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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하는 빛 ㅣ 문학동네 포에지 2000 2011
오세영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10월
평점 :
1942년에 태어난 시인이 1970년에 낸, 첫 시집을 1997년에 다시 낸 시집이다.
오세영을 모르고 있었구나.
‘모더니스트로서의 상상력과 언어감각’이 파도친다.
“시간은 함부로 태엽에서 풀려나와
고향의 봄에 피는 꽃잎을 떨어뜨리고,” 120
사물의 의인화가 빈번하고, 언어와 사물을 교직한다.
“앙상한 눈들이 내린다.
헌 외투의 승려가 지나가고
식어버린 어휘들이 굴러다닌다.” 25
“은화처럼 생각들이 굴러간다.
바람이 거울을 일그러뜨리고,
적막한 얼굴들이 뛰어나온다.
낯선 단어들이 소스라친다.” 30
“철철 흐르는 말을 거슬러온 물고기
등불을 들고, 낮은 음계를 오르면
모음과 자음으로 짜올린 투망.” 42
“울부짖는 꽃잎 사이로
끌려간 말들이 무참히 죽는다.
꽃잎들이 우수수 진다.” 58
전체적으로 묘사가 탄탄하고, 옛 시의 고루한 냄새가 적다. 지금 읽어도 신선한 느낌.
“불구의 날개. 보편 위에 퍼덕이는
인식의 날개, 날개,
떨어지고 있는 것은 꽃잎인가.” 58
몇 문학 교과서에 실린, 인간의 본원적 한계를 찌르고,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85
당대를 비판하기도 하고.
“살이 찌고 분별없이 지껄이고,
상업에 몰두하는 사나이들,
아주 헐값이라고 투덜대면서
팔려간 이 시대에 침을 뱉는다.” 51
제목이 등산인데, 바람직한 인간 관계 혹은 이상의 추구, 결국은 삶을 읊은 아래의 시가 가장 인상적이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 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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