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타자 - 정체성의 환상과 역설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 러셀 그리그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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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사회라는 거대 구조에 짓눌려 그것이 설정하고 있는 수많은 규칙들과 제도, 혹은 문화라는 관습적 양식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결국 라는 존재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 낸 가면과도 같다. 그런데 나라는 실체는 정작 그 가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주체이기에 이 분열된 는 문득 문득 자신이 낯설어지며, 그 간극으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타자라는 이 수상쩍은 책을 읽던 중 정말 우연치곤 기이하게 The Call이라는 가수들의 콜라보(Collaboration) 음악 프로그램에서 태민×비와이가 부르는 <피노키오>라는 노래 말이 들려왔다. 아마 대충 이런 가사였던 것 같다.

 

너로 향한 내 거짓이 내겐 익숙해, I wanna be wanna be,

하얀 웃음너머 검은 거짓말들을 꼭 진실인척 진심인척 난 나를 꾸며,

더 깊숙하게 숨어버린 진심, 이러다가 진짜 내 모습마저 사라질 듯 해.....”

 

노래를 부르는 이 젊은 가수의 호소에는 무대에 올라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자신의 꾸밈에 익숙해져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 꾸밈, 가면의 삶이 정작 자신의 실체가 소멸될 것 같은 불안을 느끼게 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 이건 진정한 내가 아닌데, 진짜 나의 삶을 살고 싶어라는 소위 사회구조라는 대타자(大他者)에 저항함으로써 분열된 주체의 통합, 온전한 를 되찾고 싶다는 무의식적 외침의 반영일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결핍을 겪는 주체, 주체 내부의 상처와 마주하기, 미완의 나를 총체적 나로 끊임없이 지향하기, 실패가 불가피한 나를 만나는, 지속적인 진자운동을 통해서 타자(분열되어있는 내 안의 타자들)를 동일자(the same)로 만드는 무한한 과업의 수행을 이야기한다. 정체성으로 가는 여정의 다양한 논의들이 제시되고 그것들의 철학적 혹은 논리적, 그리고 성적 함의를 살펴보는탐색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신분석, 젠더연구, 비교문학, 현대철학를 대표하는 7인의 라깡주의 석학들이 사회구조에 대항한 주체의 저항 가능성 등을 어떻게 이론화하는지에 토대를 두고, 부분적이나마 국내 출간되지 못한 라깡의 여러 세미나의 내용들을 통해 정체성과 동일화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를 엿볼 수도 있으며, 강박의 망상적 실재를 이해하게도 되고, 혹은 성차에 대한 오랜 논쟁적 논의를 지닌 페미니즘의 이론적 무기를 발견할 수도 있게 해준다.

 

따라서 소개되고 있는 담론의 주제와 관련하여 읽는 이에 따라 그 실천적 관심은 무궁무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서장을 여는 슬라보에 지젝의 대타자의 권위에 복종하려는 열정적 애착에 대한 주디스 버틀러의 비판으로서 라깡 해석은 그야말로 압권이랄 수 있다. 이를테면 버틀러는 대타자에 저항하려는 원초적인 복종은 상상계에서 이루어지기에 상징계인 실재에서 무력하며, 그럼으로써 열정적 애착을 봉쇄해버린다. 결국 주체는 사회구조에 대항 할 수 없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지젝은 열정적 애착이란 근본적 환상이며, 이것을 가로질러 무화시키고, 주체적 결핍을 겪도록 하는 것, 즉 무력감은 원초적 열정적 애착의 필요를 자극하는 탈애착(dis-attachment)이라는 틈새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으로 해석함으로써 저항의 자유가 가능한 주체를 복원해낸다.

    

 

 

이 논의는 진정한 여성’, 그리고 진정한 행위의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페미니즘 이론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이론 기반을 제공하는 부분이 될 것 같다. 고전 느와르와 90년대의 신 느와르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의 형상을 비교함으로써 남성적 정체성이 스스로를 주장하기 위해 필요한 내재적 위협으로 창조해낸환상에 머물지 않고, 이 환상을 수면으로 끌어내 남성적 게임을 완전히 수용하고 남성을 게임에서 완전히 패배시키는 대타자 위협의 효과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되는 존 달John Dahl의 영화 마지막 유혹 The last seduction의 주인공 린다 피오렌티노의 한 장면 -피오렌티노는 남자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직접 남자의 바지 지퍼를 열어서 그 안에 손을 넣고 그의 상품을 점검한다. 그녀는 나는 보지 않고는 어떤 물건도 사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이후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는 따뜻한 인간적 접촉을 거부한다.” - 은 팜므파탈 역시 남성적 환상의 실현이라는 유령적 아우라를 의도적이며 잔혹하게 떼어버리는 진정한 여성이라는 행위의 형상으로서 선명하게 각인된다.

 

한편 페미니스트 기획의 유효성 측면에서 뉴욕주립대() ‘마리나 드 카네리의 논문 일자에 균열내기: 주인, 노예 그리고 아내헤겔주인-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비판 혹은 찬양에 스며있는 오류 지적을 통해, ‘본질의 단일성을 회피하면서 인간 존재의 총체성을 사유하기 위해 일자(一者)의 균열을 도입하고, 여성을 총체성의 필수적 기능으로, 또한 치유할 수 없는 남성의 불안에 깃든 증상으로 설명해내기도 한다.

 

또한 덴마크 아루스대() ‘커스틴 힐드가르환상으로서의 성과 증상으로서의 성은 일종의 논리 수학을 통해 남성은 여성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만 보편적이 될 수 있다.”는 즉, 성차(性差)는 모순적임을 증명해 내는데, ‘중간 항 배제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는 직관주의의 논리는 아마 이 책의 신선한 지적 매력을 증폭시키는, 더욱이 라깡의 그 유명한 명제인 성관계란 없다.”의 남성이 말하는 여성적 본질 없음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를 관통하고 있기도 하다.

 

모두(冒頭)의 아이돌이 부른 노랫말로 회귀하면서 맺어야 할 것 같다. ‘동일화(同一化)’의 이야기다. 어느 순간 주체인 청년이 대타자인 사회대중의 응시에 담긴 거울상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진정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정체성이 강탈되었다는 동일화의 오류임을 자각하는, 불안의 정서가 나타났다는 것일 게다. 이러한 양상에 완전히 일치하는 정신분석적 해석이 있다.

    

대타자의 응시가 집요하고 고집스럽게 반복됨으로써 변장한 주체는 자신이 붙들려있는

동일화의 자리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다. 다시 말해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포박당했으니

이제 더 이상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콕 집어낼 수 없어졌다.”

 

아마 태민×비와이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의 처한 상황이 이것일 것이다. 꾸며낸 정체성에 자기 동일화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인식에 이미 자기 존재의 위협에 저항하는 힘이 있음을, 그의 건강한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대타자의 욕망이 되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오직 대타자가 그에게 의미가 되는 상태가 중지되지 않아야 한다. 대타자가 의미를 상실하는 때 그는 새로운 주체에 직면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 이것이 우리네(인간 존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면서 인간적 성장을 해 나갈 터이다.

 

150여 쪽 남짓의 책이지만 읽는 이에게는 1천여 쪽을 읽는 것처럼 인내와 힘겨움을 요구하는 그리 녹록치 않은 글이다. 오늘과 같이 무수한 가면, 증폭되는 내 안의 타자에 몸서리치는 환경에서 어떻게 온전한 나를 축조해 나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해 주는 풍성한 의미로 가득함을 발견하게 된다. 무의식의 주체를 다각적 층위에서 탐사함으로써 개인의 내면을 아우르고 보다 윤리적 행위가 가능한 존재로 발전하는데 귀중한 초석적 사유의 시간이 되어주는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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