은 가정과 그런 여자들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선을 긋고 있는 거예.(1-118)”

 

그러면서 안나는 돌리에게 묻는다. ‘마음속에 오빠에 대한 사랑이 있는지, 오빠를 용서할 만큼의 사랑이 남아 있다면 오빠를 용서해줘요라고. 또한 오빠가 벌인 일은 그의 진심이 아니기에 자신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용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을 톨스토이의 남자의 외도에 대한 변명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안나의 이 남성 관점의 변론은 자신이 불륜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완벽하게 그 반대의 언어를 말한다.

 

정사(情事)를 나눈 후 연인 브론스키를 향해 안나는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에요. 저에겐 당신밖에 없어요. 그걸 잊지 말아 주세요(1-239).”라며, 돌리를 향해 말했던 가족의 신성성을 묻어버린다. 그녀에게 이미 남편도 아들도 없다. 오직 육체적 욕망을 채워주는, 물론 안나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긴 하지만 브론스키만이 있다.

 

안나의 세계엔 이미 남편도 아이도 없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남편에게 모든 걸 밝히고 둘이 떠나겠다고 말할 경우 남편의 반응을 추정하는 다음의 말은 이미 돌리에게 오블론스키를 용서할 만큼의 사랑이 있느냐고 물어본 것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그이는 정치가다운 태도로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겠지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모든 방법을 동원해 스캔들을 없애겠다고 말예요. ...그이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니까요. 그것도 무서운 기계예요. 특히 화가 날 때에는.(1-301)” 구조적 당위성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에 비유되고, 여기에 사악함을 덧씌운다. 이 말에는 남편에 대한 일말의 연민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만적 행위에 대한 성찰 또한 존재치 않다는 점이다.

 

브론스키와 그의 사촌인 남성 편력으로 소문난 베트시 공작부인을 만나기 위해 몸단장을 하던 안나에게 남편이 도착하자 그녀의 거짓 영혼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하필 이런 때에 온담, 자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여보, 오늘 밤은 주무시고 가시겠지요?”, “이제부터 우리 같이 가기로 해요.(1-323)”라는 기만적 언어를 발설한다. 알렉세이 카레닌은 이러한 기만적 언행을 감지하지 못하는 맹추가 아니다. 아마 총 8부작인 소설에서 브론스키가 말과 함께 넘어지는 경마 대회 장면은 이 불륜 이야기의 가장 결정적 장면이라 할 것이다. 귀족들과 고위 관료들의 시선이 빼곡한 곳에서 홀로 걱정의 탄성을 부르짖으며 주저앉는 안나의 행위는 어떤 확정된 상황을 예정한다.

 

안나라는 여인의 정말의 속셈은 무엇일까? 정부(情夫) 브론스키와 함께하는, 자기 욕망을 언제든 성취할 수 있는 독립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도 카레닌 부인이라는 명예의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들 세료자에 대한 보호자로서 어머니인 자신의 사랑을 놓을 수 없다고 변명하지만 이것은 단지 자기기만이다.

 

자신이 카레닌을 벗어나고자 은연히 암시했을 때 브론스키가 보호자가 되겠다고 확신을 주었다면 그와 단 둘이 떠나려했음을 상기하는 장면처럼 그녀에게 아들은 자기 신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브론스키가 경마대회에 참여하고 있을 때는 이미 안나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하필 이런 때에 왔다며 남편의 방문을 혐오하면서도 남편의 건강을 말하며 위선을 떨던 여인은 가히 불륜이라는 가증스런 욕망 덩어리라 해도 부족할 듯싶다.

 

경마장에서의 공개적인 불륜의 확신을 주는 행위에 대한 남편의 완곡한 경고성 발언이 주어지자 이에 즉각적으로 혐오와 조롱의 언사를 행하며, 급기야 자신의 부정을 남편에게 고백한다. 아니 선언한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될 것 같다. 너는 나의 브론스키와의 관계,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어떠한 간섭이나 요구도 하지 말라는 적대의 언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지속하여 이율배반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브론스키와의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는 혼인의 구속에 몸부림치며, 남편으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면서도, 귀족 사회에 자신의 불륜이라는 추함이 공식화되는 것은 수용치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남편의 공식적인 승인, 카레닌의 아무런 보복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불륜을 정상화하고 싶은 욕망이다.

 

카레닌의 입장을 보자. 그는 부정을 선언하듯이 통고한 안나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세상 사람들이 이 소문을 모르고 있는 한, 나의 명성이 더럽혀지지 않는 한 난 모른 체할 작정이요....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할 경우엔 나는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에 적합한 방법을 강구할 것이오.(1-498)” 불륜의 사실이 세상에 직접 사실로서 공식화되기 전까지는 표면적 관계를 손상시키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부연한다. 당신은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더라도 정숙한 아내로서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오....식사는 집에서 하지 않을 것이오.(1-499)”

 

카레닌은 불륜 이전의 아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를 기계라고 멸시하는 것은 정부에 매몰된 여인이 으레 갖게 되는 증오의 언어이지 이것이 카레닌을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는 없다. 그는 고위 정치 관료다. 자신의 정치적 과업에서 성취를 얻어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랄 수 있다. 안나는 그가 사랑이란 애초에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오빠 오블론스키의 입을 빌려 스무 살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의 결혼 성사에는 남자가 이미 쌓아 놓은 고위 정치 관료라는 명망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사랑이라는 낭만적 관계, 육체적 욕망의 실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랑이 사회적 지위가 제공하는 안락과 명망보다 소중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늙은 남자와의 결혼관계를 무용화 시키겠다는 주장을 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마침내 이혼을 결심하고, 모스크바로 고뇌어린 짧은 여행을 도모하지만, 안나로부터 죽음의 고통에 처해있으니 페테르스부르크의 집으로 돌아와 달라는 전보를 받게 된다. 안나의 전갈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하면 아내의 죽음이 도래하여 마침내 이 고통스러운 위협의 상황이 끝나기를 기대한다. 안나라는 여인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으며 산욕열로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게 되자 남편을 간곡히 찾았다는 것과, 도착한 남편에게 브론스키와의 만남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며 구구절절 용서를 빌며 참회하는 장면이다.

 

안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카레닌은 이러한 안나의 변화에 대해 연민과 용서의 마음으로 전환하여 극진한 간호와 함께 부부로서의 정상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자 안나는 남편과의 마주침 자체를 불쾌함, 혐오스러움으로 인식하며 한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의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죽음만이 이 상태로부터의 구원이라며 오빠 오블론스키에게 하소연한다.

 

여동생을 위해 오블론스키는 카레닌에게 안나를 해방시켜줄 것을 완곡하게 부탁하고, 카레닌은 결국 안나와의 이혼을 승낙한다. 그러나 안나는 이혼을 선택하지 않는데,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브론스키와의 결합만을 욕망했기 때문이랄 수 있다. 안나는 아들과 남편을 저버리고 브론스키와 갓 낳은 딸과 해외로 떠나버린다. 안나는 그녀 자신의 이익을 완전하게 성취한 것이다. 고위관료 아내의 신분과 귀족의 평판도 잃어버리지 않고 욕망의 대상인 연인 브론스키를 마음껏 만끽하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카레닌과의 결혼은 실수였다고 부르짖으며 세상이 불륜이라 칭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안나의 이 성취가 과연 행복의 지속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지.

 

독립된 인간이 될 권리, 이게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구속된 것(1-603)”이 당대의 여성이라 주장하는 페스초프라는 인물이 오블론스키의 저택 만찬에서 하는 말은 시대성이 내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제약을 넘어서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안나의 행위를 이러한 시대성의 돌파라 해석해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이해한다. 결혼을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의 파괴할 수 있는 제도라 하는 것이 아니라, 카레닌과 이룩한 가정을 일방적으로 파괴하는 안나의 일방적인 배신 행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위선이다.

 

당시 러시아의 이혼 법은 이혼 후에 여성은 정부(情婦)는 될 수 있었으나 정식 혼인관계를 새로이 얻을 수 없었으며, 귀족 사회의 관습 또한 불륜의 당사자인 귀족은 그 세계에서 더 이상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지성을 갖춘 귀족 여성인 안나가 이러한 법적, 관습적 제도를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충분한 지적 이해 속에서 안나는 불륜을 선택했으며, 이를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위한 이해, 즉 불륜에 대한 완전한 방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카레닌은 안나의 삶의 복귀를 위해 합법적 남편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은 욕망의 대상과 함께 날아가버린다. 끊임없이 자기 구속의 명분으로 삼던 아들 세료자는 버려두고서.

 



 

2. 전환기 러시아 그리고 인간 구원 (5~8)

 


불륜의 히로인(heroine)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의 도피와 연인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 자기 연민의 불가항력적 귀결에 이르는 장면들은 당대 여성들, 특히 사교계로 대변되는 귀족 여성들의 사회적 위선과 자기 한계를 노출한다. 작가 톨스토이의 시선은 지극히 기독교적 순결주의의 도덕성에 천착하고 있어 소설 도입부를 장식했던 오블론스키 백작의 외도로 이혼의 위기를 가졌던 돌리의 안나에 대한 관념적 공감과 달리 그 행위의 원인이 된 사람을 보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2-292)”고 반감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안나 또한 시대성이 지닌 여성의 굴레를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사랑이라는 열정에 몰입하여 연인의 신체와 정신을 견고하게 자신에게 붙들어 두는 것만이 존재의 의미가 될 수밖에 없기에 귀족 사회 및 남성적 시선에 포획된 언어를 그대로 자신에게 투사하여 역겹고 추잡스럽고 몰인정한 계집(2-192)”이라는 자기혐오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자기 혐오는 곧 자기 연민의 다른 표현이다.

 

한편 이와 달리 안나로부터 배신당한 카레닌의 경우에는 아내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언제까지나 자기라는 존재 때문에 아내로 하여금 고민하지 않도록 해준(2-115)” 결과가 절망감과 슬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경멸받는 고독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연민의 공감으로 나타나고, 나아가서 리디아 공작부인이라는 귀족 사교계의 한 축을 구성하는 여성으로부터 사랑과 연민을 받는, 즉 사회적 권위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지 않으며, 종교적 구원, 하느님의 고상한 관용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대목이 있다. 카레닌의 안나에 대한 죄의 물음이다.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하던 안나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그 불의의 자식에 대한 배려의 수치스런 기억과 회한이 그를 괴롭히는 중에 그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는 것일까? 사랑하는 법이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혼하는 법이 다를까?(2-137)”라는 본질적 자문을 하는 것이다. 관념적 이상과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시대성의 충돌은 여성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징후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성의 역할과 인식에 대한 아주 소박한 변화의 징후는 농촌 귀족 레빈의 아내인 키티 레비나의 사랑의 지혜로 현현되는데, 형 니콜라이의 임박한 죽음을 대하는 자신이 지니지 못한 두려움 없는 의연함의 지혜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에게 여성, 아이, 농민 등 평민은 복속되어야 하며, 그들에겐 지혜란 것이 없다는 믿음의 미세한 균열이다. 그는 농노제에서 소작농, 임금 및 수확배분 등 다양한 농업 경영 방식으로의 이전에서 부대끼는 당대 농부들의 게으름, 새로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쌓아 나간다. 또한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황들은 당대 러시아가 봉착한 정치적, 경제적 양상들의 다양한 전시장이 되어준다.

 

작가는 레빈에게 작품의 축으로서 삶의 구원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안기지만, 니콜라이의 죽음으로부터 야기된 존재의 지속 가능성, 이로 인한 삶의 의미라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의 구함은 한 농부의 신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라는 우연한 언어를 마주할 때까지 계속되며 조금은 답답한 고루함을 이어나간다. 사실 오늘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제재는 레빈의 형으로 상징되는 지식 엘리트, 즉 당대 인텔리겐차의 오만한 무지와의 치열한 논쟁에 있다.

 

크림반도로 불리는 세르비아, 터키 지역의 전쟁에 동족인 슬라브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출병하는 의용군대에 대한 찬반의 문제이다. 전쟁 참여의 명분은 다분히 자의성을 지닌다. 학자인 형 코즈니세프는 주장한다. 슬라브 민족이 이교의 사라센 인 멍에 밑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도들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처럼 동포의 고난에 민중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러나 레빈은 이를 반박한다.

 

러시아인이 왜 갑자기 슬라브의 동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더구나 편리할 때마다 사용하는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 막연한 민중의 의지라는 것이 자기 의지를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표명해야 할 사건으로 눈곱만큼도 여기지 않음에도 그들에게 민중의 의지 운운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반론이다. 무고한 터키인을 살해하려는 것, 그리고 죽음의 전장으로 향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이의이다.

 

여기에 신문이라는 신문은 다 똑 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 실재 진실의 목소리는 물론 아무것도 얻어들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신문 즉, 여론을 조성하는 이 인위적 매체의 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레빈은 신문과 민중의 의지라는 언어를 이용하여 복수와 살인의 사상을 대표할 권리를 인렐리겐차가 가지고 있다는 데 결코 동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 현실에 그대로 이식해도 아무런 손상도 없는 담론적 지위를 지닐 수 있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상업 권력이 지배하는 오늘의 언론 미디어는 이미 공정한 지표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며, 엘리트 지배계급이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나 관심이 있으며, 더구나 전쟁의 선포나 참전의 결정을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은 이제 애국심과 같은 정체성을 획책하는 저열한 악의에 결코 공감을 얻기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우둔, 지혜의 속임수에 대한 레빈의 갈파와 함께 자신의 내적 충동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한 인간으로부터 사회적 조건을 초월한 진리 발견의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이성이 발견한 것은 고작 생존경쟁이요, 욕망 만족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증오의 법칙일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이성이 남을 사랑하라는 법칙을 발견할 리가 없다(2-565)”는 레빈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반()합리주의 세계관과 많이 닮아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우리들이 근거 없는 의지를 이해하려 할 때 과연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톨스토이가 말하는 구원, 영혼으로 사는 것, 하느님의 율법대로 사는 것만 유일한 길일까? 그렇다면 치욕과 불명예로 몸부림치다 열차에 뛰어든 안나의 행위는 죽음에 의한 구원의 의식인가? 아니면 원죄, 불륜의 속죄인가? 나는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이러한 우둔함에 머물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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