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밤을 듣는 밤 K-포엣 시리즈 39
김명기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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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중 한 시의 저녁을 얘기한다.

“신열을 앓으며 기침하는 어린
나를 누이고 쌀을 씻던 엄마처럼
탈색된 기관지에서 이염같이
묻어 나오는 늙은 엄마 기침 소리를
등지고 쌀을 씻는다

짧은 겨울 볕을 다 써버린 채
부엌 쪽창에 희미하게 기댄
박명을 얹어 제법 따뜻한 소리로
사람 흉내를 내는 밥솥에
쌀을 안친다

한 번도 낡은 적 없는 어둠을
끌어당기듯 오래전 낡은
밥상다리를 펼치고 이웃에게서
얻은 김치를 수없이 새겨진
밥상 위 상처처럼 길게 길게
찢어 밥을 먹는다

허릿병이 심해진 엄마는
앉은뱅이 의자에 겨우 앉아
서툰 밥상에도 군말 없이 수저를 든다
암전 같이 내린 이 어둠을 갈라보면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생선 살을 발라
숟가락에 올려주던 허리 꼿꼿한
그 여자가 있을 법도 한 저녁” <신열을 앓던 저녁>

화자가 아이였을 때 화자를 보살피던 엄마가
이제 노인이 되어 화자의 돌봄을 받는다.

생선 살을 발라 올려주던 보살핌이 이웃에게서 얻어 찢은 김치로 전락한

그 쓸쓸한 모자의 사랑.

‘사는 일의 절반은 한숨이고 나머지는
신음’

‘하나같이 살기 위해 버리고 옮겨가는
헐렁해서 채워지지 않는 일생들‘

’지겹고 쓸쓸했을
가난한 생’

에 사무친다.
아프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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